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共때 내정 불만 수습 위해 프로스포츠 창설… 30년 국민사랑에 ‘독립산업’ 잰걸음

온 국민을 매일매일 즐겁게 만든 대한민국 프로스포츠. 프로스포츠의 시초인 프로야구와 프로축구의 탄생 과정은 생각보다 재미있고 복잡하다.

많은 이들은 ‘3S 정책’에 맛을 들인 전두환 전 대통령이 프로스포츠 출범을 직접 나서서 진두지휘했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사실이 아니다. 설령 참모들에게 “프로스포츠를 만들어 보면 좋지 않겠느냐”고 운을 뗀 적은 있을지 모르겠지만 모든 계획을 전 대통령이 직접 챙긴 것은 아니다.

프로스포츠의 모든 골격이나 실무 계획은 참모들과 체육계 관계자들의 논의를 거쳐 정해졌다. 전 대통령은 계획안에 사인만 한 것뿐이다. 프로스포츠가 계획되던 당시의 과정은 대략 이렇다.

1981년 6월 어느 날. 롯데 실업야구단의 박영길 감독은 그룹 사무실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통화 내용을 들어보니 갑자기 앞이 캄캄해졌다. 통화 내용은 청와대에서 박 감독을 찾는다는 내용이었다. 박 감독은 “청와대에서 나를 왜 찾으시나”하며 어안이 벙벙해졌다.

박 감독이 청와대의 호출을 받은 시점은 서슬 퍼런 5공 정권의 초창기였다. 무서운 권력을 지닌 대통령이 자신을 찾는다고 하니 긴장되는 것은 당연지사. 하지만 이날 박 감독을 부른 것은 대통령이 아니었다. 당시 청와대 교육문화수석비서관이던 이상주 전 울산대 총장이 박 감독을 불렀다.

다음 날 청와대에 가보니 박 감독 외에 또 한 사람이 와 있었다. 당시 대한축구협회 회장을 맡고 있던 최순영 신동아그룹 회장이었다. 박 감독이 도착하자 이 수석이 입을 열었다.

“정부에서 국내 프로스포츠 리그를 만드는 것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국민들의 생계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이 됐기 때문에 스포츠를 통해 여가생활을 즐길 때라고 봅니다. 두 분을 모신 이유는 리그 창설을 위한 의견을 듣기 위해서입니다. 도와주십시오.”

프로스포츠라…. 이는 곧 야구와 축구에도 프로페셔널 리그, 즉 돈을 받고 경기를 뛰는 전문 직업 선수 시대가 우리나라에도 열린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 당시 해외에서 운영되던 프로스포츠 리그에는 미국의 프로야구(메이저리그)와 프로농구(NBA), 유럽 프로축구와 일본 프로야구뿐이었다.

이 수석은 박 감독에게 프로야구 창설의 조언자 역할을 부탁했다. 박 감독은 “프로야구 창설에는 전적으로 찬성한다”면서 이호헌, 이용일씨 등 야구계 인사들을 또 다른 조력자로 추천했다.


감세혜택 약속 야구가 먼저 출범

하지만 박 감독은 그 자리에서 한 가지 우려 섞인 말을 던졌다. “1982년에는 서울에서 세계야구선수권대회가 열리기 때문에 야구계의 반발이 있을 것”이라는 걱정이었다.

그러나 청와대는 한시가 급했다. 조금이라도 빨리 프로야구나 프로축구를 출범시켜야 국민들의 내정 불만을 불식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프로야구와 프로축구 출범 준비는 일부 인사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점이 등장한다. 분명 이 수석과의 자리에서는 최순영 회장도 동석했다. 풍겨지는 뉘앙스로는 축구의 리그 출발이 더 앞설 것 같았다. 육사 축구부 출신의 전두환 전 대통령은 지독한 축구광이었다. 하지만 출발은 야구가 먼저였다. 프로축구는 프로야구보다 1년 늦은 1983년에 첫 경기가 열렸다. 왜일까?

정답은 돈 때문이었다. 축구계는 “리그를 출범시키기 위해서는 정부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지만, 야구계는 “감세 혜택만 준다면 정부 지원 없이도 리그를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결국 정부에게 손을 벌리지 않은 야구계의 정성에 정부가 감동해(?) 야구 쪽에 먼저 기회를 줬다. 약속대로 프로야구단을 운영하는 기업에는 감세 등의 혜택이 주어졌다.

프로야구 출범에 대한 전두환 전 대통령의 재가는 1981년 11월 5일에 났다. 가칭 프로야구위원회는 한 달 뒤인 12월에 창립총회를 열기로 하고, 야구단을 맡을 기업들을 물색했다.

‘연고지제’ 초창기 또다른 지역 갈등

정부의 끈질긴 구애와 기업들의 자구적 노력이 합쳐져 결국 삼성, 롯데, 해태, 두산, 삼미 등 5개 민간기업과 주관방송사 형식으로 공영방송 MBC가 프로야구에 참여하게 됐다.

