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도에서 세 번째 짜장면집이 문을 열었다는 것은 일대 사건이었다. 금기를 깨는 일이었다. 이장 외에는 아무도 차릴 수 없는 것이 마라도의 짜장면집이었다. 짜장면뿐 아니라 면 장사 자체가 이장의 허락 없이는 불가능한 곳이었다. 마라도의 짜장면집 역사는 세 번째 짜장면집이 생긴 해를 기준으로 2008년 이전과 2008년 이후로 나뉘었다. 2008년 이후, 깨진 금기는 산산조각 났다. 세 번째 짜장면집이 아무 탈 없이 영업을 이어가자 같은 해에 네 번째, 다섯 번째, 여섯 번째 짜장면집이 차례로 생겨났다. 바야흐로 마라도 짜장면집의 춘추전국 시대가 도래한 것이었다. 모두 그 살인미수 폭행사건 때문이었다. 그 사건으로 집행유예 선고를 받은 이장 무리는 몸조심하느라 십 년 가까이 지켜오던 철옹성이 무너져가는 것을 속수무책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마라도는 ‘짜장도’로서의 면모를 더욱 굳혀갔다. 그 흔하고 맛나고 저렴한 고급 횟감들이 짜장면에 묻히기 시작했고, 마라도에 가면 짜장면밖에 먹을 것이 없어졌다.

우리가 마라도를 떠난 뒤에도 이 기세는 꺾일 줄을 몰라 2015년 현재 열 군데의 짜장면집이 성업 중이다. 이것은 슬픈 역사다. 마라도는 천혜의 섬이지만, 오로지 짜장면만 남았다. 낚시꾼이 점점 줄어들어 민박집은 민박을 하지 않고 짜장면을 팔고, 횟감도 점점 줄어들어 횟집은 회를 팔지 않고 짜장면을 팔고, 해녀들은 물질을 하지 않고 짜장면을 판다. 우리가 문을 열 무렵부터 어지간히 유명한 방송 프로그램이 자주 마라도를 찾아왔고, 초기엔 두세 곳의 휴먼다큐 프로그램에서 마라도의 사람과 삶을 다루더니, 그 사람이 결국 짜장면을 만들어 파는 삶을 사는 바, 결국엔 시청률 1, 2위를 다투는 연예 프로그램의 간판 연예인들까지 직접 찾아와 짜장면을 시식하는 ‘먹방’의 특별한 장소가 되기에 이른다. 그러는 사이 짜장면의 수준도 많이 좋아졌다. 그전에는 공장에서 만들어져 온 봉지 짜장과 봉지 면을 파는 집도 있었고, 직접 볶는다 해도 대부분 맹물에 미원을 풀어서 짜장 육수를 썼다. 우리가 세 번째 짜장면집을 열기 전까진 마라도 짜장면집에선 짬뽕을 먹을 수가 없었다. 성수기 때는 짜장만 팔아도 하루 5백 그릇씩 해치웠으니, 골치 아픈 짬뽕 따윈 할 필요가 없었다. 이젠 짬뽕도 하고, 육수를 따로 내는 집도 생겼고, 마라도하고 해물하고는 별 상관이 없지만, 어쨌거나 섬에 오면 해물이 지천일 거라는 육지 사람들의 터무니없는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만든 해물짬뽕 또는 홍합짬뽕이 짜장보다 더 유명해지기도 했다.

물론 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한 변화가 우리 때문이라고 말이다. 사건 당사자 외에는 그 사건의 내막을 제대로 아는 사람도 없을 뿐더러, 어떤 사건이 그 사회에 던지는 영향을 깊게 이해하는 사람은 더 적다.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는 그렇게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그 사건이 아니라 그 사건을 받아들인 사내의 자세였고, 그 자세가 금기를 깨었고, 그 믿기 어려운 균열을 제3자의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쾌재를 부르며 파고들었고, 우후죽순 들어선 짜장면집으로 인해 사내에게 경제적 정신적 타격을 준 무리의 대장은 더 큰 타격을 받고 현재 마라도를 떠나고 없다. 짜장면집의 명맥은 이어가지만 돈벌이가 되지 않아 가족에게 맡겨두고, 본인은 고기잡이배를 탄다는 소식을 들은 지 벌써 몇 년이다. 우리는 비록 마라도를 도망 나오듯 떠나야 했지만, 사내의 복수는 결국 이루어진 것이다. 이렇게 마라도는 짜장면으로 더욱 유명한 곳이 되어갔는데도 우리가 마라도에서 망하고 나온 까닭은 다른 곳에 있었다. 그 이야기는 차차 하기로 하고, 짜장면집을 개시할 그 무렵으로 돌아가자.

