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도는 아주 작은 섬이다. 면적이 십만 평쯤 되는데, 이십만 평쯤 되는 경기도 가평의 남이섬과 비교하면, 얼마나 작은지 감이 확실히 올 것이다. 걸어서 섬을 한 바퀴 도는 데 40분이면 충분하다. 2000년도에 천연보호구역으로 지정되면서 섬 안의 모든 차량이 방출되어 걷는 것 외엔 섬을 누릴 수단이 달리 없다. 마을 공동 소유의 트럭 한 대가 유일한 석유 차량이고, 짐을 나르는 용도로 소형 전기차가 한 집당 한 대씩 허용된 정도다. 가구 수는 대략 40가구이다. 그런 곳에 짜장면집이 열 곳이나 들어서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진풍경이다. 과장 좀 보태 눈에 밟히고, 발길에 차이는 것이 돌덩이가 아니고 짜장면집인 것이다.

국토 최남단이라는 상징성 때문에 여행사를 통한 수학여행이나 단체여행의 필수코스가 되고, 일 년에도 여러 번 이런 저런 매체에 노출되면서 개인 관광객도 급속도로 늘어났다. 극성수기에는 하루에 2000명가량이 한꺼번에 발을 디디기도 하니, 그런 때는 그야말로 섬이 온통 사람들로 바글바글하다. 마라도는 대한민국에서 경기를 타지 않는 몇 안 되는 곳 중 하나이다. 제주 본섬으로 나가 자영업을 하던 사람도 가게를 접고 마라도로 다시 들어가곤 한다. 마라도에 주소지를 두고 있는 주민은 칠팔십여 명이지만, 실제 마라도에 살지 않는 사람이 더 많다. 가까운 모슬포나 먼 제주시에 살면서 출퇴근을 한다.

그 속에서 짜장면집을 한다는 것은 ‘안전빵’이다. 장기 경제 불황 이후 시중의 짜장면 가격은 가격 경쟁의 볼모 품목이 되어, 2500원까지 떨어진 곳도 있다. 그럼에도 남지 않는 장사란 없는 법이고로, 그런 짜장면은 도대체 어떤 재료로 어떻게 만드는지 우리로선 상상이 안 가지만, 마라도에서는 20년 이상을 5천원이라는 가격을 유지해왔다. 전자와 후자의 식자재나 조리법은 별 차이가 없다. 그러니 참으로 이문이 톡톡한 벌이인 것이고, 마라도 전 주민을 먹여 살리는 효자 상품인 것이고, 누구나 그 ‘짜장전선’에 뛰어들고 싶어 하는 것이다.

나와 내 남편이 마라도에서 세 번째 짜장면집을 연 2008년, 우리는 ‘세상 모든 짜장아, 다 덤벼!’라는 자신감으로 충만해 있었다. 남편은 요리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 정식으로 요리를 배운 적이 없고, 민박집도 우연히 하게 되면서 손님들 밥 차려주느라 요리의 세계에 입문하였다. 짜장은 눈으로 3시간 본 것이 전부이고, 그 이후 마라도를 나와 평택에 가서 가게를 차리고 양장피, 유산슬, 동파육 같은 요리 메뉴를 했을 때도 요리책과 인터넷을 통해 독학을 했다. 요리를 하겠다고 두반장도 사고 굴소스도 샀지만, 그 속에 또 얼마나 많은 첨가물이 들어가 있는지 확인하고는 한두 번 시식용으로 쓰고는 죄다 버려 버렸다. 기본적인 레시피와 맛을 터득한 뒤에는 첨가물이 전혀 없는 자연주의 요리를 만들어냈는데, 거의 실패한 적이 없이 척척이었다.

