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이노베이션의 울산공장 전경.


CEO들 탁월한 혜안·치밀함·과감한 결단으로 위기를 기회로 새역사 썼다

경영은 전략이다. 준비된 자는 미소를 짓고, 그렇지 않으면 눈물을 흘린다. 시장은 냉정하다. 위기와 기회는 늘 함께 한다. 혜안이 없는 CEO는 살아남기가 힘들다. 여기, 시대를 읽는 안목이 탁월한 CEO들이 있다. 신의 마지막 선물이라 불리는 석유를 자유자재로 다루고, 불확실성에 대비하는 게 습관이 된 이들. 석유화학업계 CEO들의 얘기다. 20년 간 무역 흑자 행진을 이루고 국내 대표 수출효자산업 성장한 석유화학업계만의 장점은 무엇이 있을까. <이코노믹리뷰>가 석유화학 대표 CEO의 경영전략을 짚어봤다. 한국경제에 활력을 불어 넣을 수 있는 키워드들이다. <편집자 주>

8:30(AM) 정장을 빼입은 직원이 하나둘 외부와 전격 차단된 회의실(전략기획실)로 모이기 시작한다. 몇몇은 노트북을 켠 채 타자를 치고, 일부는 전화를 돌린다. 한쪽에선 만들어진 자료를 정리하고 있다. “아직 준비가 안 됐어? 빨리 하라고!”한 직원이 소리를 치자 저마다 하던 일에 속도를 낸다.

8:45 신성장동력이 빼꼭히 적힌 자료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진행이 될 것인지 기록돼 있다. 투자금액과 예상 효과까지도 적혀 있다. 적게는 1년에서 많게는 3년 이상 철저히 계획된 경영전략들이다. “15분 남았습니다.” 고위직 임원이 외부로 알릴 내용과 내부적인 내용을 꼼꼼히 체크, 마무리 준비에 나선다.

8:55 CEO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 아, 아아”준비된 자료를 가볍게 읽은 뒤, 목소리를 가다듬는다. 모두 알고 있는 내용인지라 빼놓지 않아야 할 부분만 간단히 체크한다. 그리고 CEO의 연설이 시작된다. “전송.” 업무 책임자의 한마디가 떨어지기 무섭게 직원들은 일제히 마우스를 클릭, 언론사로 메일을 보낸다. 잠시 후, 업체 이름만 다를 뿐이지 “미래를 대비한 신성장동력 마련 핵심”이란 비슷한 내용의 기사가 일제히 쏟아진다.

매년 반복되는 석유화학업체의 시무식 장면이다. 업체마다 시간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지만 매년 1월 1일이면 똑같은 모습이 반복된다고 한다. 혹자는 뜬금없이 웬 시무식 장면이냐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석유화학업계를 가장 빨리 이해하기 위해선 시무식만한 게 없다. 다음은 A석유화학업체 관계자의 말이다.

LG화학은 2차 전지를 미래 신성장 동력으로 삼은 뒤 해외 자동차 업계에 납품을 하는 등 괄목할 만한 성장세를 거뒀다.


“시무식의 시간 차이가 있을 순 있지만 (각 석유화학업체에서) 발표되는 (경영전략) 내용은 모두 비슷하다. 내용을 달리 하고 있긴 하지만 불확실한 미래에 대응을 하자는 게 중심이다. 신사업 관련 내용이 구체적으로 공개되는 만큼 철저한 보안에 힘쓰지만 항상 비슷한 내용이 나오는 걸 보면 신기할 따름이다.”

올해 석유화학업계의 신년사만 봐도 그렇다. CEO들은 일제히 “미래 상황에 불확실성이 심화되고 있어 발 빠르게 변화에 대응해야 한다”고 말했다. 허동수 GS칼텍스 회장이 그랬고, 김반석 LG화학도 그랬다. 구자영 SK에너지 사장, 정범식 호남석유화학 사장, 홍기준 한화케미칼 사장도 비슷한 발언을 했다.

석유화학업계가 어떤 곳인가. 1993년 이후 20년 간 꾸준히 무역 흑자 행진을 하고 있지 않았던가. 여기에서 주목할 점이 있다. 석유화학업계 CEO의 자리는 결코 쉬운 자리가 아니다. 수출, 환율, 유가 등 환경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업인 만큼 세계 경제의 흐름을 꿰뚫고 있어야 한다.

지금보다는 미래를 대비해야 한다는 막중한 책임감도 뒤따른다. 고갈 자원인 석유를 활용한 사업을 하다 보니 준비성만큼은 산업 전반의 CEO들 중 최고로 꼽힌다. 그래서일까. 석유화학업계 CEO는 늘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다. 그룹 총수 일가의 두터운 신임을 받으며 장수 CEO란 꼬리표를 달고 다니는 이유다.