대한민국 어딜 가도, 대한민국에만 있는 희한한 싸움이 식당가의 원조 싸움인데, 마라도 짜장면집도 예외가 아니었다. 열 집이나 되는 지금은 그런 원조 싸움도 웃기는 일이 되었겠지만, 두 집이었던 그 시절에는 치열했다. 치열했다니, 두 집의 오픈 시기가 오십보백보 같이 들리는데, 믿기 어렵겠지만, 무려 7, 8년 정도 차이가 난다. 그럼에도 두 번째로 문을 연 그 집은 토박이이고 실세라는 이유로 대문짝만하게 ‘원조’라는 단어를 내걸었고, 진짜 원조 역시 이에 질세라 최선을 다해 ‘원조’를 알렸다. 사실 짜장면의 원조는 없다. 중국에서 건너왔지만, 중국엔 한국식의 짜장면이 없고, 한국에서 처음 시작한 가게를 꼽으라면 인천 차이나타운의 ‘공화춘’ 정도 될까 모르겠다. 유명한 집인지 맨 처음 시작한 집인지도 확실치 않다. 맨 처음 시작한 집을 원조라고 한다면, 마라도 짜장면집의 원조는 첫 번째 집이 맞을 것이나, 토박이가 아니라는 이유로 두 번째 집의 만행을 제어하지 못했다. 첫 번째 집의 젊은 사장은 마라도에서 태어나 마라분교를 다닌 마라도 토박이가 맞음에도 그 아버지가 부산에서 온 ‘육지 것’이라는 이유로 배척당했다. 마라도식의 연좌제 같은 것이었다. 그도 마라도에서 또 하나의 섬처럼 살아가는 부류였다. 사실 우리가 육지로 갔다가 다시 제주로 내려와 살면서 알게 된 것인데, ‘육지 것’에 대한 배타성은 제주 전역이 다 그랬다. 마라도는 워낙 작은 섬이라 그것이 한눈에 드러나기도 하고, 물리적 폭력이 쉽게 가세하다 보니, 몹시 극단적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마라도를 떠나지 않은 것은 돈을 잘 벌었기 때문이다. 우리도 그랬을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23, 4년 전에도 마라도 짜장면 가격은 5천원이었으니, 대충만 두드려 봐도 계산이 나온다. 건물 몇 채는 짓고도 남을 돈이다. 그 때문에 두 번째 집이 생긴 것이고, 그동안 닦아 놓은 첫 번째 집의 명성을 뺏어 오려니 ‘원조’ 간판이 필요했던 것이다. 대개 한번 오고 말 관광객들에겐 진실이 필요 없으니 말이다. 거기에 세 번째 집으로 등장한 우리는 간판을 뭐로 할 것인지 고민스러웠다. 원조 싸움에 뛰어들고 싶지 않으면서도 관광객들을 끌기가 가장 쉬운 것이 ‘원조’라는 것을 잘 알았으니, 유혹을 뿌리치기 어려웠다. 다른 지역에선 ‘원조’가 오염이라 여기는 사람들도 마라도에선 달랐다. 망망대해 외딴 섬에서 짜장면이라니,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누가 그런 발상을 했는지 궁금해 했다. 그러니 낯 뜨거운 일일지라도 ‘원조’는 잘 먹히는 한 수였다. 그렇다고 우리까지 대놓고 ‘원조’를 붙일 수는 없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사내의 성을 중간에 집어넣은 ‘마라원짜장’이라는 이름이었다. ‘원’자가 ‘원조’를 뜻한다고 알아서들 지레짐작해주면 고마운 일이고, 누가 따지고 든다면 사장의 성이 원 씨라고 하면 되니, 썩 괜찮은 아이디어였다.

