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삼국시대 위(魏)나라의 정치가이자 군략가이며 서진(西晋) 건국의 기초를 세운 사마의가 238년 황제 조예의 명을 받들어 요동의 공손연을 토벌할 때였다. 사마의는 요수에 진을 치고 기다리던 공손연의 허를 찔러 본거지인 양평을 바로 공략했고, 공손연의 장수인 비연을 죽이는 등 성공적인 초반기세를 올렸다. 하지만 사마의와 공손연이 대치하고 있던 요수 일대에 큰 비가 내리며 상황이 꼬이기 시작했다. 갑작스럽게 차오른 비가 순식간에 진영과 병사들을 쓸어버렸기 때문이다.

위나라 입장에서는 악몽의 재현이었다. 바로 지난해 유주자사 관구검이 요동정벌 직전에 폭우를 맞아 열흘만에 철수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대목은 사마의의 대응이다. 그는 무려 우직하게 한 달이나 폭우를 버티며 진지를 튼실하게 지켰다. 이후 사마의는 큰 피해없이 장마를 넘겼고 이내 파상공세를 퍼부었다. 그 결과 238년 모든 것을 버리고 도망치던 공손연은 꿈틀도 못해보고 목이 날아간다.

관구검의 군대와 사마의의 군대는 질적인 면에서 큰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동일한 상황과 난관속에서 관구검은 실패했고 사마의는 성공했다. 이유가 뭘까? 사마의는 평소 자신을 다스리며 조직을 장악하고, 비전을 제시하며 우직하게 앞으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그는 전쟁터에서 청룡언월도를 꼬나쥐고 미친듯이 날뛰는 맹장은 아니었으나, 승리하는 방법을 아는 전략가였다. 그가 존재함으로써 위나라 군은 최강의 군대로 군림할 수 있었다.

CJ헬로비전 쇼크
SK텔레콤이 30일 CJ헬로비전을 인수한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경영권을 인수받으면 내년 4월 자회사인 SK브로드밴드에 편입한다는 계획이다. 국내 통신업계 1위 사업자가 케이블 1위 사업자를 품어가는 셈이다. 처음있는 일이다. 이는 다양한 시사점을 가진다.

일단 양사의 기본적인 이해관계가 들어맞은 지점이다. SK텔레콤은 유선과 무선을 아우르는 강력한 경쟁력을 품어갈 여지가 생겼다. 이 지점에서 SK의 거시적인 흐름을 살펴야 한다.

공교롭게도 같은날인 30일 최태원 SK회장은 2박3일간 제주도에서 열렸던 2015년 최고경영자(CEO) 세미나를 통해 파괴적 혁신과 강한 기업문화를 설파했다. 여기서 중요한 대목은 4축 사업재편이다. IT 서비스 및 정보통신기술(ICT) 융합과 액화천연가스(LNG) Value Chain(가치사슬)을 비롯해 바이오 및 제약, 반도체 소재와 모듈 등 5대 성장분야를 집중적으로 육성한다는 전제로 이들을 4개 사업군으로 묶을 것을 천명했다. 즉 에너지 및 화학, 반도체, IT, 바이오 등 사실상 4개 사업군으로 동력을 재편한다는 뜻이다.

▲ 최태원 회장. 출처=SK

이렇게 되면 SK(주)와 SK C&C 합병으로 전열을 가다듬은 SK의 거시적인 흐름의 방향을 짐작할 수 있다. 삼성이 지난해 방산을 한화에, 올해는 정밀화학을 롯데에 넘기는 이유와 비슷한 선택과 집중이다. 이는 국내 대기업이 제조업 일변도의 문어발식 경영에서 벗어나 고차원적인 사업전략을 세우고 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분위귀가 SK그룹 내 최대 계열사인 SK텔레콤, SK이노베이션·SK에너지, SK하이닉스를 주축으로 삼아 SK케미칼에 대한 본격적인 투자를 단행할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최 회장은 출소 직후인 지난 8월 말 중국 장쑤성에 있는 SK하이닉스 우시공장을 방문하고 현지 정부 관계자들과 면담을 가진 후 SK종합화학과 중국 최대 국영 석유기업인 시노펙과 합작해 설립한 우한 에틸렌 공장을 연이어 방문한 적도 있다.

