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곡물 파동 때 CIS·남미·亞 진출 가속화
진출기업 턱없이 부족한 지원…대형화·전문화 걸림돌로

곡물 가격의 상승세가 무섭다. 세계 곡물 가격 지수는 지난 1월 기준 전년 대비 무려 44%나 올랐다. 지난 2007~2008년 끔찍한 가격 폭등의 기억도 모자라 상승 곡선은 멈출 줄 모르고 있다.

곡물 가격은 비탄력적이라 공급량이 조금만 줄어도 크게 오른다. 우리가 늘 그 추이에 주시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여기에 국제 곡물 가격이 오름으로써 물가가 상승하는 ‘애그플레이션’(Agflation) 현상에 대한 우려도 심각해지고 있다.

곡물시장의 불안전성은 더욱 증대되고 있는 분위기다. 바이오에너지로 인한 곡물 수요 확대, 국제 투기 자본 개입으로 인한 가격 급등 현상 등이 그 원인이다. 중국 등 신흥 개도국의 육류 소비 증가로 사료용 곡물 수요도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우리나라는 세계 5위권의 곡물 수입국이다. 자급률은 약 26.7%. OECD 회원국 중 최하위 수준이다 그 중에서도 쌀이 94%를 차지하고 밀, 옥수수, 콩 등은 0.4~9%에 불과하다. 자급에 필요한 경지 면적 또한 턱없이 부족하다.

이쯤 되면 ‘답’은 많지 않다. 식량 자급률을 높이고 보다 안정적으로 곡물을 조달하기 위해 해외로 눈을 돌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이치. 우리나라에서도 이제 해외 농업 개발은 ‘선택’이 아닌 ‘필수과제’로 인식되고 있다.


우리나라 국민이 해외에서 농·축산물을 개발하려면 해외자원개발법 제 5조에 의거,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에게 해외농업개발사업계획을 신고해야 한다. 4월 현재 우리나라의 해외농업신고 현황에 따르면 69개의 업체가 17개 국가에 진출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중 국내 대기업이 직접 경영하거나 투자한 경우는 손에 꼽을 정도다. 지난 2009년에는 현대중공업이 러시아 연해주(옥수수)에, 제분·사료기업인 동아원 등이 설립한 코지드가 캄보디아(옥수수, 타피오카)에, 식품기업 대상이 인도네시아(옥수수)에 진출했다.

이어 올해 삼양그룹 계열의 삼양제넥스가 인도네시아 자바섬NTT에서 옥수수와 카사바 농장사업에 나섰다. 이것이 대형화·전문화가 절실한 국내 해외 농업 개발의 현주소다.

주요 진출 지역은 러시아, CIS, 동남아시아, 남미 등 개발도상국이다. 인구 분포가 적어 곡물 수출에 대한 정부의 통제가 낮기 때문이다. 선호 작물은 국내 자급률이 낮은 옥수수(약 0.3%), 콩(약 9%), 밀(약 0.7%), 카사바, 사탕수수 등이 주류를 이룬다.

이들 진출 대상 국가는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하나는 남미와 호주 등 대규모 농장이 많은 기존의 주요 농업 수출국이다. 다른 하나는 러시아, CIS, 중앙아시아, 동남아시아 등 공산주의 체제가 붕괴하고 시장경제가 도입된 지역이다.

최근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곳은 후자다. 집단농장 체제의 붕괴로 떨어진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이들 국가들은 해외기업들을 대상으로 강한 투자 유치 정책을 펴고 있다. 특히 Non-GMO 곡물 재배를 국가 정책적으로 지원하고 있어 국내 곡물 수급에도 더욱 유리하다는 점도 눈길을 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저렴한 농지대와 인건비, 강한 인센티브 등을 이유로 이들 국가에 무조건 투자하기엔 리스크가 크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업계 관계자는 “최소한 농장사업이 망하더라도 확보한 땅은 남기 때문에 일부 중소업체들은 체제 전환국이나 동남아시아 국가를 손쉽게 투자지역으로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17개국에 70여개업체 진출

2007~2008년 갑작스럽게 닥친 글로벌 식량 위기는 식량안보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워주기 충분했다. 농식품부도 이를 계기로 2009년 6월 ‘해외농업개발 10개년 기본계획’을 수립하고 해외농업개발정책을 본격 시행하기 시작했다.

목표는 2018년까지 밀, 옥수수, 콩 등 주요 수입곡물의 10%(138t)를 확보하는 것. 기본 방향은 실수요자 중심의 민간이 주도하는 가운데 정부가 전략수립, 기술·교육·외교·금융 등에 측면 지원하는 형태였다.

2009년부터 7개국에 진출한 18개 기업에 융자 지원한 금액은 총 434억 원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해외 현지에서 땀 흘리고 있는 민간업체의 수요를 충족시키기엔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지난 2008년부터 한국농어촌공사가 추진 중인 해외농업개발사업의 사업 실적도 목표 대비 단 0.1%도 달성되지 못한 것으로 드러났다. 송훈석(무소속, 강원 속초·고성·양양) 의원이 한국농어촌공사로부터 제출받은 ‘2009~2010년 해외농업개발 융자금 지원현황’ 자료에 따르면 이 사업을 통해 국내에 반입된 곡물량이 중장기 목표 대비 0.058~0.062% 수준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사업 시행 2년이 다 돼 가는데도 사업 성과는 매우 저조한 것.

