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코노믹리뷰 안영준 기자]

서울 종로구 경운동. 운현궁 건너편 골목길을 돌아 들어가면 아담하면서도 고풍스러운 고택이 호젓이 자리 잡고 있다. 한옥 레스토랑 ‘민가다헌’이다. 명성황후의 후손인 민병옥 대감의 저택 ‘민병옥가’가 식음공간으로 재탄생한 곳이다. 종로 3가역과 안국역 사이 복잡한 도심 속 고즈넉한 운치가 잠시 발길을 머무르게 한다.

근처 인사동에도 한옥을 개조한 한정식집이나 카페가 즐비하지만, 이곳에선 뭔가 이채로운 분위기가 묻어났다. ‘민가다헌’이라는 간판 아래 ‘Min’s Club’이라는 별칭이 그랬고, 전통과 서양문화가 공존하는 건축 구조와 내부 인테리어가 그랬다.

그래서일까. 이곳은 주한 외국대사들의 단골 명소다. 정치인이나 청와대 관계자도 즐겨 찾는다. 특히 점심엔 중요한 비즈니스 모임이나 외국 바이어 접대를 위해 오는 기업 임원들도 많단다.

분위기뿐만 아니다. 음식도 ‘동서양의 만남’이 테마다. 이곳에선 세계인들의 입맛에 맞춘 퓨전한식을 맛볼 수 있다. 한식의 세계화를 몸소 실천하고 있는 셈이다. 한식 재료를 기본으로 서양식 소스나 조리법을 접목시킨다.

메뉴 : 점심세트 23000원~49000원, 저녁세트 62000원/73000원, 누룽지와 국내산 통삼겹살찜 42000원, 더덕구이와 나물의 너비아니구이 46000원, 헤이즐넛을 얹어 구운 광어와 토마토 46000원(이상 일품요리) 운영시간 : 오전 12시~오후 11시 위치 : 서울시 종로구 경운동 66-7 문의:02-733-2966


가지말이 냉채와 소금에 절인 이탈리아식 멸치젓갈인 엔초비로 깊은 풍미를 더하는 식이다. 분명 한식이지만 아스파라거스, 푸아그라, 송로버섯 등 양식 식자재도 과감하게 쓴다. 또 양식인 파스타엔 떡갈비 완자를 만들어 넣기도 한다. 미숫가루 티라미슈 등 디저트까지 철저히 퓨전이다.

8년째 민가다헌의 맛을 책임져온 송경섭 쉐프는 “전통 한식의 맛은 그대로 살린 채, 양식 조리법과 식자재를 가미하기 때문에 외국인들과 중장년층도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다”고 설명했다.

민가다헌엔 일품요리도 다양하지만 점심과 저녁 세트가 주 메뉴다. 점심엔 두 가지 코스 중 10여 가지 메인요리를 선택할 수 있다. 특별한 손님이나 단골고객을 위한 주방장이 직접 공수해온 고급 식재료에 색다르게 각색한 요리법으로 맛을 낸 ‘특선메뉴’도 있다.

VIP 대접용 공간으로 가장 인기가 높다는 도서관실에 직접 들어섰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1900년대로 돌아간 듯 했다. 구한말 시대에 있었을 법한 가구와 벽난로, 고서와 타자기 등의 소품이 고풍스러운 풍취를 자아냈다.

제일 인기 있다는 쉐프 추천 점심세트가 한상 차려졌다. 먼저 고기가 주식인 외국인들에게 특히 호응 만점이라는 너비아니를 양식용 나이프로 썰어 한입 베어 물었다. 부드러우면서도 연한 육즙이 입안을 감돌았다. 나물과 고추장으로 구워진 더덕을 함께 곁들이니 알싸한 맛이 더해져 오묘한 조화를 이룬다.

분명 간장으로 양념한 너비아니인데 보기엔 스테이크 느낌이 난다. 사이드 메뉴에 구운 호박과 새송이버섯, 반건조 토마토, 메시포테이 등 새콤달콤한 발사믹 소스로 멋을 냈기 때문이리라.

또 다른 점심세트 주 선택 메뉴인 비빔밥의 주 재료는 허브, 새싹 등 야채다. 연노란빛의 새싹과 초록빛의 허브 밭에 날치알까지 먹음직스럽게 봉긋 솟아 얹어져 있으니 막 비비기가 아까울 정도였다.

아쉬움을 달래며 고추장에 비벼 먹은 비빔밥은 향긋한 허브 내음과 톡톡 씹히는 날치알이 어우러져 봄철 잃어버리기 쉬운 입맛을 돋우기에 충분했다. 건강식으로도 일품이니 모 중견그룹 회장은 직원들과 함께 이곳을 찾으면 늘 비빔밥을 그것도 절반만 즐긴다고 송 쉐프가 살짝 귀띔한다.

함께 나오는 샐러드는 수란샐러드다. 물속에서 반숙 정도로 익힌 수란을 살짝 얹어 더욱 담백하고 부드러우며 달콤한 소스에 버무려진 비트피클 등 야채도 신선했다. 한식엔 밥과 반찬도 빠질 수 없는 법. 과일간장에 비벼먹는 콩나물 밥, 된장국, 백김치 등이 곁들여져 든든한 한 끼 점심식사로 만들어준다.

정성은 음식에만 들어간 것이 아니었다. 식기에도 고급 퓨전 한식 레스토랑의 품격이 느껴졌다. 밥그릇, 앞접시 등은 도자기 장인이 만든 수제품만, 메인디시 접시는 스페인에서 수입한 명품그릇을 쓴다.

음식 맛에 흠뻑 빠져 있다가 문득 창호지가 곱게 발린 문을 열어보니 살랑거리는 봄바람에 대나무 우는 소리가 더욱 청아하게 들렸다. 뜰에 핀 분홍색 꽃망울도 유난히 고운 자태를 드러냈다. 바쁜 도시 생활 속 입안을 즐겁게 하는 일품 퓨전 한식 요리와 함께하는 고즈넉한 삶의 여유로움이라 풍경은 더욱 아름다웠다.

동서양 문화가 혼재하는 역사적 공간 ‘민가다헌’

민가다헌은 옛 모습 그대로 지키고 있지만 박제된 채로 머물러 있지 않다. 민병옥가는 화장실과 욕실을 내부로 넣고 이를 연결하는 긴 복도를 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형태의 근대 건축개념이 도입된다. 한국 최초의 개량 한옥이다.

한옥의 전통미에 20세기 초반 서양문물이 처음 도입되기 시작했을 때의 서구식 생활방식이 접목됐다. 한식에 양식을 접한한 것처럼 구조나 인테리어도 전통문화와 서양문화가 혼재한다. 민가다헌은 각각 다른 분위기의 실내공간과 야외 테라스로 구성돼 있다.

카페는 한옥의 안채 개념을 도입해 더욱 아늑하며 높은 천장의 서까래는 유독 운치 있다. 다이닝룸에선 기존 벽면에 그대로 살아있는 나무 기둥과 간결한 문과 창의 문양에서 조화로운 구조적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도서관은 구한말 외국 대사관 클럽을 연상시키는 빅토리아 양식의 남성적 분위기를 풍긴다. 넓은 창에 모시 블라인드가 걸려 있는 테라스는 한적하게 뒤뜰을 내다볼 수 있는 공간으로 꾸며져 있다.

전민정 기자 puri21@asia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