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nrkbeta]


화창한 봄날의 햇빛이 들어오는 넓은 응접실. 큰 테이블에 둘러앉은 십여 명의 세계적인 과학자들. 그 속에서 질문을 던지는 한 남자. “당신이 알고 있는 가장 위험한 생각. 과학적으로는 옳지만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문화적으로 옳지 않은 생각은 무엇인가요?” 그들은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커피와 음료를 기울이며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눈다.

약간은 상기된 얼굴이지만 지식을 교류하고 공유하면서 느끼는 즐거움과 환희가 가득한 공간. 열띤 토론의 과정들 하나하나가 엮여져 책에 고스란히 담긴다. 그리하여 나온 <위험한 생각들(원제: What is your dangerous mind?)>은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2007년 최고의 인문과학 저작으로 손꼽힌다. <워싱턴타임tm>지는 “선례가 없는 세계 석학들의 총집합, 생각만 해도 즐거운 지식의 향연”이라 극찬했을 정도다. 한국에서도 큰 인기를 구가하며 인문서로는 보기 드물게 장기간 종합베스트셀러의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과학자들의 심리를 편하게 해주면서 두뇌 속 창조물들을 끄집어내 생생하게 전달하는 독특한 편집 스타일을 고안한 남자는 존 브록만(John Brockman). 그는 에지재단(Edge Foundation, Inc.)의 회장이자, 웹 사이트 포럼 ‘에지(www.edge. org)’와 ‘리얼리티 클럽(The Reality Club)’의 설립자다. 리처드 도킨스, 스티븐 핑커 등 각 분야에서 선두를 달리는 세계적 석학들을 상아탑에서 끌어내 대중과 호흡하는 베스트셀러 작가로 재탄생시키는 편집자로도 정평이 나 있다.

학계와 문화계는 그를 ‘과학적 아이디어의 지휘자’ ‘지식의 지휘자’ ‘이 시대 최고의 지식 전도자’라고 평한다. 우수에 찬 듯하면서도 날카로운 눈빛에 중절모를 즐겨 쓰는 지성인. 이것만으로 브록만을 묘사할 수는 없을 게다. 그에겐 또렷한 가치관과 철학이 있었다. 그리고 범상치 않은 뭔가가 있었다. 특별할 수밖에 없는 브록만의 삶을 들여다 봤다.

석학들의 소통 마당 ‘에지’ 제공

1968년 예술홍보 전문가로 활동하던 브록만은 그룹 몽키스(Monkees) 주연의 ‘헤드(Head)’라는 영화 홍보를 맡았다. 그런데 그가 낸 홍보 아이디어가 사람들을 주목시켰다. 일체의 문구 없이 한 인간의 얼굴(head)만 찍힌 포스터였다. 포스터 주인공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었다. 과도하게 뿌려진 햇빛 속 푸른 회색빛 입술과 홍색 안경…. 멋스럽지만 어딘가 그로테스크함이 풍기고 지적인 권력을 암시하면서도 알 수 없는 듯한 표정. 특색 있는 그의 얼굴 포스터는 영화를 알리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2001년 7월 美메사추세츠주 이스트오버 농장에서 토론을 벌인 존 브록만과 ‘에지’의 세계적인 과학자들.

어느 날이었다. 제지회사에 취직한 친구가 그에게 자사 위생타월 판매부서의 사기를 진작시켜달라고 부탁해 왔다. 컨설팅 경험이 전무후무했음에도 자신만만했다. 대가로 당당히 1만5000달러를 받아내기까지 했다. 아무 경력도 없는 그가 세운 플랜은 무엇이었을까. “당시 유행하던 멀티미디어 쇼를 기획했어요. 비틀즈 노래, 새 소리, 회사 광고 슬로건, 시장 통계와 경쟁 제품에 대해 떠드는 직원 목소리를 4개의 사운드 시스템을 통해 들려줬지요. 판매원들은 임시 건축물 바닥 위에 편하게 누워 휴식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어요.” 브록만은 9개 도시를 돌면서 그 쇼를 상영했고 판매부서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그가 능력 있는 컨설턴트로서 자리매김하게 된 계기였다. 독특한 감각에 대해서는 씨앗부터 그 자질이 농후했다는 소리다.

그의 특별한 자질은 1988년 설립한 에지재단으로 이어진다. 이 재단은 세계를 움직이는 최고의 석학들이 학문적 견해와 성과를 토론하기 위해 모여드는 곳. 브록만은 크리스마스마다 대략 100명이 넘는 이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응답을 회람하는 전통을 만들었다. 이를 모아 그대로 책으로 풀어낸다. 굳이 책을 쓰기 위해 머리를 굴리고 펜을 끄적이는 것이 아니란 얘기다.

