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Report

2008년 12월, CEO로 산다는 것

“더 이상은 갈 데가 없다. 죽음으로써 빚을 갚겠다.”
지난달 19일 한 자산운용사 대표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 생을 마감했다. 하반기 들어 불어 닥친 미국발 금융위기 여파로 투자자들에게 손실만 끼치자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이다. 두 자녀를 미국에 보낸 ‘기러기 아빠’였기에 안타까움은 더했다.
2008년 12월의 대한민국 CEO. 기업의 ‘방향 키’를 잡고 있는 이들에게 올 겨울은 유독 춥다. 소비심리가 위축된 데다 일 년 내내 불황에 시달리는가 싶더니 급기야 하반기 들어서는 미국발 금융한파마저 불어 닥쳐 ‘남는 장사’를 한 기업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CEO하기 어려운 한해’를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12월을 만난 대한민국의 CEO. 과연 그들이 느끼는 체감온도는 얼마나 낮을까.

시계의 추가 한 해의 마지막을 알리는 12월로 향했다. CEO들에 있어 12월은 다른 달에 비해 남다르다.
우선 한해의 성과를 결산하는 시기다. 올 한해 얼마나 회사를 잘 운영하고 얼마나 많은 이익을 남겼는지, 그리고 CEO로서 직원들에게 신뢰와 믿음은 주었는지 등 ‘실적’과 ‘평가’에 대한 점수가 매겨지는 달이다.
여기에 ‘점술가(?)’도 아닌데 불확실한 내년의 사업도 전망해야 한다. 어떤 분야를 중점적으로 추진할 것인지, 예산은 어느 부문에 얼마나 편성해야하고 조직구성은 또 어떻게 가져가야할 것인지 등 ‘내년도 사업 밑그림’을 그려야 하는 것도 CEO들의 몫이다.

‘성적표’ 앞에선
작아지는 그들

내년도는 제쳐두고라도 당장 올 연말을 맞는 CEO들의 체감온도는 싸늘하다. 이들이 가장 걱정하는 부분은 뭐니 뭐니 해도 자신이 경영하고 있는 회사의 실적.
대부분의 기업들이 12월을 한해의 회계 기준월로 삼기 때문에 결산이 완료되지 않더라도 기업의 경영지표를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는 수치들은 이 기간에 나온다. ‘CEO 성적표’가 작성되는 셈이다. 게다가 상장기업의 경우 주식시장 전체의 하락추세를 감안하더라도 연초대비 현재의 회사 주가만 비교하면 개략적인 ‘실적평가’가 가능하다.
딜로이트코리아의 김경준 부사장은 “올 하반기, 특히 10월부터 불거진 미국발 금융위기로 인해 그나마 선전했던 기업들도 이 시기를 전후해 매출 하향곡선을 그린 경우가 많다”면서 “크고 작은 차이는 있지만 전반적으로 기업 CEO들이 힘든 연말을 보내고 있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다른 해와 비교할 때 올 들어 업종 전체에 걸쳐 불황의 여파가 수익구조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는 분석이다.
이처럼 10년전 IMF 체제에 돌입했던 상황과 비교할 때 올해 역시 ‘제2의 IMF’로 걱정해야 하는 시기인 점을 감안하면 12월에 고(高)실적을 기대하는 CEO들은 그다지 많지 않다는 게 상당수의 경영전문가들이 공통적인 목소리를 내는 부분이다.
경기도 안산에서 제조업을 운영한다는 한 CEO는 연말을 맞는 심정에 대해 “솔직히 두렵다”고 표현한다.
저조한 성과와 관련해 자신이 언제 CEO 자리에서 물러나야 할 지도 모르겠다는 푸념이다.
그는 “1933년 3월 대공황의 강력한 후폭풍 속에서 미국 대통령에 취임한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말한 ‘우리가 진정 두려워해야 할 대상은 두려움 그 자체(The only thing we have to fear is fear itself)’라는 말이 요즘 들어 자주 되새겨진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CEO 교체설에
‘나 떨고 있니’

