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닌텐도 같은 게임기를 개발할 수 없는가.” 이명박 전 대통령이 남긴 유명한 발언이다. 지난 2009년 과천 정부청사에서 열린 비상경제대책회의에서 그랬다. 지식경제부 직원은 “우리가 따라가는 것은 일본 이상이고 게임 소프트웨어도 잘하는데,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를 결합한 창조적 제품을 개발하는 데는 일본이 앞서가는 면이 있다"고 답했다. 이에 이 대통령은 ”닌텐도 같은 게임기 개발에 만전을 기해달라“고 주문했다. 국산 닌텐도를 만들어 일본에 수출하자고도 했다.

‘명텐도’ 패러디물은 이때 등장했다. 명텐도는 이명박과 닌텐도의 합성어다. 여론은 패러디물에는 열광했지만 명텐도 발언 자체에는 냉소했다. 명텐도 개발이 한국 실정에 쉽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따라서 패러디물은 이 대통령의 현실감각 부재를 조롱하기 위한 것이었다. 일본‧북미 등 게임기 시장을 기반으로 게임산업을 키운 국가들과 달리 온라인 게임 기반으로 성장한 국내 게임업계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즉흥적인 발언이었다는 비판이 따랐다. 또 게임기 소프트웨어 생태계가 빈약한 한국 시장에서 무작정 디바이스만 만든다고 ‘한국판 닌텐도’가 탄생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아울러 “왜 한국에선 닌텐도가 탄생할 수 없는가?”와 같은 질문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이어졌다. 창의성을 억누르는 사회 풍토‧교육 환경 등까지 반성적 성찰의 대상이 됐다.

 

명텐도 실사판 등장

“국산 게임기? 벌써 있는데?”라는 지적도 있었다. 그렇다. 그것도 이미 8년 전에 휴대용 게임기 시장을 개척한 국내 업체가 이미 존재했다. 게임파크 홀딩스(GPH)가 그 주인공이다. 2001년 GPH(당시 게임파크)는 당시 휴대용 게임기 중 최고 스펙을 자랑하는 GP32를 출시했다. 2005년 11월엔 GP2X F-100을, 2년 뒤 GP2X F-200을 내놨다. GP2X는 ‘깜빡이’라는 어학 기능이 인기를 끌면서 어학기로 더 알려진 제품이다.

GPH는 기회를 노렸다. 명텐도 이슈를 놓치지 않았다. 이범홍 GPH 대표는 한 매체와 인터뷰에서 “국내 게임기 시장이 3000억원 규모로 성장했으나 국산 게임기 비중은 0.1%에 불과하다. 새롭게 출시할 예정인 GP2X 위즈로 국산 게임기 비중을 높이고 더 나아가 세계 시장까지 공략하겠다”고 말했다. GPH는 이 대통령 발언 이후 반년을 채 넘기지 않고 GP2X 위즈를 출시했다. GP2X 위즈는 곧바로 명텐도라 불렸다. 명텐도 이슈를 선점한 셈이다.

▲ 출처=GPH

성과는 대단하지 않았다. GPH는 차세대 기종에 집중했다. 그로부터 1년 뒤 카누(CAANOO)가 공개됐다. 이범홍 대표는 카누 발표 현장에서 피겨스케이팅 국가대표 김연아 선수와 스키점프 국가대표 강칠구 선수의 사진을 보여줬다. 그러면서 말했다. “둘 다 자랑스러운 국가대표다. 카누 역시 우리나라 게임산업을 대표하는 국가대표가 되고 싶다.”

카누는 멀티미디어 기능이 특화된 게임기다. 오픈 플랫폼이라는 비장의 무기도 장착했다. GPH는 소니‧닌텐도와 달리 플랫폼 홀더의 모든 권한을 개발자에게 위임하는 전략을 내세웠다. 소프트웨어 생태계를 가꾸겠다는 계산이 깔린 것이다. 카누에 와이파이 기능을 탑재해 네트워크 플레이도 가능하게 만들었다.

 

말뿐인 정부, 그리고 폐업 처리

지난 2013년 3월 23일 GPH는 폐업 처리됐다. 카누가 성공했다면 결말은 달랐을 것이다. 생태계 부재는 GPH의 고질적인 문제였다. 첫 게임기인 GP32는 판매가 중단될 때까지 정식 상용 게임이 20개를 넘지 않았다. 차후 개발된 기종도 같은 문제를 풀지 못했다. 명텐도 이슈에도 GP2X 위즈를 위한 전문 게임 개발사는 나타나지 않았다. 카누를 출시하면서는 오픈 라이선스 정책이라는 승부수를 던졌지만 역부족이었다. 당장 시장성이 낮다는 이유 때문에 게임 개발에 참여한 업체는 거의 없었다.