송훈석 의원은 “곡물에 대한 장기적·안정적 해외공급선을 확보한다는 해외농업개발사업의 사업 취지는 바람직하지만 사업 초기라고 해도 실제 국내로 반입한 곡물량이 너무 미미하다”며 “초기 성과의 미흡, 형식적인 현지 실사, 사업의 중도 포기 또는 변경 등의 문제점에 대한 보완책이 시급히 마련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과거 실패의 경험도 우리나라에서 해외 농업 개발이 더딘 이유다. 1960~70년대 정부 주도하의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등 지역 등에 농업 이민을 시도한 바 있다. 이후 1981년 SK의 전신인 선경이 미국 워싱턴 주에 3300㏊ 넓이의 옥수수 농장 개발에 나서는 등 민간 주도로 해외 농업 개발을 추진한 사례가 있었으나 일부를 제외하고는 현지 정보, 영농기술, 자금 부족 등으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곡물 조달 시스템도 낙후되긴 마찬가지다. 곡물의 80%를 특정국가에서 수입하고 있으며 곡물 메이저가 그 중 70%를 공급하고 있다. 곡물 수출국이 식량을 무기화 할 경우 대응 방안은 ‘전무’한 실정이다.

정부가 다국적 곡물 메이저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고 식량 주권을 확보한다는 목표 하에 ‘국가 곡물 조달시스템’ 구축 사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지난 1월 농식품부는 농수산물유통공사를 주축으로 미국에 국제곡물회사를 설립하고 이를 기반으로 곡물 메이저에 견줄 수 있는 글로벌 기업을 육성하겠다고 밝혔다.

이를 통해 2015년에 전체 수입 물량의 30%인 400만t을 조달한다는 계획이다. 그러나 이 조차도 정부와 업계가 서로 다른 의견을 내세우며 논란이 가열되고 있다. “반드시 해야 하는 사업”이라며 정부는 밀어붙이지만 업계에선 현재의 전략으로는 성공 가능성을 담보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세계로 열린 시야 일본 농업 배우자

식량 안보의 중요성이 더해지고 있는 현재 우리와 비슷하게 곡물을 대량 수입하는 일본의 행보를 더욱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곡물 자급률은 28% 수준으로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은 일본은 해외 농업 개발에 발빠르게 움직여 남다른 성과를 창출하고 있다.

일본은 30여 년 전인 1978년 젠노그레인이라는 곡물회사를 설립해 미국에 대형 저장·유통시설을 확보, 자체적으로 글로벌 조달 시스템을 구축했다. 현재 수입량(2700만t)의 70%를 자국 조달시스템을 통해 공급받고 있다. 미쓰비시, 이토추, 마루베니 등 종합상사들도 다국적 곡물 메이저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곡물 유통시장에 영향력을 확보하고 있다.

이뿐 아니다. 1990년대부터 해외식량 기지 개발에 본격적으로 나서기도 했다. 글로벌 조달 시스템 구축을 통해 얻은 경험과 실력을 바탕으로 현지 농장 경영도 점차 확대하고 있다. 미쓰이물산은 브라질에 약 10만ha 규모의 농장을 매입해 운영하고 있으며, 여기에서 올리는 매출만 10억 달러에 육박하고 있다.

아직은 주로 식용으로만 수출하고 있지만 미래에는 현지에서 생산된 사탕수수를 활용하는 바이오에탄올 사업에도 진출할 계획이다. 자국 농경지 총면적의 3배에 달하는 농지를 해외에 확보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도은진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애그플레이션 시대, 다시 보는 농업’에서 일본이 우리와 비슷한 상황 속에서도 미래 먹거리 확보에 앞서갈 수 있었던 것은 정부의 농업에 대한 시각 전환이 큰 역할을 했다고 설명한다. 척박한 자국 내 상황을 탓하기보다는 글로벌 시각을 가지고 새로운 해결책을 찾아낸 것이다.

도 연구위원은 “농산물 가격 상승이 일시적 현상이 아닌 추세적 상황이 될 가능성이 높다면 농업을 단순히 하나의 상품을 생산하는 여러 산업 중 하나가 아니라 국가의 전략적 산업의 하나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성공사례 충남해외농업자원개발 캄보디아 영농사업


해외 재배 곡물 반입 1호 농민회사

지난해 8월 현재. 농어촌개발공사가 융자 지원한 국내기업들 중 해외 현지에서 곡물을 실제로 국내에 반입한 기업은 단 한 곳이었다. 주인공은 캄보디아에서 옥수수 8만 7000t을 국내에 들여온 ‘충남농업자원개발’이다.

