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코노믹리뷰 송원제 기자)


영등포에 살고 있는 김현주(32·가명)씨. 그는 최근 집주인으로 부터 전세금 3000만원을 올려달라는 통보를 받았다. 재계약기간이 다가와 준비는 하고 있었지만 3000만원은 감당하기 어려운 액수.

물가 인상으로 인해 빠듯하게 생활하고 있던 터라 더욱 그랬다. 고민 끝에 전세자금대출을 받았던 은행에 추가 대출을 문의했지만 불가하다는 답변을 들었다. 기존 대출금을 모두 갚아야 증액이 된다고 했다.

‘처음 대출받았던 3000만원을 갚고 대출을 다시 시작해보자.’ 김씨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웬걸. 은행 측에선 불가하다고 했다. 은행 직원은 대출금 전액을 상환하고 새롭게 전세자금대출을 받는다고 해도 3000만원을 넘길 수 없다는 것이다.

김씨가 살고 있는 집의 전셋값은 7000만원. 3000만원의 전세대출자금을 받았다. 집주인이 3000만원을 올려달라고 했으니 전·후 계약서상 증액된 부분인 3000만원이 대출 한도가 된다. 전세자금대출 규정을 살펴보면 전·후 계약서상에서 증액된 부분만큼만 대출이 가능하다는 조건이 명시돼 있다. 이 점이 김씨의 발목을 잡은 것이다.

새롭게 전세자금대출을 받을 수 있는 3000만원은 김씨가 처음 받았던 것과 같은 금액이다. 새로 대출을 받아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상담창구를 돌아설 때 은행 직원이 그를 불러 세웠다.

은행원 : 김현주씨, 잠깐만요.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김씨 : 아, 그래요? 대출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이 있어요?
은행원 : 네, 비슷한 금액대로 이사를 하시는 건 어떠세요? 주소지만 다르면 가능할 것 같습니다.
김씨 : 네? 그게 무슨 말이죠?

사연은 이랬다. 현재 거주하고 있는 곳에선 대출이 불가하지만 주소지를 옮기면 대출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현재 김씨가 살고 있는 전셋값은 7000만원. 김씨의 자본 4000만원과 은행대출금 3000만원으로 구성돼 있다. 집주인이 올려달라는 3000만원을 더할 경우 총 전셋값은 1억원이다.

주택 전세자금대출의 한도는 전셋값의 80%다. 김씨의 연봉은 3200만원. 신용등급은 신용평가기관 기준 평균 3등급 정도. 한국신용평가정보에선 1등급, 또 다른 평가기관에선 5등급이 나왔다. 3등급의 경우 대출금액은 최대 연봉의 2.5배가량이 가능하다.

일반적으로 전세자금대출은 신용등급에 따른 최대금액과 전셋값의 80% 중 적은 금액을 기준으로 지급된다. 김씨의 경우 4000만원을 갖고 있으니 1억원의 전셋집을 얻는다고 할 때 6000만원의 전세자금대출은 충분히 가능하다.

김씨는 “모든 대출자격 조건을 충족하고 있는데 하나는 되고 하나는 안 된다는 게 말이 되지 않는다”고 항의했다. 그러나 은행원의 말에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규제 완화 신규 대출에 초점

“윗분(정치인)들에게 말씀해보세요. 비슷한 말을 하시는 분이 정말 많습니다. 저희도 답답합니다. 법이 이러니 어쩔 수 없는 것 아니겠어요. 전세자금대출 조건을 완화했는데 정작 필요한 부분은 손을 대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저희가 어떻게 하겠어요. 죄송합니다.”

김씨는 한국을 대표하는 서민층이다. 부양가족이 있는 무주택자로 전세대란을 온몸으로 견뎌내야 한다. 그런데 이게 쉽지가 않다. 반듯한 직장도 있지만 혼자서 해결하기엔 역부족이다. 치솟는 전셋값을 감당하기가 어렵다.

전셋집 물량이 적어 부르는 게 값인 상황이기 때문이다. 대다수 서민층의 고민도 김씨와 비슷하다. 국민은행에 따르면 전국 평균 아파트 전세금은 2년 전 1억2298만원에서 1억5613만원으로 23.3%상승한 것으로 나타났다.

정부는 이런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지난해 8월 전세자금대출 자격 규제를 대폭 완화했다. 주택신용보증기금을 통한 저소득 세입자의 전세자금대출보증 한도가 70%에서 80%로 확대됐고, 소득 증빙 없이 받을 수 있는 소액대출 한도도 5000만원에서 1억원으로 높였다. 금리도 4.5%에서 4%로 낮췄다.

부양가족이 있는 만 20세 이상의 무주택 세대주로 연간 소득이 3000만원 이하, 전셋집의 전용면적이 85㎡ 이하인 주택(아파트·빌라·일반주택 등)의 기준은 과거와 동일하게 했다. 과거에 비해 동일한 조건에서 저금리로 많은 금액의 대출이 가능해졌다는 얘기다.

정부는 전세대란을 해결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전셋값의 가격은 규제가 완화된 지난해에 비해 나아지지 않고 있다. 오히려 전셋값은 더욱 오를 분위기다. 부동산전문가들은 하반기 전셋값은 더욱 오를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부동산114 관계자는 “주택 가격 자체가 떨어지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하반기 전셋값의 상승은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부동산1번지 관계자는 “최근 월세 선호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어 전세 물량이 부족해 가격 인상 분위기가 형성되는 추세”라고 분석했다.