우리는 2008년 3월 1일, 마라원짜장을 시작했다. 이 개업 첫날의 이야기는 방송에도 나갔다. 그 며칠 전 공중파 방송의 <3일>이라는 프로그램에서 마라도를 취재하러 왔는데, 밥 사 먹을 곳이 없다며 우리 가게에 들렀다가 우리가 신혼부부라는 것을 알고서는 취재 요청을 해왔다. 그때부터 우리의 대중매체 노출은 시작되었고, 모든 것이 순전히 장사 때문이었다. 사내는 이러나저러나 상관을 안 했지만, 나는 방송이 달갑지 않았다. 마라도로 들어간 이유도 자발적이지 않았고, 그곳의 생활도 편하지 않았고, 신혼이 신혼 같지 않았기 때문이고, 더 큰 이유는 내가 시인이었기 때문이다. 한번 시인은 영원한 시인이라고 말들 하지만, 시집을 낸 지 어언 8년이나 된 지금 내가 시인이라 불리는 것이 꽤나 불편하다. 물론 언젠가 다시 쓸 수도 있으리라 기대는 하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때는 시를 ‘쓰고’ 있던 시인이었는데, 매체 노출은 시인의 자격으로 하고 싶었지, 마라도살이나 짜장면으로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장사를 위해선 이보다 더 좋은 기회가 없었다. 고민 끝에 방송에 응하기로 했고, 개업 첫날 우왕좌왕 서툴게 짜장면을 파는 우리를 카메라가 계속 따라다녔다. 첫날 장사는 성공적이었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사람들이 다들 맛있다며 그릇을 싹싹 비웠다. 그때만 해도 가게 위치가 첫 집이라서 손님들 발길을 끌어들이는 데도 무리가 없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사고가 났다. 내 손가락이 제면기 롤러에 말려들어 갔던 것이다. 면을 밀어 넣기 위해 중지와 약지 두 손가락을 쫙 펴서 같이 밀어 넣은 것이 화근이었다. 누구한테 배운 적도 없고, 기계 다룰 때의 주의사항을 들은 적도 없이 몇 번 시연만 하다 바로 개업을 한 데다, 손님이 들어오기만 해도 쿵쾅쿵쾅, 손님이 부르기만 해도 쿵쾅쿵쾅 가슴이 뛰는 ‘쌩초보’ 장사꾼이라 당황하고 서두르다 그랬던 것이다. 그래도 다행히 손가락은 살렸다. 손끝에 ‘쎄한’ 느낌이 들자마자 비명을 지르며 있는 힘껏 손을 빼내었는데, 손등을 뒤집어 보니, 손톱이 없었다. 중지와 약지 두 손가락 끝이 나란히 뻘건 속살을 빛내고 있었다. 손톱은 말끔하게 뽑혀서 롤러 사이에서 뭉개졌다. 눈으로 보고 나서야 통증이 몰려와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고, 달려온 사내는 울상이 되어 탄식을 쏟아내었다. 그리고 내 손을 모아 쥐고 이런 말을 했다. “아, 섬에까지 데리고 와서 이래 못할 짓을 시키네.” 그 와중에 그 말을 기억하는 것은 감동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그런 말을 남편이라는 자가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사내가 나의 마라도살이에 대해 그 어떤 감정 섞인 말을 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그 당연한 말에도 울컥했던 것이다. 말 한마디에 천 냥 빚을 갚는다지 않는가. 그 말 한 마디에 빠진 손톱이 억울한 것보다 사내의 진심을 알게 되어 나의 마라도살이는 한고비를 넘길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우리 톳면의 생생한 역사다. 톳면을 만들기 위해 인대가 나갔고, 물혹이 생겼고, 손톱이 빠졌다. 레시피는 알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과정, 아무도 하지 않은 일을 해내는 과정은 공히 그런 지난함을 동반하는 것이다. 누구든 몰래 가져다 써서는 안 되는 것이다. 특허권의 문제도, 돈의 문제도 아니다. 도의적인 문제고, 인격의 문제다. 몇 년 뒤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는데, 짜장 소스고 톳면이고 모든 것이 카피당했다. 카피한 자는 들키고 나서도 원저작자를 표시해 달라는 요구를 무시했고, 격한 분란을 겪으면서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고, 우리는 마음을 비우기로 했다. 요리란 아무리 카피를 해서 똑같이 따라한다 해도 요리사마다 결국 달라지게 마련이고, 카피한 자가 송두리째 내던진 인격은 그 무엇으로도 주워 담을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또한 사내가 늘 하는 얘기인데, 요리란 완성이 없다. 계속 변하고, 변하면서 퇴보하기도 하고, 발전하기도 한다. 우리 짜장은 마라도에서 지금 여기 화순에 이르기까지 겉모습도, 속모습도 끊임없이 변해왔고, 지속적으로 발전해왔다. 단번에 성공에 이르렀다면 이런 발전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은 진리다. 그렇다고 아직 성공이라 할 단계는 아니지만 말이다.

