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 전 한 남자가 길을 나섰다. 쉰여섯의 나이에 그는 꿈을 향해 간다고 했다. 그리고 도착한 곳은 강원도 땅. 세상에 하나뿐인 카페를 만들겠다던 김종헌(64)씨. 책과 붓, 빵이 어우러진 자신만의 스타일로 독특한 북 카페를 냈다.

강원도가 빚어낸 아름다움 속에서 책을 벗삼아 인생의 새 희망을 쓰고 있는 이 남자를 만나고 싶어졌다. 기자가 춘천을 찾은 날은 구름이 많은 오후였다. 남춘천역에서 차를 타고 10여분 거리. 석좌동 한적한 교외에 자리 잡은 북 카페 ‘피스 오브 마인드(Peace of mind)’. 이름처럼 이곳이 그가 인생 2막의 평화로움을 찾은 곳이다.

(사진=이코노믹리뷰 안영준 기자)


고서·서예·빵이 있는 별천지 공간

무덤덤한 건물과 파라솔 하나 꽂혀 있던 테라스가 전부인 바깥 풍경과 달리 카페 안에 들어서자마나 딴 세상이 펼쳐진다. 여느 북 카페를 생각했다면 큰 오산이다.

150여 평 남짓한 공간. 벽을 온통 둘러싼 서예 작품과 빼곡한 책들, 타자기, 주판, 오래된 카메라와 계산기, 녹음기, 전축, 엘비스 프레슬리·나나 무스쿠리 같은 올드 팝 LP판에 짚신까지….

종적을 감췄던 희귀한 물건들이 수두룩한데다 처음 보는 것들 별천지다. 몇 백 년은 족히 돼 보이는 고서들이 특히 눈길을 사로잡는다. 여하튼 범상치 않다. 잔잔하게 흐르는 클래식 선율이 어색한 듯 하면서도 분위기와 잘 어우러진다.

김 사장을 만나러 갔을 때는 점심식사 준비가 한창이었다. 카트를 밀고 다니며 직접 손님을 맞고 서빙 하느라 무척이나 분주했다.

“시장하시죠? 우리 집에서 가장 유명한 메뉴로 한 번 드셔보세요.” 바쁜 와중에 기자에게 점심부터 챙겨준다. 친근한 말투다. 푸근한 미소다. 대기업 최고경영자(CEO)를 지냈다는데 딱딱하고 권위적인 이미지는 볼 수 없었다.

이곳의 메뉴는 빵, 파스타, 스테이크, 수프, 샐러드, 샌드위치 등 대략 20가지를 기본으로 조합하기에 따라 수십 가지다. 인기 종목은 빵과 파스타. 모듬빵은 유기농 허브 식빵에 살구잼, 조린 바나나를 넣은 초콜릿, 허브를 섞은 버터, 올리브 발사믹 등 6가지 각기 다른 소스가 함께 제공된다. 색색의 갓 구은 식빵을 다채로운 맛으로 즐길 수 있다.

이어서 나오는 ‘그리씨니’라는 60cm짜리 긴 빵. 구수한 향에 겉은 바삭하면서도 속은 부드럽다.

해물, 토마토 등 재료 본연의 향이 깊게 밴 신선한 파스타도 손님들에게 인기 만점이다. 식사와 곁들이면 풍미를 돋워주고 식후에 마시면 깔끔하게 입 안을 정리해주는 허브차도 반할 만한 아이템.

음식 맛도 좋지만 이색적인 곳으로도 정평이 나 있다. 아까 구경하느라 눈이 휘둥그레졌던 고서와 서예 작품을 보러 오는 손님들이 많다. “철학·역사·종교 관련 책이 1만5000권, 한적 고서 1200권 등 다양한 종류의 책들이 셀 수 없이 많답니다.

서예 작품도 2000점가량 돼요. 600년 묵은 활자본도 있죠. 그래서 역사적으로나 교육적으로 가치 있는 작품들을 보러 가족 단위 관광객은 물론 서예가, 화가, 문학가 등 명사들이 찾고 있습니다.” 그의 눈빛에서 뿌듯함과 자랑스러움이 묻어난다.