사상의 편집자이자 큐레이터인 브록만식 요령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브록만의 책들 대부분이 친구들과 고객들의 인터뷰 모음에 그들의 논평을 담은 것들이 중간 중간 소금처럼 식초처럼 새콤달콤 버무려져 있어 감칠맛이 난다.

“에지는 일종의 ‘대화 창구’입니다. 일반적으로 노출되지 않은 아이디어들이 넘쳐나죠.” <낙관적 생각들> <과학의 최전선에서 인문학을 만나다> <앞으로 50년> 등 이런 형식으로 만든 책들마다 대박을 터뜨렸다. 기발하고 다채로운 아이디어와 소통의 단면을 리얼하게 체험할 수 있는 장을 제공했다는 이유에서다.

그의 친구이자 고객인 리차드 도킨스는 “에지 웹 사이트는 과학자들과 과학에 관심이 있는 다른 지식인들을 위한 온라인 살롱으로 높은 평가를 받아왔다”며 “브록만은 다른 사람들이 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과학과 과학출판 분야를 진흥시키는 데 일조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로 인해 엘리트들이 모여 흥미 있는 주제를 가지고 토론하고 연구하는 오프라인 모임 ‘리얼리티 클럽’도 생겼다. “혼란, 거북한 것, 모순…. 이게 바로 제 삶의 가장 친한 세 친구들이예요. 항상 혼란을 즐기고 거북한 것일수록 시도해 보며 모순에 부딪쳐 보는 겁니다.”

집중력과 사람에 대한 흥미가 성공 비결

“돌고래와 LSD 환각제를 연구 중인 지인의 얘기를 들었는데 책으로 풀어내면 좋겠다는 생각이 번쩍 들더군요. 바로 출판사에 제안서를 팔았죠.” 이 일을 계기로 자신의 또 다른 관심과 재능을 발견하게 된 브록만은 새로운 사업 영역을 발굴, 출판 대리인의 길로 들어섰다. 첫 성공을 거둔 것은 퍼스널 컴퓨터가 등장하기 시작한 1980년대 초반 무렵. 트렌드에 맞는 소프트웨어 설명에 관한 책을 출판해 재미를 본 것. 이후에도 관련 분야의 전문가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책을 내면서 자리를 잡아갔다.

브록만의 스타일 중 또 주목되는 점은 모든 거래를 빨리 마무리 짓는 것이었다. 주의력을 집중하는 시간도 30분을 넘지 않는다. 한 마디로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는 셈이다. 그를 가까이서 지켜 본 한 작가는 “제안서가 두 장이 넘지 않는 것을 좋아하고 그걸로 곧장 경매에 뛰어드는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보스톤 꽃 도매 시장의 중개인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수천송이의 꽃들을 살릴지 시들게 할지는 네 손에 달렸다고 말씀하셨어요. 당장 팔지 않으면 꽃을 죽일 수밖에 없다고 강조하셨죠. 40여년이 지난 지금도 아버지 목소리가 생생해요. 왜 제가 한 거래를 재빨리 끝내는 데 집중하고 다음 책을 준비하는지 아시겠죠? 제가 팔아야 할 판권을 가진 고객을 위한 최선의 노력이거든요. 이것이 제 출판사업의 핵심입니다.”

그의 사업적 성공과 창의력의 비결은 무엇인지 물었다. “스스로를 끊임없이 계발하는 노력입니다. 언젠가 ‘포스트-인터레스팅(post-interesting)’의 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어요. 사람 자체에 대해 항상 흥미를 느끼는 것 또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일입니다.”

그는 흥미로운 아이디어를 평가하는 날카로운 시선을 갖고 있는 것은 물론 그 아이디어를 사회와 어울리게 하는 방법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일찍이 예술과 과학에 눈을 떴고 그 아이디어에 매혹돼 지금까지 달려오게 됐다.

움직이는 모든 것을 쫓아다니고 가만히 있는 것에는 관심이 없으며 틀에 갇혀 있으면 지루해 하는 사람이 바로 브록만이었다. 그를 만나는 사람들마다 감탄과 즐거움을 고백하는 이유다. “단순히 무엇을 알고 있는 사람이 지식인이 아니에요. 진정한 지식인은 자신이 속한 세대에서 사상을 만들어내는 역할을 하죠. 종합, 홍보, 소통에 통달한 지식인. 제가 지향하는 모습이예요.”

전희진 기자 hsmile@asia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