손톱이 홀라당 빠지는 대사건이 일어났으니, 하던 장사 내팽개치고 배 타고 나갔다. 다행히 모슬포가 속해 있는 대정읍은 상당히 번화한 읍내라서 정형외과도 있었다. 하지만 뼈가 부러진 것은 아니었고, 그저 손톱이 빠진 것뿐이라 보기엔 흉측해도 병원에서 조치할 것이 달리 없었다. 소독약 바르고, 붕대 감은 게 다다. 그러나, 아, 속살에다 과산화수소수라니, 그 따가움은 지금도 진저리치게 만든다. 수술이라도 할 것처럼 나갔다가 조금은 머쓱하게 막배를 타고 들어왔다. 그 과정을 카메라가 모두 찍었다. 하지만 <3일>은 우리가 주인공이 아니라 마라도 전체가 주인공이었고, 활기찬 봄맞이가 주제여서 불미스러운 사고는 편집되었다. 사내가 다음날 밤에 붕대를 풀고 소독약을 바르고 다시 붕대를 감는, 참으로 신혼부부스러운 장면도 찍었으나, 인과관계가 성립되지 않아 이 역시 삭제되었다. 대신 아름다운 신혼의 밤을 연출해 달라 해서 붕대 칭칭 감고 마루에 앉았다. 사내는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고, 나는 사내의 얼굴을 바라보며 최대한 사랑스러운 눈빛을 뿜어내었다. 카메라는 가게 유리문 밖에서 이 장면을 찍었고, TV에 나온 우리는 행복이 넘치는 신혼부부로 비춰졌으며, 그 프로의 에필로그를 아름답게 장식했다.

기타 얘기가 나왔으니, 건너뛴 결혼식 이야기를 조금만 하자. 사내는 기타를 조금, 아주 조금 칠 줄 알았다. 코드는 잡을 줄 아는데, 악보는 볼 줄 몰랐다. 악보는 볼 줄 모르면서 외우는 노래는 없었다. 그런 사내가 결혼식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신랑이 직접 연주하고 노래하는 것은 연예인들 결혼식에서나 보던 광경이라 하객들이 정말 좋아라 했다. 주례도 없애고, 나와 사내를 모두 알던 소설가 안재성 선배가 축하사를 해주어서 더 그랬다. 웨딩플래너 업체에 모든 걸 맡겼는데, 식 진행은 내가 짰다. 판에 박힌 결혼식은 하기 싫었는 데다 열 살이나 나이 많은 신랑을 내 하객들, 엄밀히 말하면 부모님의 하객들에게 잘 보이고 싶어 그 나이 차를 극복할 무언가가 필요했다. 사내에게 기타 치며 노래할 수 있냐고 물으니, 흔쾌히 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안치환의 ‘내가 만일’이라는 노래 선곡까지 마쳤는데, 그때서야 악보를 보는 게 서툴다고 했다. 남은 시간은 일주일, 대구 악기거리에 있는 어느 악기점으로 가서 사정을 얘기하고, 매일 속성으로 기타와 노래를 배웠다.

결혼식장에서 사내는 실수 없이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나는 시종일관 심각한 표정이었다. 이런 경우는 신랑이 신부 몰래 준비하여 신부를 감동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신부는 눈물 몇 방울 흘리며 호응해주는 식이어야 하는데, 신부는 자신이 연출한 연극이 망쳐질까 봐 전전긍긍이었던 것이다. 그래도 결혼식은 훌륭하게 끝났고, 다들 진심으로 부러워했다. 그렇게 일주일 속성으로 배운 ‘내가 만일’은 공중파 방송에까지 출연하는 기염을 토하며 무리하게 배운 보람을 안겨다주었다. 적어도 우리 엄마는 내가 마라도에서 잘 사는 줄 알고 안도했다니, 그것만으로도 톡톡한 역할을 했다. 그 이후로 사내의 노래는 두 번 다시 듣지 못했지만 말이다. 사내는 속성으로 악보를 잊어갔고, 마라도의 시계는 첫 배가 뜨는 시간과 막배가 뜨는 시간을 기준으로 정신없이 흘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