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상이변이 심해지다 보니 계절을 잊는 게 사람뿐이 아니다. 온갖 생명체들도 혼란을 겪기는 마찬가지다. 하지만 살을 에이는 칼바람도 위력을 잃어가는 것을 보면 벌써 봄에 한 발짝 다가선 게 분명하다. 창밖에 보이는 벚나무의 몽우리가 살집을 더한 것으로 느껴지는 것 또한 봄의 계시 아닐까.

볼프강 슈나이더한이 연주한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봄의 LP 음반

비온디의 비발디 ‘사계’
봄을 부르는 음악은 그래서 더욱 아름답다. 같은 햇살이라지만 봄의 그것은 음악의 선율에 윤기를 더하는 마력이 있는 게 분명하다. 봄을 부르는 음악의 1호는 이탈리아의 작곡가 안톤 비발디의 ‘사계’.

필자의 오디오 취미생활을 풍요롭게 하는 많은 정보를 제공한 네이버 카페 ‘예음당(cafe.naver.com/bbung24. cafe)’의 회원들이 가장 좋아하는 봄의 노래 역시 비발디의 사계. 특히 압도적인 인기를 끈 음반은 파비오 비온디(Fabio Biondi)와 유로파 갈란테(Europa Galante)가 연주한 음반이다.

두 번에 걸쳐 녹음된 비온디의 음반은 가히 폭발적이라는 표현이 어울린다. 겨울잠을 자던 개구리를 깨워낼 정도로 폭발적인 현의 선율. 그래서 오디오파일의 테스트용 음반으로도 인기를 끌고 있다.

예음당 회원 코간님은 “비발디의 ‘화성과 창의에의 시도 12곡’ 중 1~4번인 사계는 당시 이탈리아에서 유행했던 소네트라는 14행 시의 형식으로 작곡됐다”고 소개했다. 이 음반은 2000년 오푸스와 2001년 버진 판의 두 가지가 있다.

필자가 즐겨 듣는 사계는 네빌 마리너와 세인트마틴인더필즈가 연주한 사계. 원전 연주에 충실한 마리너의 사계는 과장되지도, 그렇다고 부족하지도 않은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의 봄을 느낄 수 있도록 인도한다.

사계 연주의 백미로 꼽히는 이무지치(I Musici)의 사계도 여전히 사랑받는 베스트셀러 음반의 하나로 꼽히며, 나이젤 케네디(Nigel Kennedy)의 사계에는 젊음의 새로운 도전이 묻어난다.

황병기 선생의 가야금 작품집 〈침향무〉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봄’
대중에 가장 친숙한 작곡가 베토벤도 봄을 연주한 선율을 선보였다. 이번에는 바이올린 소나타 5번 ‘봄’. 바이올린과 피아노가 대화하듯 연주하는 1악장에 이어 다소 익살스러운 2악장 등 한마디로 즐거운 기분을 한껏 북돋아주는 곡이다.

잘 알려져 있는 ‘크로이처’ 소나타와 함께 이 곡은 바이올린 소나타 가운데 가장 인기를 끄는 곡이다.
필자는 지노 프란체스카티가 연주한 음반을 즐겨 듣는다. 예음당 파케구루님은 메뉴인과 켐프가 연주한 음반과 함께 페를만과 아시케나지 연주음반을 추천했다.

슈만 교항곡 1번 ‘봄’
봄을 노래한 대편성곡 중에는 슈만의 1번 교향곡이 가장 대표적이다. 고전주의 형식에 더 가까운 교향곡을 작곡한 슈만은 결혼 직후 이 곡을 작곡한 데서 보듯 인생의 새로운 시작을 봄으로 표현했다.

마치 봄을 재촉하듯 트럼펫과 호른으로 연주하는 시작부터 빨라지는 템포도 봄 기운이 하루가 다르게 다가서는 느낌을 묘사한 것처럼 느껴진다. 3악장은 ‘희롱’이라는 부제가 붙어서 봄의 즐거움을 유머러스하게 나타낸다. 이 곡을 추천해준 예음당 brunocote님은 “만물이 소생하고 얼어붙은 강물이 얼음을 깨뜨리며 넘실대는 역동감으로 시작한다”고 묘사했다.

요한 스트라우스 2세 ‘봄의 소리 왈츠’
매년 신년음악회로 새해의 처음을 알리는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필수 연주 레퍼토리 가운데 하나인 요한 스트라우스 2세의 ‘봄의 소리 왈츠’도 봄에 듣기에 안성맞춤이다.

1883년에 작곡한 이 작품은 원래 소프라노 독창곡이었지만 오케스트라로 연주된다. 봄을 주제로 대화를 나누는 듯한 3박자 춤곡의 리듬은 듣는 이를 들뜨게 하기에 충분하다.

