▲ 벤츄라 엘비스80을 착용한 해밀턴 엠버서더 다니엘 헤니. 사진 제공/ 해밀턴

시계 브랜드마다 예닐곱에서 많게는 수십 개에 달하는 컬렉션을 두고 있다. 하지만 긴 세월 사람들 뇌리에 남아있는 스테디셀러는 손에 꼽을 정도로 그 수가 적다. ‘브랜드보다 더 유명한 컬렉션’을 살피는 것은 좋은 시계에 대한 안목을 기르는 첩경이다. 또한 갖고만 있어도 돈과 명예가 따르는 확실한 시테크이기도 하다. 브랜드보다 더 유명한 시계 컬렉션의 여덟 번째이자 마지막 이야기, 해밀턴 벤츄라(HAMILTON Ventura).

 

▲ 1957년에 등장한 세계 최초의 전자시계 벤츄라. 사진 제공/ 해밀턴

가끔이지만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해밀턴이 사람들 앞에 벤츄라라는 시계를 공개한 1957년 1월 3일도 그랬다. 해밀턴은 세계 최초의 전자시계로 업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배터리로 움직이는 시계는 당시 기계식 시계의 한계를 넘기 위해 애쓰던 시계 제조사들의 숙원이기도 했는데, 해밀턴이 그 꿈을 실현한 것이다. 그렇게 해밀턴 일렉트릭 워치는 오늘날 쿼츠 시계의 시조격이 되었다.

놀라운 것은 또 있었다. 벤츄라는 미래에서 온 듯한 아방가르드 스타일로 전에 없던 영역을 개척했다. 이와 관련해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다. 카기(Khaki) 컬렉션으로 주가를 높이던 해밀턴은 모두가 놀랄 만큼 현대적이고 유니크한 디자인을 위해 당대 최고의 디자이너였던 리차드 알비브(Richard Arbib)에게 모든 것을 맡겼다. 미국을 대표하는 산업 디자이너인 알비브는 GM의 자동차와 센추리의 보트, 유레카의 진공청소기 등 거의 모든 영역의 소비자 제품을 디자인하면서 전방위적인 경력을 쌓았다. 그는 혁신과 창의성 면에서 전설적인 인물이었고, 해밀턴도 그가 실용성에 얽매이지 않고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도록 무제한의 자유를 주었다. 당시 알비브가 해밀턴에 건넨 수백 장의 스케치 중에 1956년 5월 처음 그린 걸작이 하나 있었다. 그가 벤츄라라고 이름을 붙인 그림 속 시계는 그전까지 아무도 본 적이 없는 비대칭 스타일이었고, 지금까지도 호황을 누리는 미드-센트리 모던(Mid-Century Modern)의 전형이었다. 당시 그 어떤 시계도 이렇게까지 대담한 ‘방패 모양’의 스타일을 보여주지 못했다.

 

▲ 영화 <블루 하와이> 속 엘비스 프레슬리(위)와 그의 벤츄라. 사진 제공/ 해밀턴

사람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벤츄라는 말그대로 파란을 일으켰다. 당시 200달러부터 2000달러가 넘는 높은 가격에도 불구하고 넘치는 수요를 공급이 따라가지 못했다. 벤츄라는 일약 ‘머스트 해브’ 아이템이 되었다. 벤츄라의 앞선 스타일은 작가이자 프로듀서인 로드 설링을 비롯한 그 당시 셀러브리티들의 눈을 단박에 사로잡았다. 실제로 그의 실버 다이얼 시계는 <환상특급> 에피소드들의 오프닝 영상에서 자주 볼 수 있었다. 또 한 명의 열혈 팬은 로큰롤 황제 엘비스 프레슬리였다. 거의 모든 이가 지난 수십 년간 벤츄라를 ‘엘비스 시계’라고 부를 정도였다. 1961년 영화 <블루 하와이>에서 엘비스가 착용한 벤츄라는 유독 눈에 띄었다. 엘비스는 독일의 한 부대에서 복무했을 때에도 벤츄라를 착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군복을 입고 왼쪽 손목에 벤츄라를 찬 모습의 사진은 누구나 한 번쯤 본 적이 있을 만큼 유명하다. 대다수 군인들이 카키 스타일의 군용 시계를 찰 때 엘비스는 그렇게 시대를 앞서 나간 것이다. 엘비스는 벤츄라에 흠뻑 빠져 있었고, 그런 연유로 1960년대 초 그의 측근에 있던 이들도 벤츄라를 선물로 받았다. 엘비스는 1965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선물을 사기 위해 쇼핑을 나갔다. 그리고 곧 자신의 두 번째 벤츄라를 구매했다. 이번에는 블랙 다이얼의 화이트골드 모델이었는데, 그는 이 시계를 끝까지 보관했다고 한다. 지금 이 시계는 구매 당시 보석상의 영수증과 함께 해밀턴 워치 컴퍼니의 컬렉션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엘비스가 소유했고, 사용했다고 문서로 기록된 시계는 이 벤츄라가 유일해서 더욱 뜻 깊다.

