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의 디폴트 위기가 전 세계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 산고 끝에 유로존 국가들의 정상회의에서 그리스에 대한 3차 구제금융을 지원키로 합의했지만 워낙 부채가 커 채무 위기가 다시 올 수 있다는 경고가 나온다. 그리스의 정부 부채는 3,200억 유로, 우리 돈으로 397조 원에 이른다.

국내 경제 전문가는 그리스의 디폴트 위기 원인으로 유로존 가입과 경상수지 적자 누적, 경기변동에 취약한 산업구조, 단일통화 사용에 따른 독자적 통화정책 대응 곤란, 긴축재정과 경기침체의 악순환 등을 꼽았다.

▲ 정인호 VC경영연구소 대표

이를 협상학 관점으로 적용해보면 한마디로 배트나의 부재라고 할 수 있다. 배트나(BATNA : Best Alternative to a Negotiated Agreement)란 ‘협상이 결렬되었을 때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대안 또는 마지노선’을 말한다.

배트나가 일반 비즈니스 협상에서 어떻게 활용되는지 대우자동차의 협상을 통해 살펴보도록 하자. 1999년 8월 대우자동차는 12개 계열사 워크아웃을 결정하고 매각을 결정하였다. 아시아 시장 진출의 필요성을 느낀 GM은 대우자동차 인수에 뛰어들어 대우자동차 채권단에 수의계약 형태로 54억 달러에 대우자동차를 인수하겠다는 의향을 밝혔다. 다음 해에는 포드가 대우자동차 공개입찰에서 70억 달러의 매각의향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대우자동차는 3년 후인 2003년 불과 4억 달러에 GM에 넘어갔다. 무엇이 한때 70억 달러까지 치솟았던 대우자동차의 가격을 10분의 1도 안 되는 가격으로 떨어뜨렸을까?

그 비밀은 협상과정에 있다. 협상 초기 대우자동차를 인수하지 못해 안달하던 GM은 포드가 떨어져 나간 후 전형적인 시간끌기 전략과 헐값매입 전략으로 협상에서 우위를 점함으로써 대우자동차를 4억 달러라는 헐값에 품에 안을 수 있었다. 반면 우리 정부와 채권단은 내부 협의를 통한 뚜렷한 매각목표가를 설정하지 못하고 더 높은 가격을 받기에 급급하다 매각 시기를 놓쳐 버리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GM에게 4억 달러에 매각되기 전 배트나가 없었을까? 할 수 없이 4억 달러에 팔아야 한다면 국내기업인 현대자동차, 기아자동차, 삼성자동차 등을 배트나로 끌어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4억 달러에 팔 바에야 차라리 우리나라 기업에 파는 것이 국제적인 망신은 덜 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자력갱생도 배트나로 활용할 수 있다. 헐값에 팔아서 큰 손해를 보는 것보다 자력갱생으로 회사를 어느 정도 반석위에 올려놓은 상태에서 후일을 도모했다면 국제적 망신은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력갱생을 통해서 성공적인 협상을 한 대표적인 사례가 하이닉스이다. 1997년 IMF외환위기를 겪은 하이닉스는 1999년 7월 LG반도체를 인수하면서 15조원의 부채를 지게 되었다. 채권단인 미국의 마이크론과 장기간 지리멸렬한 협상을 진행하다가 대우자동차와 같은 결론을 맞이하지 않기 위해 마이크론과 협상 결렬을 선언하고 자력갱생이라는 배트나를 선택한다.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임원의 숫자를 106명에서 65명으로 줄이고, 직원 무급휴가, 복지 반납, 임금 삭감 등의 자생적 노력을 통해 결국 당초 제시한 매각대금과 비슷한 금액으로 2011년 11월 SK텔레콤이 인수하게 되었다.

오늘날 그리스가 거듭되는 구제금융 지원에도 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배트나의 부재다. 즉, 경기침체를 벗어날 돌파구나 마땅한 경제성장 동력이 없기 때문이다(자력갱생의 부재). 또한 유로화가 아닌 자체적인 화폐(드라크마)를 썼더라면 통화정책을 통해 타계해 볼 수도 있었겠지만 유로존에 묶여 있던 탓에 그리스는 유로화 강세로 인해 수출도 불가한 최악의 상황에 처했다(단일 통화정책).

거기에 정치인과 공무원의 방만하고 비효율적인 재정운영은 빈약한 과세율과 높은 탈세율, 부정부패와 결합되면서 국가재정의 악화를 가져왔다(리더십의 부재).

찬란한 서양문명의 발상지인 그리스가 심각한 위기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하루 빨리 배트나를 개발해야 한다. 더불어 정치인과 그리스 국민 모두가 위기 극복을 위한 통한의 리더십을 발휘해야한다. 그래도 가능한 것이 그들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나라니깐.

정인호 칼럼니스트 : VC경영연구소 대표, 한국표준협회 수석전문위원 등으로 활동 중이다. 주요 저서로는 『협상의 심리학』,『HRD 컨설팅 인사이트』, 『다음은 없다』, 『소크라테스와 협상하라』, 『상대와 소통하고 설득하는 법』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