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농구 애호가 많아… 빡빡한 일정 속에서도 운동장 찾아 ‘환호’

유독 한국의 기업인들은 스포츠를 좋아한다. 기업인들에게 스포츠는 무엇으로 다가올까? 어떤 이들에게는 단순한 공놀이로 치부될 수 있겠지만, 또 다른 이들에게는 자신의 꿈과 인생, 경영 전략을 빗댈 수 있는 소중한 터전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기업인들은 자신이 오랫동안 가져왔던 꿈과 목표를 스포츠를 통해 성취하는 경우가 많다. 또 어려울 때마다 스포츠를 통해 용기를 다시 얻기도 한다.

최근 프로야구 신생 9구단 창단 승인을 받은 김택진 엔씨소프트 대표는 “어려울 때마다 내게 가장 힘이 되어준 것은 야구였다”면서 “오랫동안 꿈꿔왔던 프로야구 구단주의 꿈을 이루게 되어 행복하다”고 창단 승인식에서 말한 바 있다.

우리나라의 수많은 스포츠 애호 기업인 중에는 유독 튀는 이들이 있다. 간혹 경영 성적이나 구단주의 애정만큼 스포츠단의 성적이 나오지 않는 경우도 있지만, 이들의 스포츠 사랑은 끝이 없다. 이들의 스포츠 사랑, 과연 어느 정도일까?

구본준, 경영 현안 야구에 자주 비유

대부분의 CEO들이 주로 좋아하는 운동은 야구다. CEO들이 야구를 좋아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청년 시절 미국이나 일본에서 유학 생활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야구를 자주 접했기 때문.

야구를 사랑하는 수많은 CEO 중에도 돋보이는 인물들이 있다. ‘범 LG가(家)’의 구씨 가문의 구본무·본능·본준 등 2세대 오너 3형제는 이른바 ‘군계삼학(群鷄三鶴)’이다.

LG트윈스 창단 구단주인 구본무 LG그룹 회장은 야구단에 큰 애정을 품고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창단 초기 백인천 당시 감독과 자주 독대하면서 용기를 북돋웠다. 그는 선수단에 대한 통 큰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돈 걱정 말고 열심히 뛰어달라”는 주문이었다.

그는 짬이 날 때마다 트윈스 홈경기장인 잠실야구장에서 선수들을 응원했다. 회식 자리가 생기면 선수들의 이름을 빠짐없이 호명하며 선수단을 격려할 정도로 관심이 많았다.

구본무식 구단 경영의 열매는 창단 첫 해인 1990년 페넌트레이스와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돌아왔다. 특히 한국시리즈에서는 ‘라이벌’ 삼성라이온즈에 4연승을 거뒀다.

차남 구본능 희성그룹 회장도 숨겨진 야구 마니아다. 10만 점이 넘는 야구 관련 사진자료를 갖고 있고, 그 중 800여 점을 추려 따로 책을 낼 정도로 야구에 조예가 깊다. 서울 장충동 어린이 야구장의 낙후한 모습에 마음이 아팠다는 그는 3500만 원을 야구계에 기꺼이 희사했다.

덕분에 허름했던 야구장에 최신식 전광판이 생겼다. 야구계는 구 회장의 야구사랑에 감동해 감사패와 일구회 대상을 수여했다.

삼남 구본준 LG전자 부회장은 형들의 수준을 뛰어넘었다. 현임 LG트윈스 구단주인 그에게 야구는 ‘체험형 스포츠’다. 그는 오래 전부터 사회인 야구 선수로 뛰었다. 최근에도 주말마다 50개 이상의 공을 전력투구하며 연습할 정도로 야구를 즐긴다. 특히 경기 도중 과감한 플레이를 자주 펼쳐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구 부회장의 대화 속에는 늘 야구가 숨어 있다. 특히 경영 현안을 야구에 자주 비유한다. 지난 1월 미국에서 열린 CES 2011에서도 야구 비유를 빼놓지 않았다. 그는 “야구는 미리 정해놓은 결정구가 있지만, 경영의 승리를 위한 결정구는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박용곤, 팔순 고령에도 야구장 ‘개근’

두산가(家) 박씨 형제들의 스포츠 사랑도 남다르다. 맏형 박용곤 두산그룹 명예회장은 소문난 야구광이다. OB베어스의 창단 구단주인 그는 지금도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두산베어스 잠실 홈경기에 빠지지 않고 관전한다. 그에게 야구장 방문은 일반적인 스케줄인 셈이다.

매년 봄에는 신인 선수들을 직접 만나기도 한다. 신인 선수들의 박 명예회장 접견은 두산의 오랜 전통. 김태준 두산베어스 팀장은 “회장님께서 선수들의 장점이나 기록까지 모두 꿰고 계셔서 듣는 선수들이 되레 놀란다”고 전했다.