어떻게 이런 카페를 꾸밀 생각을 했는지 물었다. “한 마디로 미친 거죠. 하하! 14살부터 자연스럽게 모으기 시작했는데 벌써 50년이나 됐네요. 고이고이 쌓아온 것들의 가치를 그대로 펼쳐내 보인 것뿐입니다.

북 갤러리인 동시에 우리나라 유일의 서예 전문 화랑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거예요. 요즘엔 우리 카페를 얘기할 때 ‘클래식 북 카페 앤드 파인 패밀리 레스토랑’이란 말을 직접 지어 사용하고 있죠.”

김 사장은 중학생 시절부터 붓을 잡은 서예인이기도 하다. 원곡 김기승, 소지도인 강창원, 송천 정하건 등 손꼽히는 대가들로부터 서예를 배운 실력파로 서예 전문 책도 냈다. 책과 글씨에 조예가 깊은 만큼 카페 구석구석 그런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이 카페는 또 다른 학습 공간으로도 변신한다. “주말에는 100분짜리 무료 영어강좌를 열어요. 회사에서 해외 무역업무를 담당하며 익혔던 영어를 잊지 않으려고요. 요리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어요. 외국인들이 한국 음식을 배우러 오기도 하죠. 장사만 하면 삶이 너무 허무하지 않나요?”

무엇보다 손님들의 마음을 끄는 건 집과 같이 편안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한쪽에는 서재 및 응접실도 따로 마련돼 있었다. “예전 서울에서 가족이 살던 집 내부를 그대로 옮겨 온 거예요. 마치 자기 집에서 편안하게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며 책을 보는 분위기죠.”

그랬다. 서점이기도 했고 갤러리이기도 했다. 골동품점이기도 했고 문화센터, 집이기도 했다. 이런 여러 색깔의 매력이 사람을 끄는 피스오브마인드의 진짜 매력인 듯 싶었다. 그의 인생2막 여정은 어쩌면 예견된 것인지도 모른다. 책, 서예, 빵… 인연은 이렇게 시작됐으니까.

(사진=이코노믹리뷰 안영준 기자)


책과 붓, 빵이 어우러진 독특한 북 카페 ‘피스 오브 마인드’. 몇 백년은 족히 돼 보이는 고서부터 타자기, 오래된 카메라, 전축에 올드 팝 LP판까지 희귀한 물건들이 넘쳐난다(사진=이코노믹리뷰 안영준 기자)


책과 서예 함께하려 과감한 사표

김 사장의 하루 일과는 오전 7시 30분부터 시작된다. 매장을 청소하고 주방에서 빵 반죽을 한다. 오전 9시에는 장을 보고 11시부터 손님을 맞이해 밤 10시에 문을 닫는다.

시간 날 때마다 짬짬이 책을 읽고 원고를 쓴다. “하루 종일 ‘풀 가동’을 하려니 직장 다닐 때보다 더 바쁜 것 같아요. 주말에도 여기 지키느라 등산도 못 하고 있죠.” 말은 그렇게 해도 싫지 않은 내색이다.

김 사장이 서빙 및 고객 응대를 하면 그의 아내 이형숙(59)씨는 빵을 주로 만든다. 요리는 3명의 직원들이 돕고 있다. 그가 이렇게 ‘행복한 정착’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내의 역할이 컸다.

사표를 내겠다는 남편의 결정에 그리 당황스럽지도 않았다. 워낙 마흔 살 무렵부터 ‘북 카페’ 이야기를 해왔기 때문에 당연한 일처럼 받아들여졌고 흔쾌히 따랐다. 김 사장의 전직은 잘 나가던 대기업 CEO.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한 후 1973년 여성 속옷회사 남영비비안에 입사, 30년을 몸 담아 오며 최고 자리에까지 올랐다.

1980년대 독일 뒤셀도르프 지사장으로 일하다가 김 사장은 북 카페를, 형숙씨는 빵을 접했다. 그리고 곧 서로 이 새로운 즐거움과 희망에 빠져들었다. 자신이 평생 ‘앓이’를 해 온 책과 여생을 보낼 수 있는 방법으론 이만한 게 없었다. 목표는 일찌감치 정해졌다. 책과 서예가 함께 존재하는 공간을 만드는 것.