정범식 사장 해외M&A ‘선견지명’

한화케미칼은 202년 까지 6조원을 들여 세계 1위 태양광 업체로 도약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국내 석유화학산업은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춘 사업이다. 석유화학의 기초 원료인 에틸렌 생산 능력은 연 750만t으로 세계 5위를 기록했다. 과거 가발, 섬유 등 단순 제조업이 수출을 주도했다면 90년대부터 석유화학을 중심으로 재편됐다. 90년 이라크전쟁, 97년 IMF 사태, 2000년 버블 사태, 2007년 서브프라임 사태를 겪으면서도 꾸준히 무역 흑자를 기록했다. 수출효자산업의 끝엔 석유화학산업이 있는 셈이다.

석유화학업계는 또 위기가 올 때면 기회로 바꾸는 놀라운 능력을 보였다. 2007 원유 가격이 150달러를 기록하며 산업 전반이 침체됐지만 석유화학업계만은 특수를 누렸다. 미래를 대비한 전략이 적중한 결과였다는 평가다. 최근 원유가 상승 등으로 제3차 오일쇼크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지만 각사들이 느긋한 모습을 보이는 것도 이 때문. 1·2차 오일쇼크 당시 정유 산업, 정확히 말하면 국내 정유 생산시설이 부족했지만 불확실성을 대비해 시설을 늘린데 따른 결과다. 위기 속에서도 지속적인 투자를 통해 미래를 대비하며 ‘위기를 즐겼다’는 얘기다.


대표적인 사례는 호남석유화학이다. 원자력발전소가 대체에너지원의 중심에 섰던 지난 2009년과 2010년. 호남석화는 국내외에서 석유화학 기업의 인수합병에 나섰다. 원자력과 태양열 등 유가 대체산업 시대가 왔다는 경제연구소들의 전망과 정반대의 행보를 보였다. 2009년 1월 롯데대산유화를 합병했고, 2010년 1조2000억 원을 들여 말레이시아 석유화학기업인 타이탄을 인수한 것. “대체에너지의 시대가 오고 있는 것은 인정하지만 석유를 대체할 만한 산업이 자리 잡기 위해선 시간이 필요하다.”

정범식 호남석화 사장과 그룹 경영진의 과감한 결단이 주요했다. 신동빈 회장도 정 사장의 의견에 적극 동의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렇게 몇 달 후. 일본 지진으로 원자력 발전소에 대한 불안감이 확산되고 있어 석유화학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고 있다. 원유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고 있어 아시아 전체 시장에 정유 부족 현상까지 제기되고 있는 상황에서 호남석유화학의 반사이익은 엄청날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호남석화가 미래 먹거리 창출을 게을리 하고 있지는 않다. 계획은 세워졌고, 실행만이 남았다. 13조 원 규모의 석화사업 매출을 2018년까지 40조 원으로 끌어올린다는 목표를 세웠다. 화학사업의 고부가가치화와 M&A를 통한 글로벌화를 통해 벌어들인다는 계획이다. 대체에너지 대신 정통 석화사업을 바탕으로 신소재 개발을 통해 답을 찾겠다는 것. 대부분 석화 업체가 대체에너지에 투자를 한 것과는 다른 양상을 띤다.

호남석화가 신수종사업으로 삼고 있는 분야는 폴리프로필렌 나노복합체다. 플라스틱으로 이해하면 쉽다. 철강을 대체할 만한 강도를 갖고 있으면서도 무게가 가벼운 것이 특징. 무게가 적게 나가 연비 향상을 위해 자동차 분야와 내구성 향상 차원의 건설 등에 활용될 차세대 재료다. HDPE (고밀도 폴리에틸렌), PP (폴리프로필렌), MEG (모노에틸렌글리콜)가 국내 시장 점유율 1위를 기록하고 있어 강점을 극대화시키기 위한 전략으로 풀이된다.

구자영 사장의 사업 분할 승부수

국내 대표 석유화학기업인 SK이노베이션은 사업 분할을 통해 경쟁력 극대화를 꾀하고 있다. 정유사업과 동시에 대체에너지를 기반으로 한 신성장동력 만들기에 주력하기 위해서다. SK이노베이션은 석화업계 중 유일하게 석유 개발에서 원유 정제, 제품 생산 및 수송, 판매에 이어지는 석유사업 분야의 밸류체인 시설을 갖추고 있다. 또 원유 정제 과정에서 생산되는 나프타를 이용해 에틸렌, 프로필렌 등 석유화학 제품을 생산한다. 미래의 글로벌 경영환경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리스크의 감소로, 다각화된 사업 구조를 분할시켜 장점만을 살려낼 복안인 셈이다.

구자영 SK이노베이션 사장은 “석유, 화학, 윤활유, 자원개발과 첨단 에너지 기술에 이르기까지 각 사업 영역에 최적화된 경영시스템을 갖추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해 사업 분할을 택했다”고 했다. 남들보다 앞서 준비하지 않고선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 확보가 어렵다는 판단이 짙게 깔려 있는 듯하다.

