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언론 보도를 통해 심심찮게 접하게 되는 경제사회 분야 글로벌 순위 가운데, 비교적 대중의 높은 관심을 끄는 것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와 연관된 순위들이다. 최근 OECD 34개 회원국 가운데 2위를 차지한 항목이 있었다는 기사를 보았다. 기자가 아는 수준에서 볼 때 우리나라 자살률이 OECD 1위를 기록했다는 것 빼고는 2위를 차지한 것이 무엇일까 궁금했는데, 다름 아닌 취업인구 1인당 평균 연간 근로시간이었다. OECD 통계에 따르면 2014년 기준 한국의 취업자 1인 평균 노동시간은 1년 동안 2124시간으로 1위 멕시코(2228시간)에 이어 은메달을 달았다.

이는 임금노동자와 자영업자, 시간제 노동자 모두 포함한 전체 취업자의 평균 노동시간으로, OECD 평균(1770시간)보다 354시간 더 많은 수치다. 이를 주 단위로 환산하면 한 주일에 우리나라 노동자는 평균 약 7시간을 더 일하는 셈이다. 자랑할 만한 순위도 아니고 더욱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인데 굳이 왜 들추느냐고 눈총을 줄지 모르지만, 현재 지지부진하게 진행 중인 노사정위원회의 노동개혁 협상이 오버랩됐기 때문이다.

지난 9월 중순 노사정위는 노동시장 구조 개선을 위한 노동개혁 추진에 합의했다. 이해당사자의 한 축인 노동계의 반대 속에서도 정부 여당의 후원을 입고 노사정위는 법적, 제도적 후속조치를 만들기 위해 전문가그룹에서 절충안 만들기에 착수했으나, 워낙 큰 입장차로 인해 좀처럼 ‘2차 합의안’이 나오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세계 최장에 가까운 노동량을 나타낸 우리나라 ‘노동의 소프트웨어’를 간과한 채 ‘노동의 하드웨어’를 손질하려는 노동개혁에 대한 안타까움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장시간 노동과 관련, 기자가 직접 보고 전해들은 외국인 관련 이야기 두 가지를 먼저 소개하고자 한다. 지난 봄 우연히 시청한 TV 프로그램에서 한국에 진출한 일본 기업에서 일하는 일본 여성 직장인이 출연해 “한국인들은 근무시간이 끝났는데도 왜 퇴근하지 않고 늦게까지 남아 일하는지 모르겠다”며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던 모습이 생각난다.

또 다른 내용은 외국계 기업에서 근무하는 한 한국 직장인의 사례로, 외국인 사장이 새로 부임했는데 업무 첫날부터 매일 아침 7시 전에 출근하더라는 것이었다. 홍보 업무를 담당하는 이 한국인 부하직원은 당연히 심적 부담 때문에 다음날부터 사장보다 더 일찍 출근했다. 며칠째 그렇게 했더니 어느 날 사장이 살짝 불러 “아침 일찍 나올 필요가 없으니, 내일부터 천천히 출근하라”고 일러줬다는 이야기다. 비록 단적인 사례지만 한국인의 노동 스타일을 보여준다.

한때 한국의 장시간 노동은 한국인의 ‘근면함’과 ‘성실성’으로 칭송받았고, ‘한강의 기적’을 이룬 원동력으로 치켜세워졌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양이 질을 좌우하던 ‘양적 성장’ 단계의 유효기간은 끝났다. 이제 한국 경제는 ‘질적 성장’을 통한 생산성 배가에 더 진력할 때다. 최근 한국은행이 발표한 우리나라 ‘고용의 질’ 지수가 OECD 평균에 훨씬 못 미친다는 보고서 내용은 이런 ‘질적 성장’ 흐름과는 배치되는 대목이어서 마음을 무겁게 한다. 그나마 고용의 질 지수가 개선되고 있다는 점에 위안을 받지만.

중요한 점은 한국은행의 조사 결과에서 나왔듯 고용의 질이 나아지면 노동생산성과 경제성장률도 동반상승한다는 점이다. 이 같은 전제를 기준으로 볼 때, 현재 진행되고 있는 노사정위의 노동개혁 움직임은 여전히 ‘양적 논리’에 빠져 있다는 인상을 준다. 정년 60세 연장의 대안인 임금피크제 도입, 정리해고 조건 완화의 노동시장 유연화 등의 핵심은 찬성하는 사측 입장에선 ‘경비의 양적 절감’으로, 반대하는 노동계 입장에선 ‘일자리의 양적 불안정성’으로 대변된다. 물론 노동개혁을 주도하는 정부는 ‘일자리의 양적 확보’일 것이다.

따라서 현재의 노동개혁 논의가 임금피크제나 노동시장 유연화 같은 ‘양적 제도’의 절충점 찾기에 치중되기보다는 노동시간의 단축이라는 ‘질적 개선’으로 접근해 풀어보는 방향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러기 위해서는 노사정 3자의 고통분담이 우선돼야 한다. 즉 노동계는 장시간의 노동량을 줄여 ‘고용의 양’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청년세대에 일자리를 제공해줘야 한다. 반면에 재계와 정부는 노동자의 일 포기량에 따른 소득 감소분을 보전하는 안전망을 마련해줘야 한다.

정부는 경제성장의 전제조건인 ‘노사안정’을, 기업은 지속성장을 위한 ‘경영안정’을, 노동자는 생계유지를 위한 ‘고용안정’을 원한다. 이 동상이몽(同床異夢)을 푸는 해몽의 열쇠로 ‘노동시간’ 소프트웨어의 업그레이드에 좀 더 관심을 갖고 생산적 논의가 이뤄지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