해외농업개발 진출을 위해 국내 농축산인들 30여 명이 출자한 영농조합인 충남해외농업자원개발은 캄보디아에 진출한 유일한 농민회사다. 지난 2009년 캄보디아에 현지법인인 KoMer-CN를 설립, 해외 농업 개발에 본격 나섰다.

현재 충남해외농업자원개발 조합원들이 약 500ha의 부지 중 개간을 통해 21ha에 옥수수를 재배하고 있다. 재배한 옥수수는 생산, 건조, 검역 및 통관 과정을 거쳐 국내 반입, 사료용으로 충남에 있는 축협 사료공장에 공급 중이다. 2009년 1월부터 현재까지 13개월 동안 세 번 옥수수를 국내로 반입했다. 동남아시아 옥수수도 한국 도입이 가능하다는 희망을 처음 심어준 것이다.

동남아시아지역은 고온 다습한 이유로 곰팡이 종류의 증식이 빠르게 진행되어 국내 도입에 어려움이 많았던 것이 현실이었다. 그러나 충남해외농업자원개발에서는 곰팡이 증식을 억제하는 방법을 찾았고, 동남아시아 지역의 옥수수는 한국 도입이 어렵다는 고정관념을 깨고 그 가능성을 보여줬다.

또한 현지 농민들에게 옥수수 종자와 새마을 운동, 선진 농업기술을 전수하여 현지 경제 활성화에 도움을 주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현재 약 1400여 명이 조합원으로 가입되어 있는 현지 농민조합을 통해 옥수수를 재배하고 생산하도록 하고 있다.

충남해외농업개발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더 큰 꿈을 갖고 있다. 한국의 농협 시스템을 벤치마킹하여 캄보디아에 옮겨놓아 선진 농업 기술을 캄보디아에 접목하는 것이다.

이우창 대표는 “캄보디아는 기후 조건도 좋지만 특히 아직까지 국제 곡물 메이저들의 손길이 뻗치지 않은 미지의 땅이어서 우리나라 해외 식량기지 후보로는 최적의 조건을 갖췄다”며 “직영농장과 계약재배 농장을 통해 연간 약 85만t의 옥수수, 콩을 생산함으로써 국가의 식량 안보에도 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했다.

■진출 전략 포인트
[대형화]
-최대 8만 5000ha 직영 및 계약재배 농장 운영
-연 85만t 안정적 수급 계획

[종자확보]
-종자 생산단지 조성 및 육성
-동남아 해외농업개발기업 보급

[현지화]
-현지인에게 새마을 운동 보급, 선진 농업기술 전수
-안정적 생산기반 실현

성공사례 현대종합상사 연해주 영농사업

대형화·전문화 대표사례 안정적 성장

현대중공업은 대규모 농지 확보와 체계적인 경영 인프라로 성공적으로 해외농업개발 사업을 펼치고 있는 대표 사례로 손꼽힌다. 지난 2009년 1만ha 규모의 현지 영농법인을 인수해 사업을 시작했으며 지난해 2월부터 현대종합상사가 이 사업의 관리를 위탁받아 운영하고 있다.

현대중공업은 대규모 농지를 확보해 영농에 직접 참여하는 방법을 택했다. 이와 함께 유통시설에 투자해 주위 생산자로부터 곡물 수집도 병행하고 있다. 2009년에는 3000ha를 경작해 콩 4500t, 옥수수 2000t을 수확하는 성과를 거뒀다. 이듬해엔 경작규모를 3500ha로 늘려 콩 5400t, 옥수수 2400t을 거둬들였다.

올해는 500ha를 늘려 총 4000ha를 경작할 예정이며, 콩과 옥수수 등 약 10000t 수확을 계획하고 있다. 이와 함께 농수산물유통공사와 협의를 통해 생산 곡물의 도입을 추진할 예정이다.

현대 연해주 농장의 영농 방침은 친환경적이다. 콩과 옥수수를 윤작하여 비료 사용량을 최소화하고 토양 비옥도를 유지하고 있다. 경작하는 콩과 옥수수 또한 Non-GMO 종자를 사용해 안전한 곡물 생산에 주력하고 있는 것도 경쟁력이다.

현대종합상사는 연해주 농장 규모를 현재 1만5000ha에서 2012년까지 약 5만ha까지 확대하고 남미 등 해외농장 지역을 지속적으로 넓혀 나가는 등 바이오원자재 사업을 주력사업으로 추진한다는 구상이다.

■진출 전략 포인트
[농지확보]
-안정적인 농지사용권 확보
-개간이 완료된 집단농장 인수(진입비용 최소화)

[지분인수]
-현지 운영 중인 회사 지분 인수로 리스크 최소화
-효율적인 영농조직 확보
-영농 노하우 전수 및 현지 정보 접근 용이

[현지화]
-현지 인력에 의한 책임 운영(문화적 마찰 최소화)
-지역사회에 대한 기여로 우호적 분위기 조성

[전문화]
-영농전문가 초빙(미국인 Agronomist 컨설팅 계약)
-영농회사 경영전문가 지원(한국, 뉴질랜드 CEO)
-효율적인 경영시스템 구축(최신 영농기법 도입)

전민정 기자 puri21@asia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