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호불호가 갈리긴 하지만 블랙베리 휴대폰은 입지가 확실하다. 뚜렷한 개성으로 글로벌 시장에서 고정 팬을 다수 확보하고 있다. 블랙베리는 오는 6일 새 제품을 발표한다. 어쩌면 마지막 블랙베리 휴대폰이 될 수 있다는 말이 떠돌고 있다.

지난 2월 블랙베리는 파격 선언을 했다. 처음으로 안드로이드 운영체제(OS)를 탑재한 제품을 선보이겠다고 말했다. 기존 블랙베리 OS만으로는 더 이상 폰을 많이 팔 수 없다고 여긴 까닭이다. 자존심을 버리고 실리를 취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 출처=블랙베리

블랙베리 프리브(Priv)가 주인공이다. 지난달 23일 미국과 캐나다에서 예약판매를 시작했다. 예상대로 안드로이드 OS를 탑재했으며 슬라이드 물리 키보드를 채택하면서 블랙베리의 색깔도 놓치지 않으려 했다. 프리미엄급 스펙을 자랑하는 만큼 가격도 그에 걸맞은 수준이다.

블랙베리 휴대폰 사업의 마지막 승부가 될 수도 있겠다. 최근 존 첸 블랙베리 CEO는 한 콘퍼런스에 참석해 “1년에 500만 대 이상 스마트폰을 팔아야 수익이 난다”고 언급했다. 현지 언론들은 첸 CEO가 수익을 내지 못할 경우 휴대폰 사업을 포기하겠다고 우회적으로 알린 것이라고 평했다.

현실적으로 500만 대 판매고는 어려울 것이라는 시선이 지배적이다. 지난 분기 블랙베리는 80만 대의 휴대폰 판매고를 올렸다. 단순히 4를 곱하면 320만 대라는 수치가 나온다. 목표치와는 제법 큰 차이가 난다. 만만치 않은 도전이 될 것이라는 주장에 무게가 실린다.

철저하게 무너졌다

갑작스러운 몰락은 아니었다. 휴대폰 시장에서 블랙베리는 서서히, 그러면서도 꾸준히 내려앉았다. 블랙베리 스마트폰은 분명 매력적이다. 우선 물리 키보드가 최고의 매력 포인트로 꼽힌다. 요즘 대부분의 제품이 탑재한 가상 키보드와 비교하면 ‘누르는 맛’이 제대로다. 인체공학적으로 정교하게 설계된 덕에 오타 없이 빠른 입력도 가능하다.

블랙베리 제품은 특히 미국과 유럽의 비즈니스맨에게 인기가 많았다. 그들은 BBM(Blackberry Messenger)이라는 메신저를 통해 무수한 비즈니스를 이뤄냈다. 강력 지지층에 힘입어 지난 2008년에는 미국 스마트폰 시장 점유율 1위를 차지할 정도였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애용해 ‘오바마폰’이라는 별칭도 얻었다.

그러나 안드로이드 진영과 애플 아이폰이 자리를 잡으면서 블랙베리는 바닥 모르고 추락했다. 한때 미국 시장점유율이 과반에 가까웠으나 지금은 1%에 미치지 못한다. 1000만 대가 넘었던 분기 판매량은 80만대 수준으로 급감했다. 지난 3분기 중국 후발업체인 화웨이는 2780만 대의 스마트폰을 출하했다. 이와 비교하면 블랙베리의 부진은 더욱 도드라진다.

최근 실적도 나빴다. 지난 1분기(3~5월) 6억5800만 달러(약 7780억8500만 원)의 매출을 올렸다. 지난해 같은 기간과 비교하면 32% 감소한 수치이며, 시장 기대치에도 이르지 못한 것이다. 이 같은 결과는 스마트폰 사업 부진 때문이라는 것이 업계의 중론이다. 나쁜 성적표를 받아든 블랙베리는 수익성 회복과 신사업 집중을 이유로 인력 감축을 단행하겠다고 전했다.

롤리팝 먹은 블랙베리, 과연 통할까

블랙베리 프리브는 반등 카드가 될 수 있을까. 일단 제품이 기대 이상이어야 한다. ‘블랙베리 제품이 이렇다’라는 관념의 틀을 뛰어넘어야 한다. 이전 제품과 비슷하다면 곤란하다. 달라도 많이 달라야 스러져가는 블랙베리를 일으켜 세울 수 있다.

프리브라는 이름은 'privilege'와 'privacy'에서 비롯됐다. 첸 CEO는 “프라이버시(privacy)는 당신의 특권(privilege)”이라는 의미가 이 제품명에 담겼다고 설명했다. 다른 블랙베리 제품과 마찬가지로 프리브 역시 보안에 특화됐다는 설명이다. 이 제품에는 블랙베리의 보안 애플리케이션(앱) 디텍(DTEK)이 탑재된다. 프라이버시 침해가 우려되면 즉각 알려주는 서비스를 제공한다.