삼남 박용성 회장은 현재 대한체육회 회장을 맡고 있다. 1986년부터 대한유도협회 회장과 대한체육회 부위원장, IOC 위원 등을 역임한 그는 국내외에서 한국 체육의 발전을 위해 일했다. 박 회장은 올 7월에 개최지가 발표되는 2018년 동계 올림픽의 평창 유치를 위해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겸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위원장과 함께 전 세계를 바쁘게 돌고 있다.

‘트위터 CEO’로 유명한 5남 박용만 ㈜두산 회장도 스포츠 마니아다. 박용곤 명예회장처럼 수시로 잠실야구장을 찾는데다 야구장에서 일어난 일들을 트위터로 중계하기도 한다. 집무실에 두산베어스 점퍼를 걸어놓고 소중히 관리하기도 한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도 소문난 스포츠 마니아다. IOC 위원 자격으로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해 불철주야 뛰고 있는 이 회장은 청년기 일본 유학 시절부터 야구에 심취했다. 그 인연으로 그는 삼성라이온즈의 창단 구단주를 맡아 구단 경영에 깊이 관여하게 됐다. 라이온즈는 이 회장의 공격적 투자 덕분에 창단 첫 해부터 강호로 자리 잡았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2007년 한국시리즈에서 SK와이번스를 응원하고 있다.


지난 4월5일 김택진 엔씨소프트 대표가 잠실야구장을 찾았다.

이건희 회장 “내가 가면 진다” 징크스

하지만 이건희 회장과 야구 사이에는 남다른 에피소드가 있다. 이 회장 개인에게는 두 번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악몽 같은 이야기다.

1984년 10월9일, 롯데자이언츠와의 한국시리즈. 3승3패로 맞선 최종 7차전에서 라이온즈는 오대석의 홈런과 에이스 김일융의 호투에 힘입어 6회 말까지 4-1로 앞서고 있었다.

이날 이 회장은 라이온즈 구단주임에도 야구장에 가지 않았다. 본인이 야구장에 갈 때마다 라이온즈가 졌기 때문이다. 팀에 방해가 될까 노심초사한 그는 TV로 경기를 봤다. 마침 라이온즈가 앞서는 모습에 자신감을 얻은 이 회장은 그제야 잠실로 향했다.

하지만 그가 잠실야구장에 입성하는 순간 악몽은 시작됐다. 7회 초 외야수 장효조의 실책으로 1점을 내줬고, 한문연의 후속타로 4-3까지 쫓겼다. 운명의 8회 초, 김용희와 김용철의 연속안타가 터지자 이 회장은 불안감을 느꼈다.

불안한 예감은 그대로 적중했다. 자이언츠의 ‘1할 타자’ 유두열에게 역전 3점 홈런을 맞은 것. 경기는 그대로 끝났다. 이 회장은 우승 트로피가 부산으로 넘어가는 비통한 순간을 눈앞에서 목격해야 했다.

이 사건 이후 야구장에서 이건희 회장을 야구장이나 체육관에서 목격했다는 소식은 거의 들리지 않는다. 대신 아들 이재용 사장이 아들과 함께 운동장을 종종 찾고 있다. 하지만 이 회장 부자의 스포츠 사랑은 아직도 계속 되고 있다. 그룹 내 스포츠단에 대한 삼성그룹의 투자 수준이 아직도 강력하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김준기 회장의 남다른 농구사랑

야구가 아닌 다른 종목에서도 기업인들의 스포츠 사랑은 돋보인다. 특히 김준기 동부그룹 회장은 애향심과 농구사랑을 접목시킨 가장 대표적 사례로 손꼽힌다.
평소에 농구를 즐겨 봤던 김 회장은 2005년 10월 TG삼보컴퓨터로부터 농구단을 인수했다.

동부 농구단이 창단되기 까지는 많은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많은 이들이 김 회장의 농구계 진출을 만류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 회장은 농구사랑의 의지 하나로 농구단 창단을 고집했다. 일부에서 제기됐던 원주 연고권 문제도 차질 없이 지켜냈다.

특히 원주 연고지 유지에는 김 회장의 애향심이 한몫 했다. 강원도 동해 출신인 김 회장은 “상대적으로 스포츠 저변이 좁은 강원도에 프로스포츠단이 반드시 필요하다”면서 “강원도 연고 기업으로서 동부가 할 일은 스포츠 사회 공헌 사업”이라고 창단 이유를 설명했다.

김 회장은 지금도 서울 원정경기는 물론 원주 홈경기까지 종종 찾을 정도로 농구단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다. 김 회장의 사랑과 관심으로 새롭게 태어난 동부프로미는 인수 후 2007~2008 시즌 통합우승을 포함해 한 시즌도 빠지지 않고 포스트시즌에 진출해 원주시민들의 자랑이 되고 있다.

정백현 기자 jjeom2@asia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