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브마리너 50주년 기념 모델(2003). 사진 제공/ 롤렉스

시계 브랜드마다 예닐곱에서 많게는 수십 개에 달하는 컬렉션을 두고 있다. 하지만 긴 세월 사람들 뇌리에 남아있는 스테디셀러는 손에 꼽을 정도로 그 수가 적다. ‘브랜드보다 더 유명한 시계 컬렉션’을 살피는 것은 좋은 시계에 대한 안목을 기르는 첩경이다. 또한 갖고만 있어도 돈과 명예가 따르는 확실한 시테크이기도 하다. 브랜드보다 더 유명한 컬렉션의 다섯 번째 이야기, 롤렉스 서브마리너(Rolex Submariner).

롤렉스란 이름이 처음 등장한 것이 1908년, 롤렉스란 이름의 회사가 세워진 것은 1920년이다. 그리고 1926년에는 세계 최초의 방수 손목시계인 오이스터(Oyster)가 발명되었다. ‘서브마리너’란 이름은 그보다 한참 뒤에 등장했지만 그 유명세나 존재감만큼은 브랜드나 컬렉션 명에 뒤지지 않는다. 무슨 그럴 만한 사연이라도 있었던 걸까?

 

▲ 1953년에 등장한 최초의 서브마리너. 사진 제공/ 롤렉스

1950년대 들어 민간 항공이나 해저 탐사처럼 전에 없던 새로운 카테고리가 생기고 이내 사람들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1953년 5월 29일에는 영국 등반대가 최초로 해발 8848미터의 에베레스트산 정상에 올랐다. 이에 발맞춰 롤렉스는 전문적인 활동에 필요한 기능을 가진 프로페셔널 시계를 만들기 시작했다. 에베레스트 등정과 함께 오이스터 퍼페추얼 익스플로러(Oyster Perpetual Explorer)가 나왔고, 같은 해 잠수 시간을 알 수 있는 눈금이 새겨진 회전 베젤과 100미터(330피트) 방수 기능을 갖춘 오이스터 퍼페추얼 서브마리너(Oyster Perpetual Submariner)도 모습을 드러냈다. 서브마리너는 출시된 그 해에 200미터(660피트)까지 방수 성능이 향상되는 등 다이버 워치의 숙명을 타고났다.

 

▲ 1965년과 1992년(아래)의 서브마리너 광고. 사진 제공/ 롤렉스

서브마리너는 다이버 워치의 대명사로 입지를 쌓는 한편 자신의 영역을 바다에서 육지로 점점 넓혀갔다. 심해에서 태어난 서브마리너가 활동성을 상징하는 시계가 되면서 바다와 육지 모두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 것이다. 그 활약상의 일부를 초기 007 시리즈에서도 찾을 수 있다. 서브마리너는 초기 007 시리즈의 제임스 본드와 불가분의 관계였다. 1962년에 개봉한 1탄 <살인번호>에서 본드가 찬 시계가 바로 서브마리너였다. 당시 본드와 호흡을 맞추며 해안은 물론 위기의 순간마다 서브마리너가 빛을 발하는 장면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남아있다. 이후 1963년에 개봉한 2탄 <위기일발>에서 1974년에 개봉한 9탄 <황금 총을 가진 사나이>까지 서브마리너의 존재감은 변함없이 이어졌다. 영화 속 활약상이 스크린 밖 남자들의 소유욕을 강하게 자극했음은 물론이다. 최근에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필립스 경매에서 8탄 <죽느냐 사느냐> 속 로저 무어가 찼던 시계가 우리 돈으로 약 4억2000만원에 낙찰되어 화제가 된 바 있다. 당시 제임스 본드가 바로 이 시계 테두리에 있는 회전 톱날로 밧줄을 끊어 상어로부터 여주인공을 구해냈다. 또한 시계에 내장된 강력한 자기장으로 총알을 막아내는가 하면 여성의 드레스 지퍼를 내리는 기막힌 장면도 눈에 선하다. 한때 세이코가 본드 시계의 자리를 대신하기도 했고, 17탄 <골든아이>부터 가장 강력한 라이벌인 오메가 씨마스터가 등장하면서 판도가 바뀌기도 했지만 육해공을 넘나들던 초대 본드 시계의 잔상은 쉬 지워지지 않았다. 서브마리너를 찬 남자들은 아이언맨 슈트를 입은 사람처럼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을 얻곤 했다.