프리미엄 스펙을 자랑한다는 것도 특징이다. 안드로이드 진영에서 경쟁을 벌이기 위해 제대로 준비를 한 모습이다. 다만 ‘최고’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뛰어난 스펙은 아니다. 타사 프리미엄 제품과 수준을 비슷하게 맞춘 정도다. 블랙베리가 고스펙 제품을 선보이던 회사가 아니라는 점을 고려하면 발전을 이룬 셈이다.

▲ 출처=블랙베리

모바일 기기의 두뇌인 AP는 퀄컴의 스냅드래곤808을 사용했다. 발열 논란으로 홍역을 앓은 스냅드래곤810의 차선책으로, LG V10에도 탑재됐지만 최상의 퍼포먼스를 자랑하지는 않는다. 프리브는 3GB 램을 탑재했는데, 최근에는 이를 탑재한 중저가 기종도 나오는 추세다. 내장 메모리는 32GB로 그다지 넉넉한 편은 아니다.

1800만 화소 후면 카메라를 탑재하면서 소비자를 만족시킬 것으로 보이지만, 전면 카메라가 200만 화소라는 것은 아쉽다. 최근 프리미엄 제품에는 500만 화소 이상의 전면 카메라가 실린다. 셀프카메라 기능을 중요하게 여기는 소비자가 증가하면서 제조사들이 수요에 대응한 것이다.

디스플레이는 차별성이 존재한다. 5.4인치인데, 양쪽 측면이 삼성전자 갤럭시S6 엣지처럼 휘어져 있다. 다만 삼성전자 제품처럼 엣지 스크린에 별도에 기능이 내장되어 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역시도 삼성전자가 빨랐기 때문에 혁신을 주도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디스플레이 자체도 삼성의 제품이다.

슬라이드 물리 키보드는 분명한 차별화 포인트다. 다른 안드로이드 제품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블랙베리 고유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틈새를 노린 것이다. 다만 이 역시 일부 마니아는 열광하지만 호불호가 갈릴 것으로 보인다. 특히 슬라이드 방식은 블랙베리 이용자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갈린다.

보안과 IoT도 있다고 하지만

만약 블랙베리 프리브마저 시장에서 반응을 얻지 못한다면? 블랙베리 휴대폰은 더 이상 신제품이 나오지 않고, 판매량이 0으로 수렴되면서, 역사 속으로 영영 사라지고 말 것이다. 일각에서는 첸 CEO가 이미 휴대폰 사업 철수 이후를 염두에 두고 있다고 말한다.

그래도 살아날 구멍은 있다. 블랙베리가 휴대폰 사업만 하는 것은 아닌 까닭이다. 스마트폰 완제품 판매가 소비자 대상 비즈니스(B2C)라면 블랙베리는 기업 대상 비즈니스(B2B)에도 강점을 보이는 업체다. 최근 실적만 봐도 소프트웨어(SW)와 기술 라이선싱 매출은 지난해보다 2배 가까이 성장했다.

▲ 출처=블랙베리

특히 강점을 보이는 분야는 보안이다. 블랙베리 스마트폰은 ‘가장 안전한 폰’이라고 불릴 만큼 보안에 특화되어 있는데 이는 블랙베리의 보안 기술력에 따른 것이다. 블랙베리는 기업용 보안 솔루션 사업에서 뚜렷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 한때 삼성전자 인수설이 나돈 이유도 보안 솔루션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블랙베리는 지속적으로 보안 경쟁력을 키우고 있다. 지난 9월 블랙베리는 모바일보안업체 굿테크놀로지를 인수했다. 올해만 해도 지난해 4월에는 보안 스타트업 워치독을, 지난 7월에는 위기경보 소프트웨어(SW) 개발업체 앳호크를 인수했다. 휴대폰 부문에서 힘을 빼고 있는 것과는 다른 모습이다.

사물인터넷(IoT)도 블랙베리가 야심을 보이는 시장이다. 지난 1월 블랙베리는 세계 가전박람회 CES 2015를 통해 ‘블랙베리 IoT 플랫폼(BlackBerry IoT Platform)’을 공개했다. 기업들이 쉽게 IoT SW를 개발할 수 있도록 돕는 클라우드 기반 개발 플랫폼이다. 다만 이 같은 B2B 사업이 스마트폰 사업 부진을 상쇄하기에는 아직 역부족이라는 시선이 지배적이다. 결국에 블랙베리 프리브 흥행 여부에 관심이 쏠리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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