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MBC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을 기억하시나요? 정확히 10년 전인데요, 저는 그때 군대에 있었습니다. 말년 병장이었는데 어느날 당직사관 지시가 떨어졌습니다. 분대원들이 원하는 것을 청취하라는 약간 미묘한 지시였어요. 그때 나이 많은 후임병 중 하나가 수줍은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내 이름은 김삼순 보여주면 안됩니까?’

파리의 연인 이후로 제 인생의 드라마로 당당히 자리매김한 삼순 누님과의 만남이었습니다.

 

 ‘반짝반짝’ 빛나는 스타트업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에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유희진(려원)이 김삼순(김선아)에게 가려는 헨리 킴(다니엘 헤리)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지금은 반짝반짝 거리겠지.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 같아. 지금은 아무리 반짝거려도 시간이 지나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된다고” 크. 가슴을 울리는 명대사입니다. 당시 이 장면을 지켜보던 저는 “드라마가 상당히 잘 만들어졌어. 특히 미장셴이 예술이야”라며 팔짱을 꼈고 분대원들은 “그럼 나에게 안겨 이 바보야!”라고 외쳤죠. 어리석은 녀석들. 남자는 가슴으로 우는 법이랍니다?

그런데 왜 갑자기 김삼순 타령이냐고요? 살짝 당황스럽겠지만 스타트업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모두 스타트업 전성시대라는 말을 한 번 정도는 들어봤을 겁니다. 잘 나가던 대기업을 나와 스타트업에 뛰어드는 사람들 이야기도 종종 들려요. 억 대의 연봉을 받던 사람이 갑자기 월 100만 원도 못 주는 스타트업에서 일한다? 그 정도로 스타트업이 매력적이라는 뜻이겠죠. 불세출의 명작인 원피스에서 그려지는 대해적 시대가 생각납니다. (약탈과 가혹함은 모두 버리고) 꿈과 열정으로 모험을 떠나는 사람들! 스타트업 대항해시대입니다.

주변 분위기도 매우 좋습니다. 최근 스타트업 대표들을 만나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어요. “예전보다는 나아졌어”라는 말. 맞습니다. 아직 대기업의 횡포, 사기와 같은 문제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으나 이제 어느 정도 스타트업 생태계 자체가 확고하게 자리를 잡는 분위기입니다. 정부정책도 부족하지만 일관성을 가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지원정책도 탄력을 받고 있으며 인큐베이팅을 자처하는 곳도 많아요. 구글도 서울캠퍼스를 열었지 않았습니까? 창조경제가 갑작스럽게 스타트업 지원으로 굳어지는 분위기도 연출됩니다. 대기업들은 창조경제혁신센터를 매우 매우 즐거운 마음으로 운영하고 있다죠?

여기에 모바일 인프라가 굳건하게 자리를 잡으며 소위 대박이 터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스타트업으로 부르기에는 무리가 따르지만 카카오와 쿠팡과 같은 큰 손들이 강력한 로드맵을 보여주거나 막대한 자금을 유치하고 있죠. 스마트폰으로 대표되는 모바일 시대가 끝없는 바다라면, 무수한 스타트업은 대양 너머의 신대륙을 향해 항해하는 모험가, 혹은 해적입니다.

재미있는 현상은 최근 스타트업 선순환 생태계가 커다란 관심을 모으고 있다는 점입니다. 예전에는 기업을 키워 상장을 하는 것이 최우선 목표였다면, 이제는 기업을 키워 인수합병을 통해 ‘엑시트’하는 것이 대세입니다. 제2의 네이버와 카카오가 등장할 가능성이 낮아지기는 하지만 이는 현실적인 요인을 적절히 고려했을 때 상당히 괜찮은 전략으로 보입니다. 우리도 페이팔 마피아를 가질 때가 되었죠! ‘스타트업 설립-엑시트-스타트업 설립’으로 이어지는 유기적인 구조는 전반적인 경제의 역동성에도 도움을 줄 전망입니다.

농부와 비슷해요. 열심히 벼농사를 해서 그 수확물로 거대한 벼농장을 만드는 것도 좋지만, 어느 정도 수준에 올랐을 때 이윤을 확보하고 벼에서 포도로 종목을 바꾸는 겁니다. 결론적으로 다양한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결과, 현재 스타트업 생태계는 서서히 약직하면서 운신의 폭을 넓히고 있습니다. 충실하게 사업을 펼친다는 전제로 사기꾼만 조심하면 됩니다.

“시간이 지나면 아무 것도 아니다”

하지만 최근 스타트업 위기설도 심심치 않게 들리고 있어 눈길이 쏠립니다. ‘아직 시작도 안했는데, 이제 뭔가 좀 해보려고 준비하며 움직이고 있는데 벌써?’라는 의문이 고개를 들어요. 솔직히 초기 스타트업 위기설은 특정 기업의 비즈니스 모델을 두고 벌어졌었죠. 옐로모바일이 대표적입니다. 리타워텍의 악몽을 기억하는 이들에게 옐로모바일은 ‘악몽의 재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니까요.