프로스포츠 출범 과정에서 가장 뜨거운 감자 중의 하나는 연고지 문제였다. 당시 프로축구는 연고지 정착이 제대로 되지 않았지만, 프로야구는 확실한 연고지 제도를 정착시키고자 노력했다. 각 팀별 연고지는 기업의 발상지 또는 총수의 출신지를 기준으로 정하기로 했다.

삼성은 그룹 모태 ‘삼성상회’의 무대인 대구·경북을 연고지로 낙점했고, 금호, 삼양사 등 연고기업의 고사로 무주공산이 된 호남지역은 해태그룹이 깃발을 꽂았다. 정주영 회장의 현대가 올림픽 유치 활동을 이유로 거부한 인천·경기·강원지역은 삼미그룹이 맡게 됐다.

문제는 서울이었다. 정부 추진안과는 별도로 프로야구 리그 출범을 준비하던 MBC는 자신들이 유일한 서울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서울을 노리던 기업은 두산과 롯데였다. 두산의 경우 그룹 발상지가 서울 종로인데다, 오너들의 고향도 모두 서울이었다. 롯데도 서울에서 촉발된 실업야구의 인기를 연장하기 위해서는 서울을 놓칠 수 없었다.

정부는 서울을 반으로 쪼개면 되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그러자 MBC가 “서울 연고권을 분할한다면 프로야구에서 빠지겠다”며 발끈했다. 정부는 대안을 모색했다. 결국 롯데의 연고지를 부산으로 정하고, 두산은 1984년까지 3시즌 동안 대전·충청지역을 임시 연고지로 한 뒤 서울로 올라온다는 절충안을 제시했다. MBC는 이 절충안을 받아들였다.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1981년 12월 11일 서울 롯데호텔에서 한국프로야구위원회 창립총회가 열렸고, 1982년 3월 27일 동대문야구장에서 삼성라이온즈와 MBC청룡의 역사적인 개막전이 열렸다. 미국, 일본에 이어 세계 3번째로 프로야구 리그가 출범하는 순간이었다.

이만수, 유승안, 백인천 등 내로라하는 강타자들의 홈런 쇼 속에 접전을 벌인 이 경기는 연장 10회 말 이종도의 극적인 끝내기 만루 홈런에 힘입어 청룡이 11-7로 승리했다. 드라마틱한 개막전 덕에 프로야구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고, 이듬해 출발한 프로축구도 무난한 흥행 성적을 기록하며 프로스포츠 시대를 화려하게 열어 제쳤다.

한국 프로스포츠 30년 약사

농구 용병제 경기수준 업그레이드

1980년대 초반에 프로화 성공을 거둔 하계 스포츠(야구·축구)와 달리, 실내 스포츠(농구·배구)의 프로화는 비교적 늦게 진행됐다.

농구는 남자리그가 1996년, 여자리그가 1997년부터 프로 전환이 추진됐고 각각 이듬해 프로리그가 출범했다. 배구는 2004년 무렵 세미프로리그 출범이 추진됐고, 2005년부터 V리그라는 이름으로 프로배구 리그를 출범시켰다.

하계 프로 스포츠의 탄생 과정에는 정치적 의도가 숨어 있었다고 하지만, 실내 프로 스포츠는 그렇지 않았다. 정치적인 이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오로지 그 종목을 애타게 응원하는 수많은 팬들의 성화 덕에 프로리그가 출범할 수 있었다.

프로농구 출범을 준비하던 당시 농구계는 ‘농구대잔치’가 매년 겨울마다 큰 인기를 끌었다. 꽃미남 선수들의 화려한 플레이를 보기 위해 ‘오빠 부대’는 늘 체육관을 가득 메웠다. 특히 NBA와 길거리 농구 열풍이 한반도를 강타했고, 농구 소재 드라마 <마지막 승부>와 만화 <슬램덩크>가 히트를 친 것도 농구 프로화에 한 몫을 했다.

프로농구의 탄생 과정에서 가장 눈길을 끌었던 것은 외국인 용병들의 등장이었다. 용병의 등장은 NBA 스타들의 플레이에 매료됐던 팬들에게 우리나라에서도 호쾌한 덩크슛과 수준 높은 선진 농구를 직접 볼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갖게 했다.

기대감은 곧 현실이 됐다. 1997년 2월 1일 서울 올림픽공원 펜싱경기장(現 SK핸드볼경기장)에서 열린 안양 SBS스타즈와 인천 대우제우스의 프로농구 원년 개막전. 스타즈의 흑인 가드 제럴드 워커가 화려한 드리블을 선보인 뒤 고무공처럼 튀어 올라 호쾌하게 덩크슛을 꽂아 넣자 팬들은 일제히 환호했다. 비록 NBA 경력이 없는 용병들이지만 그들의 힘과 탄력은 한국의 농구 수준을 향상시켰다.