제아무리 날고 기는 요리 대가라 해도 첨가물로 버무려진 가공양념에 의존해 요리를 하는 것에 비하면, 남편의 자연주의 요리는 실로 경이롭다. 자연주의는 맛이 없어도 된다는 생각을 가장 경계하는 남편은 최상의 맛의 조합을 이끌어내기 위해 혼신의 힘을 쏟는다. 노력한 만큼 결과는 늘 만족스러웠고, 그 바탕에 타고난 감각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3시간짜리 ‘눈팅’의 결과물인 남편의 첫 짜장도 아주 훌륭했다. 맛이 얼마나 기가 막혔는지, 그 외딴 섬에서도 단골이 생겼다. 제주시에 사는 어느 가족도 단골이 되어 몇 번씩 그 먼 길을 마다 않고 찾아와주었고, 서울에 사는 어느 모자도 단골이 되어 더 멀고 먼 길을 날아와 주었다. 그리고 서울을 중심으로 입소문이 나서 일삼아 찾아오는 사람이 늘어갔다. 몇 달 사이에 ‘마라도에 가면 짜장면집이 유명하긴 한데, 맛은 없다’는 소문이 ‘마라도 짜장면, 맛있다’는 소문으로 바뀌어갔다. 물론 그로부터 8년이 흐른 지금은 수준이 많이 높아졌지만, 당시에는 다른 집들은 어찌 저렇게 미원을 들이붓고도 많이 없게 만드나 이해가 안 갈 정도였다.

그런데 소문은 엉뚱한 결과를 낳았다. 마라도에선 간판이 무용지물이었다. ‘마라원짜장’이라는 간판을 내걸었음에도 모든 짜장면집이 ‘마라도 짜장면집’으로 통했다. 마라원짜장에서 맛있는 짜장면을 먹고 간 사람들은 이것을 그냥 ‘마라도 짜장면’이라고 표현을 할 뿐이고, 이 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마라도에 가면 다 맛있는 짜장을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심지어는 간판이 뒤바뀌는 경우도 있었다. 우리 가게 야외 테이블에 앉아서 짜장면 먹으면서 누군가와 전화 통화를 하는 아주머니가 있었는데, “짜장면 아주 맛있어.…… 어… 여기가……” 하면서 두리번두리번 거리더니 바로 앞집 간판을 읊어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 가게 단골 민박 손님이 하는 말이 우리더러 남 좋은 일만 시킨다고 하더니, 그게 딱 맞는 말이었다.

어차피 단골에 기댈 수 없는 상황이라 손님을 끌어들일 수 있는 방책이 필요했다. 남편은 건물 옆 구석에 만들어놓은 외부 주방을 길가로 옮겼다. 건물 앞쪽으로 야외 탁자들이 놓여 있었고, 그 탁자들과 길의 경계지점 한쪽에 화덕을 옮기고, 짬뽕을 볶기 시작했다. 그때 당시에는 우리 가게만이 짬뽕을 팔았다. 짜장 소스는 한꺼번에 많이 만들어놓고 팔 수 있지만, 짬뽕은 그때그때 만들어야 한다는 게 남편의 변함없는 지론이었다. 아침 첫 배가 들어오고 사람들이 걸어들어올 무렵, 주문이 없어도 남편은 짬뽕을 볶으며, 웍을 힘차게 흔들며 ‘불쇼’를 보여주고 냄새를 풍겼다. 그러면서 남대문 옷장수처럼 목청껏 외쳤다.

