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경제학에 따르면 사람들은 손실회피 성향을 가지고 있다. 이득을 얻을 때의 기쁨보다 손해를 볼 때 슬픔이 더 중요하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100만 원을 얻을 때 느끼는 기쁨의 강도보다 100만원을 잃을 때 느끼는 고통의 강도가 더 크다. 돈으로 따지면 똑같은 100만 원이지만 손해를 볼 때 느끼는 감정이 더 강렬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의사결정을 할 때 이득을 추구하는 것보다 손실을 회피하는 것이 더 중요해진다. 투자자가 투자를 할 때 손해를 두려워해서 보수적인 투자를 하는 경향도 이 이론으로 설명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손실회피 성향을 지니고 있을까? 경제학계에서 최근 부상하고 있는 분야인 신경경제학의 연구결과들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신경경제학에서는 두뇌를 MRI와 같은 영상장치로 촬영해서 사람들이 경제적 의사결정을 할 때 두뇌가 어떻게 작용하고 반응하는지를 파악한다. 디 마르티노 박사팀의 연구에 따르면 편도체가 손상된 환자들은 손실회피 성향을 보이지 않는다. 즉 사람들의 손실회피 성향은 두뇌 속에 있는 편도체의 작용 때문이다.

지난 여름에 개봉했던 애니메이션 <인사이드 아웃>에 보면 사람들의 두뇌에 살면서 5가지 감정을 담당하는 등장인물들이 나온다. 기쁨이, 슬픔이, 버럭이, 까칠이, 소심이 이렇게 다섯 가지 감정이다. 손실회피 성향을 만들어내는 편도체의 역할은 까칠이와 소심이의 합작품처럼 보인다. 진화 현상을 연구하는 학자들에 따르면 원시시대 사람들은 불확실한 상황에 대해 쉽게 공포를 느끼고 극도로 조심하는 성향을 발달시켰다.

소심이와 까칠이는 원시시대에 인류의 두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다. 아마도 천둥이나 번개와 같은 이해할 수 없는 자연현상 속에서 조심하고 안전하게 행동하는 것이 생존에 유리했을 것이다. 또한 이러한 성향이 진화과정을 통해 현대인의 두뇌에도 각인되어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손실회피 성향은 인간들의 본능이며 생물학적 반응인 것이다.

손실회피 성향이 인간들의 천성이라고 할지라도 그 정도는 나라마다 다를 수 있다. 호프스테데 교수의 문화이론에 따르면 국가·문화권에 따라 사람들의 성향들이 다르게 나타난다. 예를 들어 북미와 유럽 국가들에서는 개인주의 성향이 강하게 나타나며 그 외 국가들 특히 아시아 국가에서는 집단주의 성향이 강하게 나타난다. 보통 상호의존적이고 상호 관계를 중시하는 동양권 사람들이 방어적이며 손실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손실회피 성향이 동양권에서 더 강하게 나타날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 논문에 따르면 이러한 예상과 정반대의 결과가 나타난다. 이 논문에서는 미국 대학생들과 중국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했는데, 중국인들이 미국인들보다 더 위험을 감수하는, 모험적인 투자 결정을 한다는 결과가 나타났다. 일반적인 예상과 달리 중국인들이 미국인들보다 손실회피 성향이 덜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논문의 저자들은 이러한 결과를 ‘쿠션 가설’로 설명한다. 쿠션 가설에 따르면 집단주의 문화권에 있는 사람들은 금전적인 도움을 가족이나 친지 등 주변 사람들에게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손해가 나더라도 버틸 수 있고, 이러한 이유로 투자를 할 때 개인주의 문화권 사람들보다 더 위험한, 모험적인 투자를 실행하게 된다. 즉 투자에 실패하더라도 주변 사람들이 쿠션의 역할을 하기에 손실에 대한 두려움이 줄어든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경제는 기본적으로 위험을 감수한, 모험적인 투자를 통해 성장을 이루어내는 시스템이다. 쿠션 가설에 따르면 실패하더라도 받아줄 쿠션이 사회에 존재해야 모험적인 투자가 촉진된다. 동양권 국가들의 집단적인 문화에서는 가족이나 친지 등 혈연 공동체가 그러한 쿠션 역할을 해왔다고 볼 수 있다.

최근 한국사회는 1인 가정 증가와 가족의 부양 기능 쇠퇴 등의 추세를 보이고 있다. 즉 쿠션으로서의 혈연 공동체의 기능은 점점 줄어들고 있는 상황이다. 만약 이러한 사회적 추세가 손실회피 성향을 강화하고 모험적인 투자를 막는 방향으로 진행된다면 장기적으로 경제의 활력을 잃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최근 매스컴에서 한국 기업들이 현금을 쌓아두면서 투자를 하지 않는다는 지적이 계속 이어지고 있는 데 예사롭지 않게 들리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