선수들 최고연봉 30년새 30배로

프로스포츠는 국가 경제의 발전 속도와 맥을 같이 했다. 특히 서울올림픽을 앞둔 1980년대 중반 두 자릿수 경제 성장을 기록하던 당시, 프로스포츠의 관중 숫자도 지속적인 상승세를 기록했다.

물가의 성장에 따라 선수들의 연봉과 경기장 입장료도 올라갔다. 1982년 프로야구 출범 당시와 지금의 우리나라의 경제 규모를 살펴보면 이해가 빨라진다.

프로야구 출범 당시 한국의 국내총생산(GDP)은 775억 달러. 서울아시안게임을 치른 1986년 1000억 달러, 1990년 2000억 달러 수준을 돌파한 GDP는 2010년 집계 기준 1조143억 달러로 치솟았다. 30년간 무려 13배가 뛰어 올랐다.

1인당 국민 소득 역시 프로야구 출범 당시 1927달러(약 140만 원)에 불과하던 것이 2010년에는 10배 이상 늘어난 2만759달러(2400만 원)로 급성장했다.

1982년 프로야구 선수들의 평균 연봉은 1215만 원이었다. 특급 선수로 분류됐던 OB베어스 투수 박철순은 평균 연봉의 두 배 수준인 2400만 원을 받았다. 30년 전 특급 선수의 척도였던 2400만 원은 프로야구에 입문하는 신인 선수들의 최저 연봉 기준으로 바뀌었다. 현재 프로스포츠 최고 연봉은 두산베어스 내야수 김동주, LG트윈스 포수 조인성 등이 받고 있는 7억 원이다. 30년 전에 비해 무려 30배 정도 상승한 것이다.

1982년 당시 야구장 내야석 입장료는 3000원이었다. 30년 뒤 입장료 가격은 얼마나 올랐을까? 잠실야구장 내야 응원석(레드지정석)의 주말 입장료는 1만2000원(평일은 1만 원). 30년 전에 비해 4배가 뛰었다.

숫자로 보는 한국 프로스포츠 진기록

4프로야구 롯데자이언츠의 투수 최동원은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 홀로 4승을 따냈다. 메이저리그와 일본 프로야구에서도 한 투수가 시리즈 승리를 책임진 사례는 없었다. 최동원의 4승이 세계 유일이다.

5여자프로농구 신한은행 에스버드는 2007년 겨울리그부터 5시즌 연속으로 리그를 제패했다. 국내 프로스포츠 사상 최다 연속 우승 기록. 이전의 기록은 프로야구 해태타이거즈의 4년 연속 한국시리즈 제패(1986~1989)였다. 배구에서 삼성화재가 9년 연속 우승을 한 적이 있지만, 이때는 프로가 아닌 실업배구 시절이었다.

18.8프로야구 삼미슈퍼스타즈는 1982년 페넌트레이스에서 15승 65패를 기록했다. 승률은 18.8%. 프로야구 사상 1시즌 최저 승률이었다. 특히 삼미는 1982년 후기 리그에서 5승 35패(승률 12.5%)를 기록했다. 다른 지역 팬들이 만세를 부를 때 삼미의 연고도시인 인천의 팬들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어야 했다.

22프로야구 SK와이번스는 2009년 8월 25일부터 9월 26일까지, 그리고 이듬해 3월 27일부터 3월 30일까지 22경기를 내리 이겨 아시아 프로야구 최다 연승 신기록을 작성했다. 특히 2009년 9월에 열린 15경기에서는 14승 1무, 승률 100%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냈다. 1982년의 인천시민이 매일 좌절을 경험했다면 2009년의 인천시민은 매일 환희를 누렸다.

32연승 기록이 있으면 연패 기록도 있는 법. 프로농구 대구 동양오리온스는 1998년 11월 25일 대구 삼성전 패배 이후 32경기를 내리 졌다. 미국 프로농구(NBA)의 당시 최다 연패 기록인 24연패 기록을 넘어선 세계 최악의 연패 기록이다.

692002년 10월19일 롯데와 한화의 경기가 열린 부산 사직야구장에는 고작 69명의 관중이 입장했다. 국내 프로스포츠 사상 최소 관중 기록. 국내 최고의 야구 열기를 자랑하는 부산과 어울리지 않는 기록이지만 사연이 있다. 2002년은 ‘꼴데(꼴찌 롯데)’ 시절이었다.

607472010년 5월5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 수많은 인파가 운집했다. FC 서울과 성남 일화의 K리그 경기를 보기 위해 6만747명의 축구 팬들이 모였다. 이날 경기의 관중 숫자는 국내 프로스포츠 사상 1경기 최다 관중 신기록이다.

5928626국내 프로스포츠 연간 누적 관중 최다 신기록은 얼마나 될까? 정답은 프로야구가 2010년 페넌트레이스에서 세운 592만8626명이다. 2010년 프로야구 페넌트레이스는 6개월간 532경기가 치러졌고, 경기장당 평균 1만1144명의 관중이 입장했다.

정백현 기자 jjeom2@asia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