필자는 빈 신년음악회 가운데 빌리 보스코프스키(Willi Boskovsky)가 1979년에 연주한 음반과 1992년 카를로스 클라이버(Karl Ludwig Kleiber)가 지휘한 두 음반을 가장 좋아하는데, 보스코프스키는 힘찬 역동성 면에서 다른 어떤 연주에서도 느낄 수 없는 감흥이 있으며 클라이버는 물 흐르듯 유쾌한 연주가 듣는 이를 기쁘게 해준다.

뉴에지 피아니스트 마이클 존스의 ‘After the Rain’

황병기 선생의 ‘봄’
우리 시대 최고의 국악 작곡가인 황병기 선생의 가야금 작품집 1집 〈침향무〉에 소개된 ‘봄’은 서양음악과 달리 차분하게 봄을 맞을 때 어울리는 곡이다.

1967년에 작곡된 이 작품은 마치 얼음 사이로 새 기운을 받은 맑은 물이 흐르는 것을 연상시켜 주며, 같은 음반의 ‘가을’과 함께 계절을 만끽할 수 있는 작품이다. 황병기 선생의 1집에는 이 밖에도 대표곡 ‘침향무’를 비롯해 숲, 석류집, 가라도 등 주옥같은 작품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마이클 존스의 ‘스프링 송’
조지 윈스턴이 겨울을 주로 연주한 피아니스트라면 마이클 존스는 봄을 노래했다. 캐나다 출신 반주자인 존스는 뉴에이지 녹음을 주로 하는 명문 레이블 나라다 로터스(Narada Lotus)를 통해 따뜻하면서도 자유로운 봄을 선보였다.

이 음반에는 ‘스프링 송(Spring Song)’을 비롯해 After Rain, Morning Mist, Water’s Edge, Swallows in Flight 등 봄의 분위기와 어울리는 아름다운 곡들이 다수 섞여 있다.

플루트에서 느끼는 봄의 선율
봄의 소리 왈츠에 버금가는 플루트 연주도 봄을 노래하고 있다. 예음당 바론님은 장 피에르 랑팔과 제임스 골웨이 두 플루티스트가 연주한 음반을 추천해준다. 랑팔이 연주한 ‘Bolling Suite for Flute’.

크로스 음반의 원조로 알려진 이 음반은 클래식과 재즈를 넘나드는 신기원을 기록했으며 빌보드 차트에 10년 이상 랭크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제임스 골웨이가 연주한 ‘Tiemo Libre’도 랑팔과 함께 쌍벽을 이루는 연주로 꼽혔다.

전문가인 교보문고 핫트랙의 음악 마스터 이혜원 씨는 봄을 주제로 한 선율로 모두 5곡을 추천했다. 첫 번째 곡은 메르카단테(Mercadante)의 플루트 협주곡. 제임스 골웨이가 연주한 이 음반은 섬세한 플루트와 이 솔리스티 베네티(I Solisti Veneti)의 윤기 흐르는 앙상블을 통해 다가오는 새소리를 들려준다.

오이겐 키케로(Eugen Cicero)의 ‘로코코 재즈 미뉴에트’는 클래식과 재즈를 접목시킨 크로스오버 연주로 재기발랄한 선율을 보여주는 음반으로 추천됐다. 안드레 리우(Andre Rieu)의 로열 알버트홀 라이브 공연은 21세기 왈츠의 왕으로 꼽히는 안드레 리우가 연주하는 봄의 소리 왈츠부터 라데츠기 행진곡, 푸니쿨리 푸니쿨라 등을 선보인다.

이 밖에 요요마의 ‘Appalachian Journey’도 고향의 봄을 느낄 수 있는 곡으로 꼽혔다. 소프라노 바바라 보니(Barbara Bonney)의 〈노래의 날개 위에〉 음반에는 멘델스존 봄 노래와 모차르트 봄의 동경 등 감미롭고 사랑스러운 멜로디가 넘쳐난다.

네빌 마리너의 원전음반 사계

재즈로 듣는 봄 노래
재즈 애호가인 회사원 이모(42) 씨는 봄을 느낄 수 있는 재즈 선율로 카운트 베이시(Count basie) 오케스트라가 연주한 ‘April in Paris’를 추천한다. 이 곡은 빅밴드 편성으로 스윙재즈의 참맛을 고스란히 전해준다는 것. 이 씨는 “이 곡을 들으면 봄빛 낭만이 가득한 파리의 거리가 눈앞에 어른거린다”고 말했다.

클리포드 브라운(Clifford Brown)과 맥스 로치(Max Roach)의 ‘Joy Spring’은 스물 다섯 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불꽃 같은 삶을 살다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달리한 천재 하드밥 트럼페터의 명곡을 담고 있다. 반복되는 리듬 패턴이 듣는 사람을 사로잡는 하드밥 스탠더드.

3대 재즈 보컬리스트의 한 명으로 꼽히는 사라 본(Sarah vaughan)의 ‘Spring can really hang you up the most’는 완만한 현악 선율 위에 펼쳐지는 봄의 향기를 담았다.

아시아경제신문 조영훈 금융부장 (dubbcho@asia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