벤츄라는 1970년대 중반, 세계 순회 전시가 종료되기 전까지 한동안 계속 생산되었다. 이후에도 수요는 줄지 않아 이내 컬렉터들의 표적이 되었다. 벤츄라의 잠재력을 확인한 해밀턴은 1988년 오리지널 모델을 복각해 내놓았다. 이후 해밀턴의 디자이너들은 리차드 알비브의 정신과 오리지널 디자인에 충실하면서도 새로운 유형의 벤츄라를 만들기 위해 애쓰고 있다. 해밀턴 벤츄라 엘비스80도 그런 결과물 중의 하나이다.

 

 
▲ 다양한 소재와 디자인으로 선택의 폭을 넓힌 해밀턴 벤츄라 엘비스80. 광택이 나는 블랙 케이스가 오토매틱, 스테인리스 스틸 케이스가 쿼츠 모델이다. 사진 제공/ 해밀턴

지난해 바젤월드 2015에서 처음 공개된 해밀턴 벤츄라 엘비스80은 예의 미래적인 디자인과 80시간 파워 리저브로 엘비스 프레슬리의 80번째 생일을 기렸다. ‘엘비스 시계’로 스타덤에 오른 벤츄라의 2015년 버전인 이 시계의 오토매틱 모델은 80시간 파워 리저브가 가능한 H-10 무브먼트에 의해 움직인다. 일종의 시그니처인 삼각형 모양 케이스는 단연 눈길을 끌 뿐만 아니라 신소재와도 잘 어울린다. 각이 진 계단 형태도 벤츄라 디자인의 진화를 암시하는 듯하다. 하이라이트는 섬세한 오렌지색 초침이 12시와 3시까지 같은 색의 분 인덱스를 지나가는 순간이다. 평행한 삼각형 선이 다이얼을 둘러싸고, 독특한 크라운이 이 특별한 시계의 외관을 완성한다. 해밀턴 벤츄라 엘비스80는 다양한 소재와 색의 조합은 물론 오토매틱 무브먼트와 쿼츠 무브먼트 중에서 선택할 수 있게 하는 등 참신함의 연속이다. 손목을 감싸는 기분 좋은 착용감은 톡톡 튀는 형태 속에 감춰진 진실. 블랙의 오토매틱 버전은 윤이 나는 PVD 케이스와 스포티한 러버 또는 가죽 스티칭에 어울린다. 스테인리스 스틸은 쿼츠 무브먼트와 잘 어울리는 한 쌍이다. 국내에서도 최근 벤츄라에 대한 문의가 잇따르면서 올봄 해밀턴 벤츄라 엘비스80 등이 정식 출시될 예정이다. 한국에서는 해밀턴의 홍보대사인 다니엘 헤니가 벤츄라의 얼굴이 된다. 블랙 케이스의 오토매틱 모델이 188만원이고, 스테인리스 스틸 케이스의 쿼츠 모델이 131만(러버 또는 가죽 스트랩)~141만원(브레이슬릿)이다.

벤츄라는 58년 전처럼 여전히 참신하고 새롭다. 진정으로 시간을 초월하는 시계인 것이다. 벤츄라가 처음 판매되었을 때 태어나지도 않았던 사람들은 벤츄라의 오리지널 디자인이 1956년 중반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을 알았을 때 깜짝 놀란다. SF 영화 속 첨단을 달리는 모습의 시계니 응당 새로 출시된 제품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갈 사실은 이 벤츄라라는 혁신적인 아이콘(컬렉션) 뒤에 다름아닌 해밀턴(브랜드)이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