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옷 카탈로그 촬영장에 따라갔던 모 선배의 경험담을 들은 적이 있다. 모델이 직접 속옷을 입고 촬영을 하기 때문에, 갈아입고 벗어둔 속옷을 정리할 겸 모델이 촬영하는 틈을 타 피팅룸에 들어갔다고 했다. 그때 눈에 들어온 것은 남성 모델이 벗어둔 팬티. 평생 무난함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 아빠 속옷만 봐온 선배의 눈에, 카탈로그 모델이 입었던 팬티는 남사스러울 정도로 화려해 보였다고 한다. 게다가 선배는 아직까지 모델의 따끈한(?) 체온이 살짝 남아있는 속옷을 정리하면서 또 다시 얼굴을 붉힐 수밖에 없었다며…. 그 이야기를 전해들은 필자는 선배의 모습이 너무나 상상돼 박장대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성들에게 있어서 화려한 란제리는 패션의 일부이자 자기만족의 수단이 된 지 오래다. 하지만 남성 속옷은 꽤 오랫동안 생활필수품의 성격을 벗지 못했다. 그랬던 남성들이 변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패션뿐 아니라 몸매, 피부 등 외형에 관계된 전반적인 면에 관심을 쏟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속옷도 이젠 패션의 일부가 되어 신경 써서 선택하는 아이템이 됐다.

우선 남성 속옷의 형태가 달라졌다. 맨 처음 남성 팬티의 모양은 단순한 삼각형의 삼각팬티와 축 늘어지는 헐렁한 사각팬티로 시작했다. 이 헐렁한 사각팬티가 트렁크 팬티의 시초인데, 90년대 중반에 들어서부터 좀 더 빳빳한 소재를 사용하고 색상이나 프린트 등의 디자인적 요소가 추가되기 시작했다. 90년대 후반 이후에는 일명 ‘쫄사각’ 팬티라고 불리는 드로어즈가 등장했지만, 트렁크 팬티의 인기는 꽤 오래 이어졌다. 하지만 패션에 관한 남성들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전세는 역전됐다. 최근에는 트렁크 팬티보다는 드로어즈를 찾는 남성들이 오히려 많다. 남성들의 옷이 예전에 비해 훨씬 슬림해지면서, 허벅지 부분이 펄럭대는 트렁크 팬티보다는 딱 붙는 드로어즈가 더 적합하게 된 것.

모양 뿐 아니라 색상도 다양해졌다. 많은 사람들의 기억 저편에 남아 있는 아버지 속옷의 색상은 아직도 흰색이다. 처음 남성 팬티가 나왔을 때는 염색 기술의 한계로 흰색 속옷이 거의 대부분이었다. 이랬던 속옷이 80년대 후반부터는 회색이나 블루 등의 단색 위주로 조금 변화하기 시작했다.

눈에 띌만한 큰 변화가 없던 남성 속옷에 큰 변화의 바람이 분 것은 1990년대 중반부터다. 남성 속옷의 패션화가 시작된 것이다. 남성 속옷에 ‘패션’이 가미되면서 색상이나 무늬가 들어가기 시작했다. 전통적인 남성의 컬러로 인식되던 흰색, 블루, 블랙, 그레이 등에 이어 여성적인 색상인 빨간색이나 자주색, 심지어 형광색까지 남성 팬티에 등장했다.

가로나 세로 스트라이프 무늬를 넣어 그 간격의 다양화로 밋밋했던 팬티에 패션을 첨가한 팬티도 이 시기에 첫 선을 보였다. 그리고 이렇게 바뀐 팬티가 소비자들의 눈에 익을 무렵엔 갖가지 다양한 프린트나 색상으로 만든 제품이 연이어 출시됐다. 그러면서 이 시기부터는 오히려 흰색 속옷을 입으면 유행에 뒤떨어지거나 구세대라고 인식되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남성 속옷의 화려함이 여성 속옷에 결코 뒤쳐지지 않는다. 색상도 네이비, 그레이 등에서 벗어나 부드럽고 여성스러운 색상에 속하는 핑크나 오렌지 등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패턴 또한 예전에는 남성적인 느낌을 주는 용이나 뱀 등의 프린트, 혹은 섹시한 느낌의 호피 무늬 정도가 전부였으나, 귀여운 느낌의 동물캐릭터 무늬 등 그 패턴도 다양하며, 망사와 같은 소재나 피부가 비치는 번아웃 등의 방법을 통해 피부가 살짝 비치는 과감한 디자인도 속속 선보이고 있다.

남성 속옷이 꽤 오랫동안 ‘무난함'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던 것은 남성 스스로가 여성보다는 패션에 대한 욕구가 덜했던 까닭일 수 있다. 필자의 아버지만 해도 본인 스스로는 단 한 번도 속옷을 사기 위해 매장을 찾은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조금 시선을 바꿔보면 남편 또는 아들의 속옷을 오랫동안 대신 사다준 여성들도 남성 속옷을 너무 무난하게만 생각했기 때문이지 않을까. 적당한 색상에 튀지 않을 정도의 무늬만 있는 속옷이면 ‘이 정도면 됐다’고 생각하진 않았는지? 필자부터도 남편을 위한 패셔너블한 속옷에 좀 더 관심을 기울여봐야겠다는 반성의 시간을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