남편은 평소에는 말수도 적고, 말주변도 없는 편이었다. 그런 남편이 나를 깜짝 놀라게 만드는 경우가 두 가지 있었는데, 낚시와 관련해서 유창한 언변을 아낌없이 쏟아낼 때가 그랬고, 그 난전 같은 곳에 서서 불특정 다수를 향해 호객행위를 할 때가 그랬다. 그 소리와 광경에 이끌려 들어오는 손님이 있는가 하면, 호객행위에 절대 넘어가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뿜어내는 자세로 휙휙 지나가는 사람도 많았다. 나는 그 옆에 같이 서 있는 것조차 어색하고 민망해 멀찍이 떨어져 있다 그저 들어오는 손님이나 맞았다. 그리고 그런 남편의 뒷모습을 보면서 울컥울컥 눈물을 훔치곤 했다. 때때로 그런 슬픈 감정은 짜증이 되기도 했고, 화가 되기도 했다. ‘이게 뭐하는 짓이지?’라는 생각에 아무 의욕도 없이 하루를 맞고 하루를 보내기도 했다. 짜장에 빼앗겨 버린 신혼이 억울해 미칠 지경이었지만, 판을 벌여놓은 이상 결판을 내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짜장면집을 시작한 지 한 달이 지날 무렵, 아이가 생겼다.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내 나이도 만만찮았고, 남편의 나이를 생각하면 아이를 빨리 가져야 했지만, 나는 마라도에선 절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 절해고도에서 임신 기간을 보내고 아이를 낳고 기른다는 건 끔찍한 일로 다가왔다. 이것은 기우가 아니었다. 아이가 태어난 그날, 내가 끔찍이도 염려했던 일이 실제 일어났으니까 말이다. 아무튼 나는 얼른 시간이 지나 평택으로 돌아가서 편안하고 안락하고 느긋하게 엄마가 될 준비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피임을 열심히 했건만, 어디서 탈이 났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아이는 거부할 수 없는 운명으로 우리에게 왔다. 처음 얼마간은 그 생경한 상황을 받아들이는 일이 쉽지 않았다. 섬 생활이 그랬던 것처럼 아이도 그저 막막했다.

그래도 내겐 결혼 전부터 언젠가 아이가 생기면 산부인과가 아니라 조산원에서 낳으리라는 생각이 있었다. 평택에서 이웃사촌으로 지내던 선배네가 세상에는 조산원이라는 곳도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었었다. 그 언니는 왜 조산원을 택했느냐고 묻자 “임신은 병이 아니잖아”라고 했다. 참으로 신선한 충격이었고, 더 이상 다른 말이 필요 없었다. 하지만 조산원은 전국적으로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그에 관한 정보도 전혀 없던 터였는데, 인터넷을 검색하다 제주도에도 조산원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귀한 조산사가 제주도에 있다는 것은 나와 내 아이에겐 정말 행운이었고, 하늘에 감사한 일이었다. 그것도 조산사계 랭킹 2위나 되시는 분이 바로 제주도에 있는 것이었다. 한국조산사협회 부회장인 김순선 원장이었다.

조산원은 아이만 낳는 곳이 아니라 임신 기간 내내 돌봄을 받을 수 있는 곳이다. 매달 초음파 검사도 하고, 매주 산모교실도 연다. 조산원에서 아이를 낳으려면 아빠와 함께 이 산모교실에 꼭 참석하는 것이 필수인데, 우리는 마라도에 살고 있었으므로 예외였다. 온라인 강좌도 있어서 그것으로 대신하기로 했다. 조산사는 뱃속의 아이도 보고, 산모도 본다. 당연한 소리처럼 들리지만, 의사는 그렇지 않다. 의사는 입체 초음파를 동원해 태아의 발육상태와 위치, 크기 등을 기계적으로 점검해 줄 뿐이지만, 조산사는 거기에다 산모의 상태까지도 살뜰히 챙겨준다. 친정과 멀리 떨어져 있던 나는 조산사의 말 한 마디에도 눈물이 그렁해지곤 했었다. 조산사는 태아보다 엄마가 더 중요하며, 엄마가 건강하면 아이는 저절로 건강해지니 늘 산모의 상태에 더 관심을 두었다. 그리고 아이를 가진 내 몸이 얼마나 대단하고 소중한지 매번 일깨워주었다.

