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소 무역상사에 근무하는 김 대리. 오랜만에 떠나는 미국 출장에 이만저만 가슴이 부풀어 오르는 게 아니다. 뉴욕에 도착하면 정신없이 바쁜 일정이 시작되겠지만 요즘 같은 불경기에 자기돈 안 들이고 외국 바람을 쐰다는 건 어쨌든 즐거운 일임이 분명하다.

비행기가 인천국제공항 활주로를 이륙하고 나자 스튜어디스들이 바쁘게 서빙을 시작하고 부기장의 간략한 비행 브리핑이 시작된다.

부기장의 브리핑 끝머리에 오늘 이 항공기를 몰고 뉴욕까지 갈 외국인 기장에 대한 소개가 간략하게 이어진다.

김 대리는 문득 궁금증이 일었다. 파일럿이라고 하면 높은 연봉에 미녀 스튜어디스들과 전 세계의 하늘을 누비는 대표적인 럭셔리 직업으로 알려져 있다. 과연 그들은 얼마나 많은 돈을 벌고 화려한 생활을 하고 있을까?

김 대리의 궁금증은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한 번쯤은 가져봤음 직한 생각이다. 항공기는 현재 가장 비싼 교통수단이다. 국내선이 크게 발달하지 않은 우리나라에서는 외국 갈 일이 없으면 비행기 탈 일도 없다는 게 일반적이다. 그러다 보니 주변에서 비행기를 한 번도 타보지 않은 사람을 찾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국내 항공사에 기장만 440명 근무
보통 사람들로선 비행기를 거의 매일 타고 하루가 멀다 하고 해외를 방문하는 파일럿들을 동경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국내 민항사의 파일럿들에게 물어보면 대부분 손사래를 친다. 수백 명의 승객들을 하늘로 실어 나른다는 일이 주는 중압감에 기장이 되기까지의 험난한 과정들을 생각해 보면 지금의 생활이 썩 만족스럽지만은 않다고 한다.

그리고 진짜 럭셔리한 라이프를 사는 사람들은 따로 있단다. 바로 같은 항공사에 근무하는 외국인 기장이 바로 그들이다. 외국인으로써 국내 항공사에 취직해 민항기를 몰고 국제선을 비행하는 외국인 기장들.

그들은 과연 얼마나 귀한 대접을 받기에 같은 파일럿들조차도 이들을 부러워하는 걸까?

현재 국내 항공사에 근무 중인 외국인 기장들은 대략 440명 수준이다. 이들은 전부 대한항공이나 아시아나항공처럼 국제노선을 운항하는 국내 항공사에서 일하고 있다.

언뜻 생각해 보면 내국인 조종사들에 비해 비싼 돈을 줘야 할 것 같은 외국인 기장을 굳이 쓰는 이유가 이해가 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업계의 설명을 들어보면 사정은 좀 다르다.

일반적으로 항공기의 조종을 하는 인력은 기장과 부기장 두 명이다.
조종사가 되기 위해서는 일단 라이선스를 취득한 인력들이 항공사에 입사해 국내교육을 거쳐 해외교육까지 끝마치고 비행시간 1000시간을 채운 후에야 비로서 부기장이 될 수 있다.

부기장으로 최소한 10년은 넘게 지내야 기장이 될 수 있다 보니 현재 전 세계적으로 항공기의 기장 인력들이 부족인 상태다. 최근 들어 경기 악화로 항공 수요가 줄면서 조종사 인력들도 다소 여유가 생겼지만 호황기를 대비하기 위해서는 항상 조종 인력을 많이 확보해야 하는 게 항공사의 지상 과제다.

환율 1400원 기준 월 1400만원 정도 받아
대한항공이나 아시아나항공이 외국인 기장들을 열심히 영입해 쓸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현재 국내 항공사에서 활동하는 외국인 기장들은 소속이 모두 해외의 에이전시다.
대한항공이나 아시아나항공이 직접 채용하는 게 아니라 외국의 에이전시에 소속된 기장들을 파견받는 형식으로 쓰고 있는 것이다.

현재 국내 항공사들은 최근 들어 외국인 기장에 이어 부기장까지도 외국인들의 채용을 늘려가고 있다. 내국인 부기장을 기장으로 승격시키기 위해서는 당장에 활용 가능한 부기장의 숫자도 그만큼 충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외국인 기장들은 과연 얼마나 귀한 대접을 받고 있을까? 외국인 기장들에 대한 채용 계약은 모두 개별적으로 이뤄지는 데다 대외비로 꼽히기 때문에 정확한 대우 수준을 알 순 없다.