여기에서 IT 경쟁력만 놓고 보면 전선은 더욱 명확해진다. 현재 SK는 그룹의 IT 플랫폼 창구를 통신사인 SK텔레콤으로 집중시키는 분위기다. 지난 3월 SK브로드밴드를 100% 자회사로 편입시키고 IT 경쟁력 전반을 하나로 모았던 것이 단적인 사례다. 특히 SK브로브댄드는 최근 SK플래닛 호핀 사업부분을 분할합병하며 이러한 전망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물론 SK는 시장의 경쟁력 제고를 위한 방침에 불과하다는 설명이지만 업계에서는 SK가 '조직 재정비에 따른 힘의 조절'이라는 연장선상에서 사실상 SK텔레콤을 ICT 단일 플랫폼으로 설정했다고 본다. 당시 씨앤앰을 인수할 것이라는 말이 나돌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SK텔레콤은 IT 경쟁력을 SK텔레콤에 집중하며 SK브로드밴드에 미디어 역량을 분배하고 있다. SK브로드밴드가 애니메이션 전문 제작사인 삼지애니메이션의 윤상철 전 부사장을 영입하고 최근 윤석암 전 TV조선 편성본부장까지 받아들인 배경이다. 결론적으로 SK는 SK텔레콤에 IT 경쟁력을 집중시키며 미디어 인프라를 SK브로드밴드에 쏟아붓고 있다.

SK텔레콤의 CJ헬로비전 인수는 이러한 SK의 거시적인 행보의 일부다. 먼저 유선 경쟁력을 품어 유무선 합동 시너지를 노릴 여지가 생긴다. IPTV가 케이블 사업자를 인수한 것도 규모의 경제적 측면에서 긍정적이며, 결합상품 포트폴리오 라인업도 더욱 단단해질 전망이다. 알뜰폰 사업에서 강력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다. SK텔레콤이 SK브로드밴드를 자회사로 편입시킬 당시 시장에 매물로 나온 씨앤앰이 인수될 가능성이 제기된 것을 고려하면, CJ헬로비전을 품은 SK텔레콤의 행보는 다소 파격적이지만 일리가 있는 전략이다.

여기에 통신사들의 고민도 연결된다. 현재 통신사들은 네트워크 사업자의 강점만으로는 새로운 시대를 이겨낼 수 없다는 위기감이 팽배해있다. 여기에 데이터 중심의 통신환경까지 겹치며 미래가 불투명해지고 있다. 특히 사물인터넷 시대의 경우 모든 것이 연결되는 인프라를 기본적으로 추구한다. 다수의 소프트웨어 사업자들이 망을 통해 서비스를 실시하는 방식으로 미래성장동력을 제고하는 상황에서, 5G로 대표되는 네트워크 속도 업그레이드는 일종의 한계를 가진다.

▲ 사물인터넷 시대.

그런 이유로 최근 통신사들은 사물인터넷 조직을 속속 발족하며 본연의 임무와는 약간 결이 다른 색다른 실험을 거듭하고 있다. 여기에서 SK텔레콤은 나름의 존재감을 보여주는 중이다. 폐막한 IFA 2015에서 자신이 보유한 제조 동맹군을 바탕으로 다양한 강자들과 연합하는 것에 목숨을 걸었으며 이미 스마트홈에 상당한 관심이 있던 상태에서 삼성전자, LG전자를 비롯해 코맥스와 굳건한 라인을 구축했다.

SK텔레콤은 자사의 사물인터넷 플랫폼을 기존 강자의 플랫폼과 연계시키는 한편, 부족한 제조 인프라를 풍부한 동맹군으로 충당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SK텔레콤은 국내주거 환경에 최적화된 연동기기를 연내 20개 이상 출시하며 2016년 상반기까지 30개 이상 선보인다는 계획을 세웠다.

지난 9월 17일 서울 종로구 그랑서울 나인트리컨벤션 광화문 그랜드볼룸에서 열린 ‘스마트 클라우드쇼 2015’에서 나온 박명순 SK텔레콤 미래기술원장의 발언도 의미심장하다. 그는 "1세대부터 4세대 LTE까지 잘 터지고 저렴한 망을 구축하는 것이 통신사의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며 “하지만 더 이상 네트워크 만으로는 가치를 찾기 힘들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여기에서 SK텔레콤은 지난 9월 9일 사물인터넷과 스마트 단말기를 총괄하는 디바이스 지원단을 장동현 사장 직속으로 출범시며 SK텔레콤 신사업개발팀과 함께 다양한 앱세서리를 개발하고 있는 아이리버를 기본으로 삼았다. 지난해 8월 지분 39.3%를 인수한 아이리버의 박일환 대표가 이 조직의 단장을 맡는 것도 흥미롭다.