이 대통령 발언 이후 정책적 지원이 있을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했지만 GPH는 수혜자가 되지 못했다. 한 게임업계 관계자는 당시를 회고하며 “참 이상했던 게 그간 대통령이 발언하면 일사천리로 일이 추진돼왔는데 명텐도의 경우 말뿐이었지 정책적 진전이 없었다”고 말했다. GPH는 문화관광체육부에서 진행하는 ‘가치사슬 프로젝트’에 참여해 개발비 일부를 지원받은 게 정부에서 지원받은 전부다.

이재홍 한국게임학회장은 “국내 게임산업에 콘솔 게임기 분야는 전무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당시 이 대통령 말이 나왔을 때 콘솔‧비디오게임 분야 지원이 확대될 것으로 기대했다. 역시나 말뿐이었다. 구체적인 정책안은 없이 즉흥적으로 나온 말이었다. 그 뒤 규제만 더 나왔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이후 이 대통령은 여러 분야에서 바람을 잡았다. 지난 2011년 제56차 라디오‧인터넷 연설을 통해 한국판 마크 주커버그가 나올 환경을 만들겠다고 했지만 이 말을 신뢰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여론이 명텐도의 결말을 기억했기 때문이다.

정부에 대한 믿음도 사그라들었다. 정부는 iOS와 안드로이드에 대적하는 오픈소스 운영체제(OS)를 제작하겠다고 발표했다. 같은 해 최중경 지식경제부 장관은 “오늘 우리는 오픈소스 OS 제작을 발표한다”면서 “구글 안드로이드, 애플 iOS 등 세계의 OS를 보고 우리 IT 강국인 대한민국도 가만있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아무도 곧이곧대로 듣지 않았다.

 

명텐도 이후 어디로 가야 하나

여기까지 다 옛날이야기다. 아직도 게임산업이 어렵다고들 하는데 국내 게임기 시장은 더 나쁘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여전히 명텐도가 필요한 걸까. 게임기 육성 정책은 반드시 추진돼야 할 국정과제일까, 여전히? 업계 관계자들은 문제는 타이밍인데 골든타임이 지났다고들 한다. 이제 더 이상 게임기 사업 지원은 필요 없다고 선을 긋는다.

최근엔 게임기라는 디바이스 자체가 멸종 위기에 빠졌다는 지적이 나온다. 특히 휴대용 게임기의 경우 지난 2009년 보급된 스마트폰에 자리를 빼앗겼다. 닌텐도조차 변신을 꾀하고 있다. 그간 지켜온 자존심을 버리고 최근 모바일 게임 사업을 시작했다. 이제 문제는 게임기가 아니라고들 한다. 지원 정책은 소멸 위기에 놓인 플랫폼인 게임기가 아니라 다른 방향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지적이 이어진다.

어찌 보면 이 대통령의 닌텐도 발언은 한 국가의 수장이 나서서 산업 후발주자가 되라고 말한 격이다. “왜 닌텐도를 따라가지 못하는가. 지금이라도 추격하라”는 이야기다. 전문가들은 뒤따라가는 것보다 새로운 분야에 대한 전략적 지원을 통해 글로벌 게임사의 위협에 대처하는 방안을 마련하는 게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이재홍 학회장은 게임산업 진흥책이 나아가야 할 한 방향을 제시했다. “현 시점에서 온라인 게임은 죽었고, 시장의 흐름은 모바일로 가고 있다. 그런데 모바일 역시 중국의 파워가 장난이 아니다. 중국 게임산업은 양적‧질적으로 급성장했다. 이들의 성장세로 보면 한국 게임업계가 중국의 하부조직으로 들어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콘솔 게임기는 원래 우리가 취약한 분야였다. 우리가 앞으로 기대를 걸 수 있는 분야는 아케이드라고 생각한다. 아케이드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접점이 될 것이다. 사물인터넷, 게이미피케이션(Gamification), 가상현실, 로봇, 드론 등이 아케이드와 접목될 수 있다. 음성화돼 있는 아케이드 분야를 정부가 재조명해서 키워나간다면 의외의 탈출구가 열릴 수 있다. 틈새를 통해 과거 온라인 게임으로 누리던 패권 이후 새로운 패권을 차지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