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서울 서초 예술의전당 내 미술관에서 열린 스페인 출신 건축 거장 안토니오 가우디 전시회를 아내와 관람한 뒤 돌아오던 길에 근처의 백화점에 들렀다. 내부 에스컬레이터로 이동하면서 백화점 내부를 살펴보니 층마다 손님들로 북적거렸다. 특히 여성 의류 매장은 겨울옷을 장만하려는 여성고객들로 메워져, 사람이 다니는 통로가 비좁을 정도였다. ‘일요일이라 그러려니’하고 넘기려다 ‘맞다, 지금 블랙프라이데이 기간!’이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Black Friday! 미국에서 해마다 11월 4주째 목요일 추수감사절(Thanks Giving Day)의 다음날인 금요일부터 연말까지 펼쳐지는 최대 쇼핑시즌을 말한다. 미국의 백화점, 마트 등 유통업체들이 연말을 앞두고 재고 부담을 덜기 위해 제품 가격을 폭탄 할인하여 판매하는, 일종의 ‘대규모 떨이 고객이벤트’이다. 블랙프라이데이의 한 달여 동안 행사로 소매 및 유통업체들은 일 년 매출의 절반 이상을 벌어들이고, 미국 소비자들도 평소 사고 싶었지만 가격 부담으로 미뤘던 인기제품을 저렴하게 살 수 있어 판매자-공급자-수요자 모두에게 ‘꿩 먹고 알 먹는’ 효과를 가져다주는 셈이다.

미국 블랙프라이데이는 국내에도 온라인쇼핑족을 중심으로 알려지기 시작했고, 국내보다 싼 가격 때문에 ‘해외직구(직접구매)’ 바람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심각한 내수 부진의 늪에 빠진 한국 제조 및 유통 업체의 입장에서, 블랙프라이데이는 부러움의 대상인 동시에 국내 소비자의 해외직구 유출에 걱정해야 하는 경계의 대상이기도 했다. 특히 지난해 세월호 침몰사건와 올해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의 대형 악재에 따른 전 국민적 소비심리 냉각과 외국관광 수요 급감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던 한국 경제의 입장에선 블랙프라이데이 같은 ‘반전의 벤치마킹 모델’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가뜩이나 수출 감소로 경제성장 목표에 차질을 우려하는 정부는 내수라도 끌어올려야 하는 절박한 심정이며, 높은 집값·전세가·사교육비로 가계 재정을 위협받고 있는 일반 국민도 최소의 구매력으로 최대의 소비효과를 누릴 수 있는 기회에 목말라 했던 터였다.

정부와 기업, 국민에 이르는 경제주체 3자의 공통된 이해관계가 ‘코리아 블랙프라이데이’를 탄생시켰던 것이다. 지난 10월 1일부터 15일까지 보름 동안 진행되는 코리아 블랙프라이데이에는 백화점, 대형마트, 편의점, 온라인쇼핑몰 등 92개 기업의 약 3만4000여개 점포, 그리고 200개 전통시장(10월 11일 기준 정부 공식집계)들이 참여했다. 정부 중간발표에 따르면 참여 업태의 평균 매출증가 현황은 편의점 32.3%, 온라인쇼핑 26.7%, 백화점 24.7%, 전자제품 유통전문점 18.7%, 전통시장 10%대, 대형마트 4.3% 순으로 블랙프라이데이 효과를 누렸다. 무난한 첫 성적표를 받았다.

그러나 비판의 목소리도 적지 않다. 우선, 벤치마킹 모델인 미국 블랙프라이데이와 비교하며 한국 블랙프라이데이 매출실적이 직접 생산자인 제조업체에 돌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은 깊이 새겨들어야 할 대목이다. 대·중소기업 상생 지원기관에 근무한 바 있는 한 지인은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미국의 블랙프라이데이는 대형 유통사들이 제조사에서 직접 구매한 물품들을 팔다가, 연말시즌이 다가오면 재고 부담을 줄이기 위해 벌이는 이벤트”라며 제조사들은 할인판매나 재고에 따른 피해를 입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반면 국내 대형 유통사들은 제품을 직접 구매하지 않고, 제조사에 매장을 임대하여 판촉과 마케팅을 맡기고 높은 판매수수료를 챙기는 구조인 데다, 블랙프라이데이 같은 대형 이벤트에 수반되는 가격 할인에 재고 처리, 수수료 지불까지 ‘3중 부담’을 제조사가 고스란히 떠안을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었다.

코리아 블랙프라이데이에 정부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한 것이 아니냐는 불만의 소리가 높았다. 블랙프라이데이를 준비하면서 참여업체 ‘머릿수’를 채우기 위해 경제단체들을 앞세워 마치 할당제처럼 참여를 유도하는 관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있었다는 얘기였다. 창업 2~3년의 외식 가맹본사가 블랙프라이데이에 참여했길래 연유를 물어보니 “우리는 내수효과를 많이 받지 않아 해외 진출에 주력해야 하는데, 단체가 하도 사정해서”라고 회사 관계자가 사정을 밝혔다.

코리아 블랙프라이데이가 내수 활성화에 마중물 역할을 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정부나 기업의 입장과 다를 게 없다. 다만 블랙프라이데이가 특정 집단의 이익추구 방편으로 변질되어선 안 되며, 유통이든 제조든 기업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이뤄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더욱이 수출과 내수에서 협공당하고 있는 제조업체들이, 블랙프라이데이 효과를 유통사들과 골고루 누릴 수 있어야 ‘레드(적자)프라이데이’가 아닌 진정한 ‘블랙(흑자)프라이데이’로 정착할 수 있다. 블랙프라이데이에도 상생(Win-Win)의 룰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