결국 SK텔레콤은 기존의 공식을 파괴하는 넷플릭스와 같은 라이벌의 등장으로 통신과 미디어의 한계를 직감했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SK는 통신의 한계를 넘기 위해 사물인터넷 조직을 꾸리고 IT 인프라를 SK텔레콤에 모으고 있었다. 또 미디어의 한계를 부수기 위해 SK브로드밴드에 집중하고 있었다. 이 지점에서 SK텔레콤이 CJ헬로비전을 인수해 이를 SK브로드밴드에 편입시키는 시나리오는 결국 각각의 사업이 가지는 한계를 하이브리드로 극복하겠다는 의지다.

당장 상당한 통신은 물론, 미디어 업계의 일대파란이 예상된다. 주인이 없어 떠돌던, 한 때 SK 영입대상으로 꼽히던 씨앤앰이 급변하는 시장의 분위기에 편승해 갑작스러운 주인을 찾을 수 있다. 업계의 인수합병이 폭발적으로 늘어날 수 있다. 2008년 KT와 KTF 합병은 물론 2010년 LG텔레콤, LG데이콤, LG파워콤 합병과 비교할 수 없는 파급력이 예상된다. 여담이지만 CJ는 CJ헬로비전을 매각한 금액으로 코웨이 인수 비용 충당에 활용할 것으로 보인다. 콘텐츠 사업에 집중하겠다는 의지로 읽힌다.

▲ 출처=SK텔레콤

콘트롤 타워의 등장
SK는 제계 3위의 대기업이지만 최 회장이 수감된 기간에는 그 존재감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다는 것이 중론이다. 제왕적인 총수 체제를 타파하겠다면 내세운 '따로 또 같이 3.0'이 기대이하의 성과를 보여주는가 하면 수펙스추구협의회도 성장보다는 당장의 안정을 택하는 방식으로 소극적인 행보만 보여줬기 때문이다. 물론 워크숍을 통해 최 회장은 이들의 행보를 높이 평가했으나, 가시적인 지표는 여전히 의문부호를 달게 만들고 있다.

실제로 최 회장이라는 콘트롤 타워가 없었던 기간 SK가 글로벌 시장에 진출할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를 모두 놓쳤다는 주장도 나온다. 대표적인 사례가 중국에 제2의 SK를 건설하겠다던 차이나 인사이더 전략의 퇴보다. 최 회장이 SK의 전면에 나서던 지난 2013년, SK종합화학이 중국 최대 국영 석유기관인 시노펙과 우한 에틸렌 합작법인을 설립하는 프로젝트에 성공한 바 있다. 이는 중국에 상당한 인맥을 가진 최 회장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는 후문이다.

하지만 최 회장이 수감된 이후 차이나 인사이더 전략 자체가 흔들렸고, 그 후속조치는 거의 전무한 수준으로 전락해버렸다. 지난해 7월 시진핑 중국 주석이 방한했을 당시 불씨를 살릴 마지막 기회를 잡았으나 당시 최 회장은 수감된 상태였다.

인수합병도 난항이었다. SK는 최 회장이 부재한 상태에서 SK E&S가 STX에너지를, SK텔레콤이 국내 보안업체 2위 사업자인 ADT캡스 인수합병을 추진했으나 모두 고배를 마셨다. SK이노베이션의 호주 유류공급업체 UP 인수건도 실패했고 SK네트웍스의 KT렌탈 인수까지 무위에 그쳤다.

총체적인 방향성 상실도 엿보인다. 최 회장 부재시절 SK의 투자금액은 2011년 9조원, 2012년 14조원, 2013년 12조원, 2014년 15조원 등 분명한 기준이 보이지 않았다. 그룹 총 매출액은 2011년 155조원, 2012년 158조원, 2013년 157조원, 2014년 165조원 등으로 사실상 '엔진이 멈춘 상태'였다.

이 지점에서 최태원 회장이 현장행보를 바탕으로 변화를 끌고있다. SK하이닉스의 반도체 경쟁력을 천명하는가 하면 중국의 폭스콘과 루나로 연결되는 스마트폰 잭팟도 터트렸다. 물론 이러한 극적인 분위기는 최태원 회장만의 '공'은 아니다. 또 총수 한 명이 조직의 생사를 결정하는 것은 어떤 의미로는 대단히 위험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콘트롤 타워의 존재감이다. 관구검의 위나라 군은 요동정벌 당시 폭우의 벽을 넘지 못했다. 하지만 사마의의 위나라 군은 폭우의 벽을 넘어 요동을 정벌했다. 그 이후의 역사는 모두가 알고있는 그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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