“예순 다섯까지 직장생활을 할 수도 있었겠죠. 하지만 한 회사에서 오래 있다 보니 회의적인 부분이 많이 생기더군요. 건강도 많이 나빠졌어요. 제 목표를 실현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망설임 없이 사표를 냈습니다.”

김 사장은 “다행스럽게도 자녀들이 모두 대학 졸업 후 바로 결혼해서 과감해질 수 있었다”며 “운이 좋았다”고도 얘기한다. 꿈을 이루기 위해 그는 2000년 퇴사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카페 창업을 준비하는 일은 시간이 많이 들었다.

친구의 특허 사무소와 완구 회사의 홍콩 본사 생활을 2년 가까이 더 하면서 좀 더 완벽한 카페 구상에 매달렸다. 카페 홈페이지를 운영하기 위해 학원에서 홈페이지 만드는 법도 배웠다.

그리고 3년 후, 마침내 전원생활을 결정하고 서울 토박이였던 김 사장은 강원도 홍천으로 내려와 북&베이커리 카페를 열었다. 서울에 있던 두 채의 집 가운데 하나를 팔았다. 자금을 끌어 모아 1억5000여만원을 들였다.

처음부터 거창하게 시작하고 싶지 않았다. 아내와의 꿈을 소박하게 펼치겠단 마음뿐이었다. 인테리어에 별다른 비용도 들지 않았다. 세월 따라 모아온 수집품들 덕분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산골 쪽으로 외떨어져 있으니 교통이 불편하고 식자재를 조달하는 데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다시 3년 뒤 도심과 비교적 가까운 춘천, 지금의 석좌동으로 옮겨왔다.

새 인생길에 오른지 8년째. 이제는 월 매출 3000만원을 올리며 안정적인 궤도에 올랐다. 김 사장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데는 돈으로 따질 수 없는 가치가 녹아있다”고 했다. 평생 삶의 자취가 묻어 있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유일한 곳이기 때문이란다.

김사장은 자신이 평생앓이를 해온 책과 남은 여생을 함께하기 위해
11년 전 남영비비안 CEO자리를 박차고 나와 지금의 카페를 차렸다.

옛 선비처럼 물 흐르듯 살고 싶다

경영의 달인이니 북 카페를 운영하는 데도 그 경험과 노하우가 자연스레 반영이 되지 않았을까. 김 사장이 손사래를 치며 말한다. “조직 관리와 시스템 운영으로 돌아가는 대기업 CEO와는 차원이 다르죠.

카페는 주인이 온전히 몸으로 때워야 하는 일이예요. 청소, 빵 반죽. 재료 구매와 손질 등 온갖 잡일을 혼자 다 해야 하니까요.”

때론 힘들다면서도 마냥 행복해 보이는 그에게 “대기업 사장 시절이 그리울 때는 없느냐”고 질문을 날렸다.

“돈을 벌려고 했다면 이 일을 하지 말았어야죠. 좋아하는 책을 읽고 일하러 나갈 곳이 있다는 게 가장 행복한 겁니다. 회사에서는 정말 후회 없이 열심히 일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하던 일에서 완전히 벗어나고 싶었어요.”

김 사장의 다음 꿈은 뭘까. 옛 선비들처럼 초야에 묻혀 앞으로도 지금처럼 진정 원하는 삶을 즐겁게 사는 것이다. 거창한 포부를 그리지도 않는다. 그냥 물 흐르는 대로 순리에 따라 가고 싶다고 했다.

김 사장은 요즘 ‘은퇴 이후의 삶’을 주제로 강연도 다니고 있다. 황혼기를 앞둔 사람들에게 그가 남기는 조언이 있다면. “얼마를 버느냐가 아니라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너무 재테크의 관점에서만 생각하지 말고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관, 라이프스타일, 종교 등을 고려해 제2의 인생을 계획했으면 좋겠어요.”
책, 서예, 빵… 그것은 그에게 무한한 행복이었다.

전희진 기자 hsmile@asia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