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의 질문]

“회사 위기관리 매뉴얼을 만들고 있는데요. 이게 디테일하게 작성하다 보니까 한이 없어요. 처음에는 한 100장 이내로 만들어 보자고 했었는데요. 각각 위기유형별로 들어가 부서별로 대응안을 만들다보니 벌써 500~600장이 넘어가게 되네요. 그래도 이렇게 자세한 게 좋겠지요? 큰 예산을 들인 작업이니 두꺼워야 의미가 있을 것 같은데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컨설턴트의 답변]

 

가장 자주 받는 질문이라서 아주 간단하게 답변할 수 있습니다. ‘위기관리 매뉴얼의 분량은 위기관리위원회를 비롯한 일선 담당자들이 암기할 수 있는 분량을 넘어가면 안 된다’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답입니다. 실제로 수천 페이지짜리 위기관리 매뉴얼을 만든다 해도, 그걸 1페이지부터 1000페이지까지 꼼꼼하게 읽은 사내 임직원은 아마 한 명이나 한 명도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나마 그 한 명은 위기관리 매뉴얼을 발주하고 그 프로젝트를 리드했던 담당자일 것입니다.

하지만 주요 임직원이 매뉴얼 전체는 아니더라도 자신이 담당해야 하는 부분에 한해서는 평소 매뉴얼을 읽는 것이 필요합니다. 위기관리 매뉴얼을 제작할 때 담당자들은 최소한의 읽을 수 있는 분량과 이해 가능한 페이지 분량을 감안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실무 담당자들이 이해할 수 있고, 평소 읽는 분량을 토대로 어느 정도 머릿속에 그릴 수 있는 매뉴얼 분량은 최대 10페이지를 넘지 못합니다.

이를 기반으로 볼 때 전체 위기관리 매뉴얼의 분량은 어느 정도나 될까요? 이는 위기관리 매뉴얼에서 다루는 주요 위기 유형들에, 담당 기능별 부서 수를 곱한 분량과 연동되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주요 위기 유형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담당 부서들의 수가 기하급수로 늘어나거나, 그들 각각의 대응 프로세스와 방식들이 기하급수로 늘어나지는 않습니다. 여러 위기 유형이라도 기능별 담당 부서의 역할과 책임은 매번 거의 유사합니다. 일반적으로 10~20%가량의 유형별 대응 업무 가감이 있을 뿐, 나머지 역할과 책임은 동일합니다.

따라서 1000페이지의 위기관리 매뉴얼이라고 해도,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매번 반복되고, 오버랩으로 대응 방안들을 기술한 부분이 약 70~80%에 이를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1000페이지 매뉴얼은 과감하게 300여 페이지로도 정리할 수 있다는 의미죠. 이렇게 정리해 좀 더 심플한 위기관리 매뉴얼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은 담당자라면 누구나 이해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수천 페이지의 매뉴얼이 만들어지는 이유는 뭘까요? 네, 맞습니다. 분량이 적으면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실무자들 중에서도 가능한 세부적으로 자세하게 기술해야 실전에서 참고하면서 위기를 관리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부분 실전 위기관리를 그리 자주 경험하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위기가 발생했을 때 담당 임직원이 위기관리 매뉴얼을 펴서 보게 되면 일단 그 위기관리는 성공하기 힘든 위기관리가 되고 맙니다. 평소 반복적 이해와 훈련이 있었다면 위기관리 매뉴얼의 중요 부분은 모든 위기관리 담당 임직원의 머릿속에 이미 들어가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전쟁터의 군인들을 한번 떠올려 보세요. 전쟁이 발발했을 때 그제서 야포의 작동 매뉴얼을 열어보고 포를 작동하는 군인들이 있다면 그들에게 승산은 얼마나 있겠습니까?

위기관리 매뉴얼은 ‘소장’이나 ‘보유’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매뉴얼의 목적은 ‘교육’과 ‘훈련’입니다. 목적이 정확하다면 매뉴얼은 그렇게 장황하고 디테일하며 두꺼울 수 없습니다. 목적이 정확하지 않기 때문에 매뉴얼은 매번 두꺼워지기만 합니다. 매뉴얼이 두꺼워질수록 임직원들의 접근과 이해는 떨어집니다. 이를 기반으로 한 교육이나 훈련은 더욱 난해해집니다. 아예 임직원들이 열람이나 공유를 포기하는 경우들만 늘어납니다.

왜 위기관리 매뉴얼을 만드는가? 그 매뉴얼을 만들어 어디에 사용하려 하느냐? 과연 이 매뉴얼을 운용하는 임직원들은 각각 자기에게 필요한 부분을 완전하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이런 질문들이 선행되어야 좋은 위기관리 매뉴얼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두루뭉술한 매뉴얼이 무슨 가치가 있단 말입니까?”고 질문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말도 맞습니다. 하지만, 해당 매뉴얼을 기반으로 지속적인 교육과 훈련이 진행된다면 그 가치는 분명 달라집니다. 읽히지 않는 수천 페이지보다 훈련받은 한 페이지의 가치가 더 나은 경우들이 현장에서는 많습니다. 분량의 욕심에서 벗어나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