남느냐, 물러서느냐’
12월의 CEO들이 실적평가를 두려워 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나도 교체될 수 있다’는 불안감에서 기인한다. 자신이 기업의 오너가 아니고서는 이사회 결정이든 임원회의를 거치든 여차하면 물러날 준비를 해야 하는 게 대한민국 CEO들의 현 주소다.
여기에 최근 들어 임기를 채우지 못한 채 중간에 ‘사임’하는 문책성 교체가 증가하고 있고 연말에 이런 교체건수도 많아 ‘12월의 CEO’로서는 적지않은 고민에 쌓여있는 게 어찌보면 당연한 수순이다.
실제로 지난 8월 이후 현재까지 상장사의 CEO 교체건수가 급격히 늘고 있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에 따르면 지난 11월 대표이사를 교체한 상장사는 총 19개사로 전달인 10월 45개사에 비해 큰 폭으로 늘었다. 이 수치는 앞선 8월(33건)에 비해서도 36.36% 증가한 수준.
이 수치를 종합해 보면 지난 7월(59건) 이후 감소세를 보이던 대표이사 교체 건수가 8월 이후부터 매달 10% 이상 늘어나고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특히 올 들어 2회 이상이나 CEO를 교체하는 비정상적인 회사도 많아 연말 성적표에 따라 교체의 ‘수모’를 겪는 CEO가 나올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 없다. 지난 11월 CEO를 교체한 19개사 중 12개사가 올 들어 두 번 이상 최고경영진을 교체한 케이스다.
이 같은 분위기를 반영이라도 하듯 올 연말 들어 ‘CEO 교체설’에 시달리는 업종도 부쩍 많아졌다. 최악의 악재를 경험하고 있는 금융업을 비롯해 건설, IT, 제약, 패션 등 다양하고 광범위하다. 어느 업종하나 ‘뒤숭숭’ 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다.
한국경영정보연구원의 김현철 대표는 “올 연말 부각되고 있는 업계별 CEO 교체설의 내용을 살펴보면 과거 연말연시의 임원인사 때처럼 추상적이고 다소 부풀려진 것이 아니라 상당히 구체성을 띠고 있는 게 문제”라고 분석했다.
그는 또 CEO 교체와 관련해 “CEO들의 역량과 관계없이 시장 상황에 따른 경영부실에 대한 변명이 통하지 않는다는 점이 그들의 고충거리”라고 전제하면서 “대표이사라는 직함이 예상치 못한 돌발 상황까지 포함해 모든 문제에 대처하면서 경영이익을 극대화해야 하는 무한책임을 져야 하는 자리인가는 한번 쯤 생각해봐야 할 숙제”라고 말했다.

구조조정·
연말 보너스도
고민거리

실적에 대한 평가와 별도로 구조조정 차원에서 직원들을 ‘정리’하거나 신규 인력을 확보하는 일, 우수 직원에 대한 성과급 지급, 송년회 준비 등도 12월의 CEO들에겐 고민거리다.
여기에 불투명한 상황에서 내년을 어떻게 꾸려가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경영전략 수립’ 도 신경이 많이 쓰이는 일 중 하나다.
특히 최근 들어 기업의 핵심인재를 확보하는 일 역시 CEO들에겐 ‘실적’으로까지 평가되는 분위기가 퍼져있다. 주로 CEO의 역량을 중시하는 대기업을 중심으로 형성돼 있는데 예를 들어 삼성그룹 계열사 CEO들의 경우, 연말이면 외부의 핵심 인재들을 얼마나 데려오고 잘 관리했는지를 구체적인 점수로 평가받는다.
외부 인재의 발탁과 유지 및 관리로 평가받는 인사고과 비중이 30%나 될 정도다. 이 때문에 이들 CEO는 12월만 되면 ‘인재실적’을 채우기 위해 별도의 출장일정까지 따로 마련해 직접 인재확보에 나선다고 한다.
만약 우수한 인재를 스카우트하지 못했거나 이들이 조직 적응에 실패하고 1년도 안 돼 회사를 나가게 되면 해당 CEO는 인사고과에서 불이익을 감수해야 하는 게 삼성그룹 CEO들의 생존 방식이다.
회사의 실적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 연말 보너스를 지급해야 하는 것도 CEO로서는 쉽지 않은 선택이다. 의류업계 한 CEO는 “매년 조금씩이라도 꼭 지급해줬던 연말 보너스를 올해 경기가 어렵다는 이유로 주지않는 것도 이상하다. 그리고 실적우수자에 대해 사기 진작 차원에서라도 인센티브를 제공해야 하는데 자금사정이 어려워 큰 일”이라고 토로했다.
김진욱 기자 (action@ermedia.net)

박스
월가의 냉엄한 CEO 평가

서브프라임 대처 능력에 따라 ‘극과 극’

