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뉴욕에 갔을 때의 일이다. 폭설로 인해 목적지인 존 F. 케네디 공항이 아닌 인근의 작은 공항에 예정보다 한 시간 일찍 내리게 됐다. 방송을 통해 상황을 들었고, 항공사 측에서는 버스로 공항까지 이동할 수 있도록 조치해줬다. 예상 밖의 상황과 5시간이 넘는 버스 이동에도 누구 하나 불만을 표시하는 승객이 없었다. 오히려 서로 격려하고 무사히 목적지까지 안내해준 운전기사에게 감사를 표시했다.
미국을 지배하는 정신을 프런티어, 흔히 개척정신이라고 이야기한다. 어려운 상황을 극복해내는 슈퍼히어로에 열광하고 동경하는 미국인들의 모습에서 가장 쉽게 볼 수 있다. 때로는 지나친 개인주의나 물질주의로 나타나 해악이 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이 사례처럼 긍정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공항에서 겪었던 필자의 경험 또한 어려운 상황을 함께 극복하고자 했던 미국인들의 지배적 정서가 많은 영향을 주었으리라 생각한다.
문화와 사상, 정신을 기반으로 한 행동양식은 ‘기업’에도 반영된다. 좋은 시스템을 갖춘 기업도 결국에는 사람이 중심이 되어 모든 것을 실행하기 때문이다. 해외진출을 계획하거나 혹은 해외 기업의 경영시스템을 수용하는 데 있어 각 나라의 문화와 민족성을 이해해야 하는 이유다.
특정 국가와 시대의 특성이 반영된 경영혁신기법은 더더욱 이러한 관점의 접근이 필요하다. 미국의 대표적 경영 혁신기법 6시그마(Six Sigma), TOC(Theory Of Constraint), SCM(Supply Chain Management)에는 그들만의 개인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방식이 담겨있다. 일본의 TPM(Total Productive Maintenance), TQC(Total Quality Control), TPS(Toyota Production System)은 사무라이 정신과 공동체를 유지하는 ‘화(和)’ 정신을 기반으로 한다. 이러한 방법론이 성공적이라고 해서 맹목적으로 수용하면 쉽게 융화되거나 정착하지 못하고 한계에 봉착하기 마련이다.
국내 화학업체 A사는 부채 비율이 780%에 이르며 위기를 맞았다. 다른 무엇보다 위기 극복이 우선이었기에 해외 선진기업들의 성공 공식과 같았던 일본의 TPM을 도입했다. 국내 기업들 사이에서 유행처럼 번졌다가 사라졌던 방법론이 A사를 일으킬 묘책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았지만, 현재 A사는 국내·외 기업이 벤치마킹할 정도의 혁신성공 모델로 성장했다.
국내 환경은 물론 A사 구조와 기업문화에 적합한 활동으로 재편한 것이 결정적인 성공 요인이었다. TPM 체계에서 공동의 성과를 꾀하되, 각 구성조직의 목표와 방향을 설정하고 성취할 수 있는 활동체계와, 직급과 관계없이 자유로운 의견 개진이 가능한 사내 제안제도를 도입한 것 등이 대표적이다. 선진 혁신 방법론의 기본과 원칙은 그대로 가져올 수 있지만, 일본만의 ‘공동체 주의’, ‘사무라이 정신’과 같이 짙게 밴 사회문화적 배경사상은 따라 할 수 없다는 정확한 판단이 있어 가능했다. 각각의 속성을 명확히 이해하고, 우리 사회와 기업문화에 적합하도록 재해석해 ‘주체적’으로 수용해야 성공적 혁신을 이룰 수 있음을 보여준다.
세상에 만병통치약이 없듯 모든 상황에 맞는 혁신기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각 기업의 역량과 특성에 따라 ‘맞춤형 혁신’이 필요한 이유다. 물론 우리 기업을 위한 혁신체계를 정립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우리의 문화와 기업 고유의 특성을 이해하고 주체적, 능동적으로 선진혁신을 받아들이는 것이 혁신 역량 향상을 위한 첫걸음이 될 수 있다. 이것이 뿌리가 되어 100년, 200년 후에도 존속할 수 있는 강한 기업들이 성장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