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유업이 ‘바나나는 원래 하얗다’라는 흰색 바나나우유를 출시했을 때 바나나우유는 당연히 노란색이라고 여겼던 소비자들은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흰색 바나나우유의 역발상 마케팅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맹목적으로 새로움을 추구하기보다 정직함을 드러내는 데 있었다. 흰색 바나나우유를 마시는 소비자들은 새로움과 익숙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반면 검은색 콜라의 아성은 그 어떤 색으로도 무너지지 않았다. 만년 2인자였던 펩시콜라는 2002년 파란색의 펩시블루를 출시했었고, 국내에서는 해태음료가 펩시보다 앞서 노란색의 옐로콜라를 출시했었다. 콜라는 검은색이라는 사람들의 인식 자체를 바꾸려 했던 이 역발상 마케팅들은 모두 실패로 끝났다.

옐로콜라는 출시 1년6개월 만에, 펩시블루 역시 출시 2년 만에 판매부진으로 생산을 중단했다. 이들의 실패는 ‘소비자 뇌리에 박힌 인식 자체를 바꾸는 역발상은 위험하다’는 마케팅의 진리를 저버린 탓으로 풀이할 수 있다.

동국대 경영학과의 여준상 교수는 자신의 책 <회사의 운명을 바꾸는 역발상 마케팅>에서 “만약 콜라가 검은색이기 때문에 마음에 들고, 검은색이기 때문에 늘 마셔도 질리지 않는다면 콜라의 색깔 바꾸기는 무모한 시도가 된다”고 지적한 바 있다.

국내 가요계에서 미다스의 손으로 통하는 프로듀서 겸 작곡가 방시혁은 지난해 백지영 7집 수록곡 ‘총 맞은 것처럼’으로 대성공을 거뒀지만 먼저 찾아온 것은 쓰라린 실패였다.

방시혁이 대표로 있는 연예기획사 빅히트엔터테인먼트 소속 가수인 혼성 3인조 에이트의 2집이 말 그대로 쪽박을 찼던 것. 에이트는 2007년 성공적인 데뷔앨범을 발표했고 같은 콘셉트로 가면 2집 역시 순항할 것이라고 예상됐다.

하지만 이 앨범의 프로듀서였던 방시혁은 에이트가 보다 유쾌하고 쾌활한 느낌이 어울릴 거라는 생각에 비트감 있는 노래들로 선곡을 했고, 안무나 무대의상도 새로운 콘셉트에 맞추었다. 프로듀서와 마케팅 담당자는 에이트가 이미 실력파 가수로 입지를 굳혔다는 사실을 과소평가했던 것이다.

실제로 에이트는 실력 있는 신인 양성을 목표로 방영됐던 TV프로그램 ‘쇼바이벌’ 출신으로 팬들이 그들에게 기대했던 것은 진지하게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었다. 시청자들은 화려한 무대의상을 입고 경쾌한 노래를 부르는 에이트를 흰색 바나나우유가 아닌 노란색 콜라로 여긴 것이다.

새롭지만 익숙한 역발상, ‘총 맞은 것처럼’
그러나 방시혁은 오래지 않아 대반전에 성공한다. 바로 2008년 최고 히트곡인 백지영의 ‘총 맞은 것처럼’이 나온 것이다. 방시혁은 여전히 새로움을 원했지만 에이트 2집 실패가 준 교훈을 잊지 않았다.

낯설기만 한 역발상이 아니라 낯섦 속에서도 익숙함이 느껴지는 흰색 바나나우유의 역발상을 생각해 낸 것이다.

‘총 맞은 것처럼’을 타이틀곡으로 선정하는 것은 아이돌그룹이 시장을 완전히 장악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국내 가요계에서 그 자체로 모험이었다.

노래를 부른 백지영도 대세에 맞춰 타이틀곡은 댄스곡으로 가자고 했다. 만약 프로듀서가 가수를 끝까지 설득하지 못했다면 백지영의 7집 타이틀곡은 ‘입술을 주고’가 됐을 것이다.

‘총 맞은 것처럼’의 새로움은 파격적인 가사와 멜로디 전개가 거의 없는 도입부에 있다. 음악평론가들은 이 곡을 처음 듣고 굉장히 놀랐다고 한다. 일반인들도 놀란 건 마찬가지였다. 발라드에 ‘총’이라는 다소 과격한 소재가 사용된 것에 대해 거부감을 드러내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 노래에서 곧 편안한 요소들을 찾아냈다. 가사 역시 계속 듣다 보니 이별 통보를 받는 순간의 멍한 상황을 잘 표현한 것 같았다. 방시혁은 “창작할 때 의도적으로 히트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면서도, “너무 새로운 것이 좋은 것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낯설지만 그 속에서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던 게 히트의 비밀”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총 맞은 거처럼’의 앞뒤 상황을 가사로 쓴 노래들이 발표되면서 방시혁의 ‘이별 3부작’은 이제 하나의 현상이 되었다. 이별의 순간을 극적으로 담아낸 ‘총 맞은 것처럼’에 이어 이별 직후의 아픔을 노래로 표현한 것이 최근 인기를 얻고 있는 에이트의 ‘심장이 없어’이다. 이별 직전의 상황을 노래한 ‘30분전’이라는 노래도 에이트에 의해 곧 공개 될 예정이다.

이러한 시리즈 노래는 스토리텔링마케팅을 연상시킨다. 노래 한 곡에 완결된 이야기가 들어 있다고 믿어온 사람들에게 이러한 시리즈 노래 역시 신선하게 다가오고 있다. 이 노래들을 만든 방시혁은 “의도한 것이라기보다는 한 가지 주제에 천착하는 버릇에서 나온 것”이라고 얘기하지만 이러한 색다른 시도가 하나의 트렌드를 탄생시키기도 한다.

‘총 맞은 것처럼’의 후속곡 격인 ‘심장이 없어’의 초반 인기 비결에는 박진영, 백지영이라는 든든한 지원군이 크게 한몫 했다. 2000년 방시혁과 함께 JYP엔터테인먼트를 설립하기도 했던 또 다른 미다스의 손 박진영이 ‘심장이 없어’를 24시간 무한반복 청취할 만큼 이 노래에 매료됐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박진영·백지영의 입소문, ‘심장이 없어’
‘심장이 없어’ 뮤직비디오에 원더걸스의 멤버인 소희의 출연을 허락한 것도 박진영이 이 노래를 워낙 좋아했기 때문이라는 얘기도 덧붙었다.

백지영 역시 개인적으로 에이트 멤버들을 만난 감회를 언론에 밝혔다. 백지영은 특히 에이트의 여성 보컬인 주희의 가창력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러한 입소문 마케팅이 초반 인기에 날개를 달아준 것이라고 기획사 측은 분석하고 있었다.

하지만 빅히트엔터테인먼트의 입소문 마케팅은 이 분야의 대표적 성공 사례인 위니아 딤채나 이자녹스 더블 이펙트, 케라시스 샴푸, 하이트 맥주 등과는 다른 점이 있다. 소비자들이 무료로 샘플을 사용해 본 뒤 그들 스스로가 상품의 장점을 알리는 방식이 아니라 박진영, 백지영이라는 이미 검증된 유명인의 입을 동원했다는 점이 그렇다. 보다 확실하고 빠른 방법을 택한 것이다.

하지만 유명인을 동원했다 하더라도 입소문 마케팅 성공의 핵심은 변하지 않았다. 실제로 제품의 질이 좋아야지만 까다로운 소비자에게 만족을 줄 수 있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재훈 기자 huny@asia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