또한 조산사는 초음파 달인이다. 첫째 때도, 둘째 때도 김순선 원장의 흑백 초음파를 통해 아이를 만났는데, 그 사이에 수십 년 써오던 낡은 초음파 기계를 새 것으로 교체를 했는데도 내 눈에는 똑같아 보이는 흑백 초음파일 뿐이었다. 그것을 고집하는 이유는 3D, 4D와 같은 입체 칼라 초음파가 태아에게 나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기도 하고, 우리 눈에는 하얀 건 양수요, 까만 건 태아로 보일 뿐인 흑백 초음파만으로도 모든 정보를 읽어낼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태아의 상태는 물론이고 양수가 깨끗한지 탁한지, 양수의 양이 적은지 많은지도 안다. 이런 경지에 오르려면 당연히 오랜 경험이 바탕이 되어야 하는데, 김순선 원장은 8년 전 그때까지 받은 아이가 5000명이 넘었으니, 지금은 6000명쯤 되지 않을까 싶다. 그 수많은 경험을 통해 쌓은 것은 기술이 아니라 지혜다. 학교나 학원에서 절대 가르쳐줄 수 없는 것이다. 그렇게 내 막막하고 고단한 마라도 생활을 어느 정도 행복하게 바꿔 놓았던 것은 아이와 조산사였다.

그리고 <자연주의 출산>이라는 책 한 권이 내 엄마 되기 공부의 전부였다. 그 책은 랭킹 1위이자 한국조산사협회 회장이 펴낸 것이었다. 임신은 자연이고, 출산도 자연이다. 이것을 병원에 의존하기 시작하면 임신과 출산은 의료 처치의 대상으로 둔갑하고, 산모와 아이는 의사의 시술을 기다리는 환자로 전락한다. 옛날에는 마을마다 산파가 있었다. 그저 아이 많이 받아본 여느 할매다. 아랫목 뜨끈하게 달군 어두운 방 안에서 이불 깔고 뜨거운 물에 끓인 가위만 준비하면 그것으로 끝이다. 산모와 아이와 산파가 하나로 연결되어 호흡을 주고받으며 기다리면 되는 것이다. 그저 자연스럽게 말이다. 아이가 건강하게 태어나길 바란다면 엄마가 건강한 생활을 잘 지키면 그만이다.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인데도 너무 많은 산모들이 의사와 의료기술에 의존한다. 산모 스스로를 믿으면 아이는 탈 없이 태어난다. 그저 자연스럽게 말이다.

우리는 그렇게 자연주의를 알게 되었다. 우리의 짜장면이 자연주의가 된 것은 바로 첫 아이 때문이었다. 그전까지는 식생활이 그저 그랬다. 라면도 곧잘 먹었고, 외식을 할 때도 가리는 게 없었다. 다만 남편이 민박 손님들에게 밥을 차려 줄 때는 맛소금이든 미원이든 조미료를 사용하지는 않았다. 막연히 MSG가 몸에 이롭지는 않다는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짜장면에도 미원을 소량이나마 넣었었고, 그게 당연지사인 줄 알았다. 그러다 아이가 생기자 미원을 빼보기로 했다. 그 짜장면을 임산부인 나도 먹어야 하기 때문에 순전히 우리를 위해서 내린 결정이었다. 어라? 맛있었다. 워낙 소량만 넣었던 탓인지 넣지 않아도 맛은 별 차이가 없었다. 조리 시에 미원을 넣지 않아도 시판되는 검은색 춘장에 이미 MSG가 포함되어 있었기에 그랬을 것이다. 거기에 박스째 부어 끓여내는 멸치육수에 자연산 MSG가 충분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와 내 아이를 위해 그렇게 시작한 ‘No MSG 짜장면’이 지금의 자연주의 짜장면의 시초이다. 먹거리 공부를 조금씩 하면서 우리는 우리 삶을 둘러싼 진짜 비극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남을 먹이는 일이 얼마나 조심스러운 것인지 깨닫게 되었다. 그것도 돈을 받고 먹이는 일이다. 돈까지 받고 먹이는 일인데, 그것이 건강을 해치는 것이라면 도리가 아니지 않는가,라는 화두가 우리를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물론 그것을 완성하기까지는 5, 6년의 세월이 더 흘러야 했고, 마라도에서의 고군분투 생존기는 이제 겨우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