세계적으로 CEO의 실적평가에 대한 냉정한 결과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곳이 바로 미국 월가다. 월스트리트에서는 철저하게 실적에 따라 CEO들을 우대한다. 무엇보다 연말 보너스 액수를 보면 CEO들에 대한 평가가 여실히 드러난다.
골드만삭스의 로이드 블랭크페인 CEO는 올 연말보너스로 6790만달러(약 638억원)를 받았다. 현금 2680만 달러와 스톡옵션 등 다른 보수가 4110만 달러다. 올해 기본급 60만 달러까지 합하면 모두 6850만 달러(약 644억원)으로 월스트리트 CEO 중 역대 최대 연간수입 기록이다.
그가 이같은 ‘두둑한’ 연말보너스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다른 투자은행들이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 여파로 대규모 손실을 기록한 것과 달리 골드만삭스는 4분기에 32억2000만 달러의 순이익을 기록한 점이 인정됐다. 블랭크페인이 위기를 미리 간파하고 대비했기에 그같은 실적을 이뤄냈다고 본 것.
이에 반해 존 맥 모건스탠리 CEO와 제임스 케인 베어스턴스 CEO는 지난해 4000만 달러의 보너스를 받았으나 올해에는 대규모 손실에 대한 책임을 지고 준다는 보너스를 모두 반납했다. 모건스탠리 사상 첫 분기 손실을 기록했다는 불명예를 안은 맥은 기본급 80만 달러, 케인은 기본급 25만 달러에 만족해야 했다. 메릴린치의 스탠리 오닐 역시 지난해 월가 금융권 CEO 중 가장 많은 수입을 올렸으나 서브프라임 부실 때문에 쫓겨났다. 변호사 출신으로 금융감각이 부족했다는 평가를 받은 씨티그룹 찰스 프린스도 CEO 자리를 내놓고 스스로 물러났다.

2008년 12월, CEO 말말말

“미국발 금융위기 여파로 지난달 부로 4년을 운영해오던 회사를 정리했습니다. 20여명의 직원들은 다른 회사로 옮기거나 지금 제 밑에서 같이 일하고 있지요. 나름대로 잘 운영했었는데 하반기 들어 자금압박이 심해졌고 투자에 대한 ‘고·스톱’을 결정하는 일이 너무 힘들었습니다. 내년 자통법 시행을 앞두고 지금 이대로라면 계속 투자하는 건 승산이 없다고 결론을 내려 회사를 문닫았습니다.”
- 투자자문회사 A사장.

“구조조정 명단을 작성해 결행할 날짜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방 출장차 지금 대전에 내려와 있는데 정리해고될 직원들을 생각하자니 미안한 생각도 들고 마음이 편칠 않네요. 어떻게 보면 월급쟁이 사장인 저 역시 언젠가는 구조조정 대상에 포함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 안산 반월공단 소재 종소업체 B사장.

“건설경기와 맞물려 있는 부분이 있어서 가구 경기 전체가 침체되다보니 작년에 비해 매출이 50% 가량 줄었습니다. 특히 소비심리 위축으로 영업점 중심의 오프라인 매출이 급격히 떨어져서 큰 일입니다. 유동성 문제가 겹쳐 낙후된 생산설비들을 교체해야 하는데 환율상승으로 그 마저도 수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내년에는 현금확보가 유리한 홈쇼핑과 온라인 쇼핑 부문의 매출을 확대해야 겠습니다.”
- 침대회사 C사장.

“환자가 없어요. 작년에 비해 눈에 띄게 예약율이 줄었고 겨드랑이 악취증과 같이 ‘치료’를 목적으로 하는 시술외 모발이식이나 성형 등의 환자는 손에 꼽을 정도로 급격히 줄었습니다. 장비 역시 대부분 미국이나 유럽 등 해외에서 수입하는 것이어서 환율 문제 때문에 교체는 엄두도 못내고 있어요. 이 곳 병원들 대부분이 현금 아닌 캐피털 등의 업체를 끼고 대출해서 문을 열다 보니 수익이 안 따라줄 경우 높은 이율과 임대료를 부담하지 못해 문닫는 병원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 강남 소재 성형외과 D원장.

“4분기부터 갑자기 안 좋아졌습니다. 11월부터는 더 심각하고요. 특히 정부의 약가정책으로 인해 작년대비 30% 정도 매출이 급감할 것으로 보입니다. ‘정부정책’이라는 변수에 부딪혀 어쩔 수 없이 매출이 감소할 것으로 예상되는데 이 때문에 주위에서 ‘CEO 교체’라는 말이 나돌아 당황스럽습니다. 회사경영에 책임지고 물러날 수는 있는데 예상치 못한 정책 변수도 평가기준에 포함되어야 하는 건가요?”
- 제약회사 E사장

김진욱 기자 action@ermedia.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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