 

▲ 서브마리너의 상징인 세라크롬 회전 베젤은 2008년부터 적용되었다. 사진 제공/ 롤렉스

서브마리너는 일약 스타덤에 올랐지만 안주하지 않았다. 프로페셔널 시계답게 기술적으로 진보를 거듭했다. 서브마리너의 한 방향 회전 베젤에는 60분 눈금이 새겨진 세라크롬(Cerachrom) 디스크가 장착되어 있는데, 그 덕분에 안전하고 정확하게 잠수 시간을 확인할 수 있다. 세라크롬 디스크는 모델의 종류에 따라 블랙, 블루, 그린 등 세 가지 컬러가 있다. 견고하고 무엇보다 부식에 강한 특수 세라믹 소재의 이 디스크는 스크래치가 거의 생기지 않고, 자외선에 노출되어도 변색되지 않는다. 세라믹 디스크 위에 새긴 숫자와 눈금은 롤렉스가 특허를 받은 PVD 공법을 통해 골드나 플래티넘을 원자 단위로 분사한 것이다. 베젤의 가장자리에는 홈이 파여 있어 잠수 시간을 세팅하기 위해 베젤을 돌릴 때 편하다. 2008년부터 적용되기 시작한 서브마리너의 세라크롬 회전 베젤은 이렇게 우수한 기능적, 기술적 특성 말고도 자칫 평범할 수 있는 시계에 강력한 캐릭터를 부여하기도 한다. 프로페셔널한 기능에서 나오는 이미지 메이킹의 일종이다. 다이얼로 시선을 옮겨도 간단명료한 11개의 도형 모양, 유난히 크고 볼록한 날짜 창 등 기능하는 디자인의 연속이다. 특히 희미한 해저 심연에서 도심 한복판에까지 서브마리너는 가독성 면에서 손에 꼽을 만한 실력자다. 다이얼 위의 시계 바늘과 시각 표식은 야광 효과가 일반 야광 소재보다 2배나 더 오래 가는 크로마라이트(Chromalight)로 처리되었다. 베젤에 새겨진 눈금 중 12시 방향을 나타내는 삼각형도 크로마라이트가 들어간 캡슐 덕분에 캄캄한 심해에서도 금세 알아볼 수 있다. 그런가하면 300미터(1,000피트)까지 방수가 되는 서브마리너의 오이스터 케이스는 견고함의 상징이다. 오이스터 특유의 형태를 간직한 케이스 본체는 18캐럿 골드나 부식에 강한 904L 스테인리스 스틸 덩어리에서 통째로 찍어냈다. 가장자리에 톱니 모양의 홈(fluted)이 새겨진 케이스 백은 롤렉스 워치메이커만의 특수한 공구를 사용해 스크류-다운 방식으로 고정했다. 크라운은 롤렉스가 특허 받은 3중 방수 잠금 장치로 유명한 트리플록(Triplock) 크라운인데, 케이스 본체의 일부인 크라운 가드(crown guard)로 보호되어 잠수함의 해치처럼 완벽한 방수 시스템을 자랑한다. 또한 스크래치가 거의 없는 사파이어 소재의 크리스탈을 사용했고, 일부 모델에서는 날짜 표시창의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사이클롭스 볼록 렌즈를 적용했다.