SK이노베이션에 따르면 SK루브리컨츠를 시작으로, SK에너지, SK종합화학 등 사업 분야에 따른 분할을 통해 4개사 체제를 운영할 계획이다. 불확실한 경영환경 변화에 신속한 대응과 빠른 의사결정을 통해 리스크 부담을 줄여 성장 가속화를 추구하겠다는 것이다.

큰 그림은 그려졌다. SK이노베이션은 기술력을 바탕으로 정보전자소재, 배터리, 석유개발, 기술기반의 신규사업 개발을 담당하게 된다. SK에너지는 국내 1위 석유 사업자인 동시에 세계적 트레이딩 업체, SK종합화학은 중국 시장 공략을 통한 아시아 최고 화학회사로의 성장을 목표로 하고 있다.

SK이노베이션 관계자는 “2010년 40조 매출에서 2020년 까지 120조 원 매출 달성과 영업이익 11조 원의 비전 달성을 내걸고 신성장동력 마련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말했다. SK이노베이션의 2020년 목표의 가능성은 충분하다. 미래를 대비해 내수가 아닌 해외수출형 구조의 사업모델을 미리 만들어 놨기 때문이다. 싱가포르 중심의 트레이딩을 통한 체계적인 제품 수출 포트폴리오 구축했고, 오래 전부터 중국과 인도네시아의 성장에 주목해 시장개척을 해왔기 때문이다. 실제 SK이노베이션의 지난해 수출 물량은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던 2008년 7224만 배럴(석유·경유·등유)보다 14% 높은 8258만 배럴을 기록했다.

김반석·홍기준 사장 대체에너지 사활

김반석 LG화학 사장과 홍기준 한화케미칼 사장은 에너지업계의 잔뼈가 굵은 CEO다. 김 사장은 2001년 LG석유화학 시절부터 현재까지 대표로 활동하고 있고, 홍 사장은 한국종합에너지의 대표를 지냈고 현재 한화케미컬 사장으로 근무 중이다. 모두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과 경영전략 수립에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다는 평이다. 그룹 총수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업무를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LG화학이 주목한 미래성장동력은 대체에너지. LG화학은 2차 전지, 한화케미칼은 태양광 사업을 주력 분야로 삼고 있다.

LG화학은 2차전지 사업에서 세계적인 수준을 확보하고 있다. “현안에만 급급해선 안 된다. 5년과 10년 후를 내다보고 씨앗을 뿌려야 한다.” 구본무 LG그룹 회장의 지시를 받은 김 부회장이 2차 전지 사업을 미래 신수종 사업으로 정한 뒤 괄목할 만한 성장을 거뒀다. 그린에너지 시대를 예상, 2차 전지 크기의 최소화에 노력했고, 남들 보다 먼저 뛰어든 덕에 각종 보조금을 확보해 국내외 생산 설비 시설 확장에 투자했다.

노력은 결실을 맺는 법. 현재 LG화학의 2차전지 기술력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지난해 미국 공장 기공식에 오바마 미 대통령이 직접 방문, 세계 최고 기업의 면모를 자랑하기도 했다. 실적으로 봤을 때 성과는 확연히 드러난다. LG화학은 GM, 포드, 현대차 등 10여 개 글로벌 자동차 메이커들과 2차 전지 공급 계약을 맺었다. 현재 세계적인 자동차 업체들과 실질적인 납품 계약을 맺고 대량생산 체제에 돌입한 업체는 LG화학이 유일하다.

홍기준 한화케미칼 사장은 태양광을 미래 신수종 사업으로 택했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이 홍 사장에게 내린 임무는 ‘세계 1등 업체 만들기’. 2020년 까지 태양광 사업부분에서 세계 1등 제품, 세계 1등 서비스를 만들라는 특명을 내렸다. 1등을 위해서라면 기존의 안정적인 사업 모델을 과감히 버려도 된다는 허락(?)도 받았다.

그래서일까. 2009년 1월 취임한 홍 사장은 2달 만에 사명을 바꿨다. 한화석유화학의 이름을 과감히 버렸다. 해외시장의 개척과 신사업 발굴 의지를 위해 한화케미칼로 교체했다. 그 결과, 한화케미칼은 지난해부터 태양광 분야에서 본격적인 성과물을 내놓고 있다. 올해는 글로벌화를 위해 오는 5월에 한화차이나를 출범시킬 예정이다.

태양광 사업 규모를 폴리실리콘-잉곳-웨이퍼-태양전지(셀)-모듈까지로 확대해 밸류체인의 수직 계열화를 구축하고, 사업을 글로벌화 시키겠다는 전략도 세웠다. 특히 태양광 모듈 부문에서 세계 4위 규모인 솔라펀파워홀딩스(현 한화솔라원)를 인수했다.

한화케미칼은 2020년까지 총 6조 원을 투자해 태양전지 및 태양모듈 생산 규모를 4GW까지 증설해 세계 1위의 태양광 업체로 도약한다는 목표를 갖고 있다.
글로벌 경제를 쥐락펴락하는 가장 요인으로는 불확실성이 꼽힌다.

김세형 기자 fax123@asia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