그러나 그들과 자주 접하는 내국인 기장들을 통해 어느 정도 외국인 기장들의 처우 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 일단 국내에서 일하는 외국인 기장들은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 모두 매월 1만달러 이상의 급여를 받는다.

환율을 1400원으로 계산했을 때 매월 1400만원의 월급을 받는 셈이다. 항공사에서는 이들의 급여 외에 에이전시에 지급하는 3000만원가량의 수수료도 부담을 하니 실제로 외국인 기장 한 명에게 지급하는 돈은 1만3000달러 수준인 셈이다.

한 달 휴가 9일…집에 갈 땐 일등석 이용
이들이 내국인 기장들보다도 많은 급여를 받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항공사 관계자에 따르면 “외국인 조종사들은 복지후생에 대한 지원을 전혀 받지 못한다”며 “급여 외에 다른 것들을 제공받지 못하는 외국인 조종사와 각종 수당에 교육비 혜택 등을 누릴 수 있는 내국인 조종사의 급여를 직접 비교하는 것은 무리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외국인 조종사들이 누리는 럭셔리한 보너스들은 다른 데 있다. 현재 국제선을 운항하다 국내선으로 전환해 있는 한 내국인 기장은 “국내에서 일하는 외국인 기장들의 급여 수준은 외국에 비해 크게 많진 않지만 적지도 않다”며 “그러나 대우 수준은 가히 세계 정상급이다”고 말했다.

일단 대한항공에서 일하는 외국인 기장들은 한국에 집을 두고 살면서 가사를 전혀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왜냐면 항공사 측이 이들의 숙소로 인천의 하얏트 호텔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일상생활에 관련된 모든 일들은 호텔 측에 맡기고 그들은 집으로 돌아오면 그저 편안히 휴식만 취하면 된다. 아시아나항공의 경우에는 회사 측에서 아파트를 제공하고 있다.

휴가는 한 달에 총 9일. 이동하는 시간까지 합치면 최고 13일을 쉴 수 있다. 게다가 가족들을 만나기 위해 출국할 때는 퍼스트클래스 티켓이 무상으로 제공된다. 현재 대한항공 미주노선 LA행 티켓의 경우 적게 잡아도 왕복 800만원. 외국인 기장들은 일반인들이 타보기도 힘들다는 엄청나게 비싼 일등석 항공권을 매달 공짜로 이용하는 것이다.

이게 끝이 아니다. 외국인 기장의 가족들에게는 1년에 비즈니스 티켓 4장, 이코노미 티켓 4장이 공짜로 제공된다. 1년에 24일을 쓸 수 있는 연가 기간에 가족들과 여행을 갈 때는 수백만 원어치 티켓을 모조리 공짜로 쓸 수 있는 셈이다.

국내 대형 항공사 한 현역 기장은 “풍부한 휴가, 엄청난 항공권 혜택에 기종 전환에도 외국인 기장들에게는 우선권이 주어진다”며 “같은 항공사에서 근무한다고 해도 그들에게 쏟아지는 럭셔리한 조건들을 보면 솔직히 부러울 따름”이라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군대식 기업문화 때문에 고생도
그러나 외국인 기장들도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국내에서 일한지 2년 된 50대 초반의 미국 출신 한 기장은 “한국인 조종사 노조의 눈총과 독특한 군대식 기업문화 때문에 고생도 많이 한다”며 “특히 수석 교관들의 대부분이 공군 출신이라 그런지 오로지 한국에만 있는 군대문화는 상당히 적응하기 힘든 면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외국인 계약자는 노조를 만들 수 없는 점과 같이 일하는 동료들로부터 이방인 취급을 당하는 등의 문제도 우리들의 고충”이라고 덧붙였다.

지금도 대한항공에 공급되는 외국인 조종사 전담 해외 에이전시 CCL(www.cclaviation.com)사의 홈페이지에는 이런 안내문에 게재되어 있다.

“칼 기장과 승무원들에게는 최고의 급여와 월 9에서 11일의 지속적인 휴가를 보장한다. 비행 기종에 상관없이 파일럿에게는 홈베이스 선택에 있어서 월드와이드한 선택권을 준다. 서울에 있는 동안에는 훌륭한 환경과 승무원 라운지를 갖춘 여가활동이 가능한 인천 하얏트 호텔에서 지낼 수 있다.”

안승현 기자 zirokool@asia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