정부의 전세자금대출 규제 완화는 이 같은 시장 분위기를 고려한 결정이다. 실제 새롭게 전세자금대출을 받는 사람의 경우 규제 완화 효과를 톡톡히 누리고 있다. 국민은행에 따르면 전세자금 보증 대출은 71.9%로 상승했다.

문제는 규제 완화가 신규 대출자에 맞춰져 있다는 점이다. 기존 전세자금대출자의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전세에 살고 있는 사람은 대부분 서민층이다. 이사를 하는 것 자체가 부담이다.

한번 이사를 할 때 소요되는 비용은 100만∼200만원 남짓. 여기에 자녀가 있다면 학교 문제도 부담스럽다.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높은 이자를 지불하며 제2금융권을 찾는 사람이 늘고 있는 이유다.

집주인 값올리기 부작용만 불러

이뿐만이 아니다. 신규 대출의 범위가 넓어져 집주인의 전셋값 올리기도 부추긴다는 지적이다. 대출 한도가 늘어났으니 전세값을 올려도 무방하다는 심리가 퍼지고 있다는 것이다. 부동산 관계자는 “2년 전 6000만원 정도였던 전셋집이 최근 1억원이 넘게 거래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기존 세입자보다 새롭게 전세를 들일 경우 수입이 늘어나니 당연한 일 아니냐고 귀띔 했다.

한국금융연구원에 따르면 가계신용 잔액이 올해 800조원을 돌파했다. 가계대출 증가율은 전년 동기 대비 8.0%로 2008년 4분기 이후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대출의 대부분이 전세자금대출 같은 생활밀착형 대출이었다. 한국금융연구원 관계자는 “가계부채 비율 증가가 한국 은행산업에 향후 위험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을 것으로 지적받고 있다”고 말했다. 전세자금대출 규제가 완화 됐지만 정작 서민을 위한 부분이 개선되지 않는 한 가계부채는 지속적으로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익명을 요구한 금융권 한 관계자는 “전세자금대출 증액 부분과 관련해 민원이 끊이질 않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기존 전세자금대출을 받은 사람의 경우 살고 있던 곳에서 살기 힘든 구조로 돼 있어 새로 이사를 부추기는 게 아닌지 우려스럽다”고 했다.

‘전세대란’으로 고통 받는 서민층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작 필요한 것은 규제 완화를 비롯해 잘못된 전액 상환 조건을 완화해야 할 필요가 있다. 전액 상환 조건은 세금으로 조성된 국민주택기금의 혜택을 받는 서민층을 확대하고 무분별한 전세자금대출에 따른 가계부채 부실화를 예방하기 위해 지난 2004년 도입됐다. 취지를 살리기 위해선 정부 차원의 검토가 필요해 보인다.

이와 관련 주택금융공사 등 전세자금대출을 취급하는 기관들은 “90%만 보증을 하기 때문에 리스크 관리 측면에서 전액 상환이 전제돼야 하고 장기적으로는 가계부채의 부실화가 심화될 수 있다”는 명분을 세우고 있다. 대출금 자체가 늘어나면 가계 부담이 증가할 뿐더러 향후 회수 여부도 불투명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세자금대출의 경우 저금리 대출 상품으로 기존 금융권 대출에 비해 가계 부담이 적은 편에 속한다. 또 임차인이 아닌 집주인의 통장으로 입금되는 만큼 증액 여부 자체가 기금의 자금 회수 부분과 연관이 없다. 전세대란을 잡기 위한 전세자금대출 규제 완화와 함께 기존 세입자를 위한 부분의 정책적 지원이 이뤄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개인 신용도 따라 대출 금액 천차만별

시중은행으로부터 전세자금대출을 받기 위해선 따져봐야 할 게 많다. ‘신용에 문제가 없으면 잘 되겠지’라고 생각했다면 오산. 만 20세 이상의 부양가족이 있는 무주택 세대주, 연봉 3200만원 미만, 중형 이상의 자동차 미보유 등 대출 자격 요건이 까다롭다. 대출 자격 요건을 충족했다고 해도 변수는 존재한다.

개인 신용도 등에 따라 대출금액이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이다. 조건 계약부터 하기보다는 금융기관이 필요한 만큼 대출이 가능하다고 하면 미리 봐둔 전셋집을 계약하고, 해당 금융기관에 대출 신청을 해야 한다.

전세자금대출을 받기 위해선 전셋집을 고르는 요령이 있다. 우선 전셋집의 전용면적이 85㎡ 이하인지를 살펴야 한다. 만약 전용면적이 더 넓다면 대출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대출 한도는 전셋값의 80%로 제한된다. 모든 조건이 갖춰졌다면 우리은행·신한은행·농협 등 5개 시중은행을 통해 신청, 4%의 금리로 대출을 받을 수 있다.

저축은행 등 제2금융권에도 전세대출상품이 있다. 시중은행보다 많은 85∼90%까지 대출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신용도에 따라 금리가 연 6~13% 정도로 비싸다는 게 흠이다. 신용도 문제 등으로 시중은행 등을 이용할 수 없을 경우 고려할 만하다.

김세형 기자 fax123@asia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