 

 
 
▲ 역대급 서브마리너들의 면면. 위에서부터 1969년(골드), 1979년, 1988년(롤레조), 2003년(50주년 기념), 2012년 서브마리너. 사진 제공/ 롤렉스

오이스터 컬렉션의 다른 시계들처럼 서브마리너 역시 최상급 크로노미터 인증을 받았다. 롤렉스는 스위스 크로노미터 인증기관에서 COSC 인증을 획득한 모든 무브먼트의 케이스를 조립한 뒤, 다시 한 번 2차 테스트를 실시한다. 공인 크로노미터보다 더 정밀한 성능을 보장하는 롤렉스의 기준을 만족시키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케이스에 무브먼트를 조립한 롤렉스 크로노미터의 평균 허용 오차는 하루 –2/+2초 정도다. 테스트는 시계를 실제로 찬 상태를 시뮬레이션하는 특수 기술과 첨단 장비로 진행된다. 모든 롤렉스 시계는 완전히 자동화된 일련의 시험 과정을 통해 방수 기능과 오토매틱 와인딩 용량, 파워리저브 등을 점검 받는다. 이런 테스트 과정은 시계의 견고함, 충격과 자기장에 대한 저항 등을 보장하기 위해 설계나 제작 단계에서 진행하는 퀄리티 테스트와 병행해 이루어지곤 한다. 이 일련의 과정이 기계식 시계가 가진 성능의 한계를 넘고, 결국 롤렉스를 최상급 워치메이커의 반열에 올렸다는 게 전문가들의 중평이다. 참고로 최상급 크로노미터의 위상을 상징하는 그린 실이 부착된 모든 롤렉스 모델의 보증 기간은 5년이다.

서브마리너 안에는 롤렉스가 직접 만든 오토매틱 와인딩 메케니컬 무브먼트인 칼리버 3130이나 칼리버 3135(서브마리너 데이트 버전)가 숨 쉬고 있다. 시계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오실레이터(진동자)에는 롤렉스가 개발해 특허까지 받은 블루 파라크롬(Parachrom) 헤어스프링이 장착되었다. 이는 자기장의 영향을 덜 받고 온도 변화에도 안정성을 유지하며 외부 충격에도 일반 스프링보다 최대 10배 정도 더 견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블루 파라크롬 헤어스프링은 시계의 위치와 상관없이 일정한 왕복 운동을 보장하는 롤렉스 오버코일 방식이다. 오실레이터는 상하 간격을 조정할 수 있는 횡단 지지대로 고정되어 있고, 오실레이터에 장착된 직경이 큰 밸런스 휠은 골드 마이크로스텔라(Microstella) 너트를 조정함으로써 일정한 왕복 운동을 유지한다. 그렇게 정확도를 더 높이는 것이다. 칼리버 3130과 3135는 영구 회전자인 퍼페추얼 로터(Perpetual rotor)를 쓰는 오토매틱 와인딩 메커니즘이다. 따라서 손목의 움직임만으로도 메인 스프링을 지속적으로 감아주기 때문에 동력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다.

서브마리너의 오이스터 브레이슬릿은 형태와 기능, 멋과 기술이 잘 조화를 이룬 좋은 예이다. 오이스터록(Oysterlock) 안전 잠금장치는 풀림을 방지해주고, 롤렉스 글라이드록(Rolex Glidelock) 시스템을 통해 브레슬릿의 길이를 원하는대로 조절할 수 있다. 클라스프(clasp) 속에 장착된 롤렉스 글라이드록은 공구를 전혀 쓰지 않고도 2mm 단위로 20mm까지 브레슬릿의 길이를 미세하게 조절할 수 있게 해준다. 심지어 최대 3mm 두께의 잠수복 위에도 착용할 수 있을 정도로 쉽다.

 

▲ 다이버 워치의 숙명을 타고 난 서브마리너. 사진 제공/ 롤렉스

서브마리너는 하이 컴플리케이션으로 중무장한 시계가 아니다. 사용하기도 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물림을 해도 가치가 전혀 떨어지지 않는 압도적인 존재감을 과시한다. 이유는 단 하나. 바다와 육지, 전문 분야와 일상, 기능과 스타일,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완벽한 밸런스가 오늘날 서브마리너를 대체 불가능한 아이코닉 워치로 만들었다. 수중 탐사와 디너 파티 모두 가능한 서브마리너는 날짜 창이 없고 칼리버 3130을 쓰는 서브마리너와 날짜 창이 있고 칼리버 3135를 쓰는 서브마리너 데이트 두 가지가 있다. 각각 904L 스틸 버전이 있고, 서브마리너 데이트는 화이트 골드, 옐로 골드, 그리고 골드 콤비 모델인 옐로 롤레조 등이 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