쿠팡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국에서는 아마존이 로컬을 접는 등 소셜커머스의 위기가 넘실거리는 상황에서 적자를 메울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이야기가 맴돌았죠. 하지만 이런 논란은 현재 진행형이면서 완벽한 결론도 없습니다. 옐로모바일은 아직 숨을 고르며 새로운 가능성을 여전히 모색하고 있으며, 쿠팡은 공격적인 행보로 강력한 물류 생태계 장악을 천명하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지금의 스타트업 위기론은 옐로모바일과 쿠팡과 같은 특정 기업의 담론을 넘어 전방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모바일 시대가 스타트업을 키웠으나 이제 그 성장의 한계가 뚜렷하고, 뚜렷한 수익화 모델도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에요. 이런 주장의 기저에는 ‘스타트업 열풍이 가열됐다’는 경계론이 깔려있습니다. 물론 지금 당장 스타트업 업계가 침체될 것이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다만 이제 시작해서 움직이려 하는데 벌써부터 위기론이 번지고 있다는 것은 미묘하다는 점을 말하고 싶은 거에요.

이 지점에서 ‘반짝반짝’한 스타트업이 정말 ‘반짝’하는 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는 것에도 집중해야 합니다. 미국 식품의약국(FDA)이 지난달 27일(현지시각) 현지에서 바이오 벤처 신화로 칭송 받아온 캘리포니아주 팰러앨토 소재 테라노스(Theranos)가 사용한 작은 채혈 용기 '나노테이너(nanotainer)'를 '불명확한 의료기기'로 단정지었던 것이 대표적입니다. 피 한 방울로 다양한 질환검사가 가능하다고 했던 테라노스가 코너에 몰렸어요.

▲ 출처=테라노스

테라노스는 엘리자베스 홈스가 19세에 창업한 스타트업입니다. 언론의 폭로가 있기까지 홈스는 말 그대로 미국 스타트업의 신데렐라였어요. 하지만 그녀는 지금 대중으로부터 ‘사기꾼’ 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스타트업 열풍이 가열됐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매우 흡족해하는 일이에요.

아, 물론 국지적인 일이라고요? 안타깝지만 미국시장 전반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드롭박스는 지난해 자산가치를 무려 100억 달러로 불렸으나 지금은 투자은행으로부터 철저하게 외면받고 있습니다. 아마존의 대항마로 불리던 제트는 비공개 펀딩을 진행하며 몸값을 30억 달러에서 20억 달러로 낮췄어요. 모바일아이언, 에이피지 등 테크기반 스타트업 몸값도 지속적으로 낮아지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투자자들이 스타트업을 대할 때 미래가치에 방점을 찍었다면, 이제는 실제수익을 면밀하게 관찰한다는 말도 나옵니다. 그리고 이러한 분위기는 곧 우리의 현실이 될 수 있지요. 닷컴버블 이후 최근 스타트업 자금 소진율이 사상 최고라는 경고도 주의깊게 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 유희진(려원)이 김삼순(김선아)에게 가려는 헨리 킴(다니엘 헤리)에게 했던 말을 곰곰이 되짚어 볼 이유가 생기죠.

여기서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최근 사석에서 만난 한 스타트업 대표는 저에게 이런 하소연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정부지원이나 기타 좋은기회를 말 그대로 알맹이 없이 따 먹는 체리피커가 너무 많다”라는 말입니다. 이 문제는 참 고민이 많이 됩니다. 하지만 시장자정에 맡겨야 한다는 의견도 있으니 일단 넘어가고요. 더 중요한 말은 다음에 나왔습니다. 대표는 “스타트업도 경계가 너무 명확하다. 잘 나가는 스타트업에 정책의 수혜가 집중되고 있다. 진골 스타트업이 대다수 스타트업을 누르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일부의 사례겠지만 만약 이런 분위기가 사실이라면 현재 국내의 스타트업은 구조적인 문제까지 해결해야 하는 이중고를 겪는 셈입니다. 몇몇 소위 성공한 스타트업 대표들은 공식석상에서도 “내가 대한민국 스타트업을 대표한다”고 말하곤 합니다.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는 뜻이겠지만, 부디 쓸데없는 자부심이 아니길 바랍니다.

결론적으로 스타트업 위기론이 번지는 이유는, 시장의 한계와 그에 수반되는 ‘옥석 가리기 심화’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국내에는 생태계 자체가 온전하지 못하고 약간 고리타분하지만 대기업의 횡포, 사기꾼의 등장을 예로 들 수 있겠네요.

그럼에도 미래를 본다

지금 스타트업을 통해 비전을 보는 분들은 위기론이 불거지면 항상 “아직 시작도 안했다!”고 항변합니다. 맞습니다. 하지만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말 그대로 그들의 바램이 아닐까요. 시작도 하지 못했으나 무너져버린 것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래를 보아야 한다는 것에 한 표를 던지고 싶습니다. 냉정하게 말해서 위기론은 실체가 있지만 현재의 스타트업 열풍이 닷컴열품 당시처럼 두서없는 갈지자 행보를 보이는 것은 아니니까요. 오히려 위기설과 더불어 냉정한 상황판단이 개입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조기에 거품이 빠지고 있다는 것이 아닐까요? 많은 고민이 필요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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