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자식이 상팔자야!’

속 썩이는 아이들을 둔 부모의 푸념이다. 하지만 자식을 둔 부모가 진짜로 ‘자식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절대 생각할 리 없다. 자식을 낳아 키우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생물학적 의무일 뿐만 아니라, 자식을 키우며 얻는 즐거움이 다른 어떤 것과 비교해도 결코 뒤지지 않기 때문이다. 배냇짓을 할 때, 몸을 뒤집을 때, 정말 신기하고 사랑스럽다. 걸음마 시작이며, 학교에 입학할 때, 부모는 자식보다 더 뿌듯해진다. 미우나 고우나 장성을 해도 ‘내 새끼, 내 새끼’하며 애정을 쏟게 되는 이유다. 그러다보니, 자식도 없으면서 ‘무자식이 상팔자야!’라고 외치는 친구들에게는, ‘네가 아직 아이 키우는 재미를 몰라서 그래!’라며 면박을 주기도 한다.

양육 스트레스의 ‘놀라운 데이터’

요즘은 젊은 사람들은 어떨까? ‘무자식이 상팔자’ 또는 ‘유자식은 생고생’이라고 예상하고 있는 듯하다. 안타깝게도 이 슬픈 예상은 틀리지 않을 듯싶다. 반드시 먹고 살기 힘든 문제만은 아니다. 출산을 해도, 양육의 스트레스가 만만치 않다. 필자가 전문가 패널로 매주 출연중인 EBS(한국교육방송공사)의 <놀라운 데이터>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화요일 아침 주부들을 대상으로 빅데이터를 통해 시대의 트렌드를 분석하고 공감을 찾아보는 재미있는 프로그램이다. 몇 주 전 ‘스트레스 유발자’라는 흥미로운 주제를 다루었다. 살아가는 동안 늘 달고 살아야만 하는 것이 스트레스지만, 특히 스트레스를 많이 일으키는 원인 중 가장 비중이 큰 것이 바로 ‘가족’이라는 내용이다. 가족이 스트레스를 많이 준다는 것은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가장 가까운 사이니 가장 신뢰를 할 것이고, 나를 내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은 사회적 경계를 풀어놓기 때문일 것이다. 경계와 방어가 풀리니 스트레스를 주는 쪽이나 받는 쪽이나 사회적 상황보다 더 큰 상처를 받을 수 있다.

누가 더 큰 스트레스가 될까? 가족 중 배우자와 배우자의 원가족(시댁 또는 처가)이 가장 큰 스트레스 유발자라는 것은 어느 정도 예상했다. 하지만 자녀가 두 번째를 차지한 것에는 놀라움을 넘어 약간 충격을 받을 만도 했다.

부모들이 느끼는 자녀로부터 받는 가장 큰 스트레스는 역시 ‘학업’이었다. 자녀의 학업 성취 수준이 부모의 능력이나 교육열의 결과로 비추어지기 쉬우니, 아이가 성적이 떨어지면 부모의 기가 죽는다. 그래서 아이가 공부에 전념하도록 타이르고 혼도 내 보지만, 아이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다. 혼을 내는 것도 스트레스인데 반발까지 심하면, 흔히 하는 이야기처럼 ‘뚜껑이 열린다.’ 또한 사춘기의 반항 역시 부모의 스트레스를 배가시킨다. 질풍노도의 시기에 반항을 하는 것은 아이들이 못되어서는 아니다. 아직 뇌가 덜 발달한 아이들은 부모가 느낄 감정이 무엇인지 정확히 인식하지 못한다. 그러니 부모 마음이 찢어질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것이다. 더불어 충동 조절이 잘 안되니, 별 것도 아닌 일에 화를 내고 끝장을 보자고 덤비기 일쑤다. 부모 입장에서 보자면 내 속으로 낳은 새끼지만 정말 남보다 더 멀게 느껴진다.

행복에 관한 자녀의 냉정한 진실

가족은 행복의 시작이다. 결혼은 대부분의 행복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조건 중의 하나라고 했다. 그렇다면 자녀는 어떨까? 자녀와 행복과의 관계는 U자 모양의 그래프이다. 아이가 태어나면 부모의 행복은 급격히 증가한다. 2살 무렵이 되면 행복은 최고조에 다란다. 그러나 학교에 입학 무렵부터는 행복이 줄어들기 시작하다가, 급기야 사춘기가 되면 바닥을 친다. 다행히 아이들이 성인이 될 무렵 행복은 다시 복원된다.

그렇다면 자녀가 있는 부모와 자녀가 없는 부모의 행복도는 차이가 날까? 연구마다, 시기와 국가마다 결과가 너무 다르다. 동양의 경우에는 자녀의 존재 자체가 행복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서양의 경우는 별반 차이가 없다. 스트레스 생활 사건 연구를 통해, 이 같은 동서양의 차이를 추정해볼 수 있다. 서양인들이 가장 스트레스를 받는 생활사건은 배우자의 죽음이지만, 동양인의 경우에는 자녀의 죽음이 가장 큰 스트레스 사건이다. 스트레스와 행복의 연관성을 염두에 둔다면, 동서양의 가치관 차이 때문에 자녀 유무에 따른 행복에 차이가 난다고 할 수 있다.

아직 결론을 내리기는 이르지만, 냉정하게 보자면 자식이 부모의 삶 전체에 걸친 행복에 주는 영향은 그리 크지 않은 것 같다. 영·유아기의 높아지는 행복감은 진화론적 산물이다. 아이가 생존하는 데 부모의 행복이 크게 긍정적으로 기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시기 이후 전체적인 삶에서 자녀가 있다고 반드시 더 행복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끝까지 불행을 유발하는 것도 아니다. 사춘기 시절에는 꼴 보기도 싫은 녀석이지만, 제법 철들고 의젓해지면, 부모 고마운 줄도 안다. 자기 짝을 찾아 집을 떠나면, 상실감마저 들 정도로 중요한 애정의 대상이기도 하다. 물론 최근에는 이혼을 하고 다시 컴백홈을 하거나, 손자를 돌보아달라고 양육의 의무를 전가하는 자식 때문에 노년 불행의 원흉으로 지목되기도 하지만 말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의 들꽃처럼

정리하자면 ‘반드시 자녀가 행복의 조건은 아니다’라는 냉정한 현실을 바라보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굳이 자녀를 낳을 필요가 없는 것일까?

2014년 필자는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800킬로를 완주했다. 평생 잘 한 일 중의 하나라고 자부한다. 이 길을 걸으며 많은 깨달음이 있었지만, 아무도 없던 언덕에서 만난 이름 모를 아름다운 들꽃 또한 인생의 깊은 깨달음을 주었다.

들꽃은 지친 순례자들의 마음을 위로해준다. 일부러 누군가 심어 놓은 것이 아니다. 그저 어느 날 그 장소에 자리 잡은 과거의 들꽃이 존재했을 뿐이다. 문득 들꽃의 부모를 생각하게 되었다. 들꽃 부모는 그저 종족 유지를 위해 씨를 만들어내고 벌판에 뿌렸을 것이다. 어떤 역할이나 임무를 부여하지 않고 그저 스스로 번식하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어린 들꽃들은 지친 순례자의 마음을 따뜻하게 감싸주는 역할을 훌륭히 해낸다. 어쩌면 순례자에게는 음식이나 잠만큼이나 소중한 위로의 치유자가 된 것이다.

아이들 생각이 났다. 무엇이 되었으면, 어떻게 되었으면 하고 바란 적이 있었다. 어느 부모가 그런 욕심이 없을까. 하지만 들꽃의 가르침으로 깨달은 것이 있다면, 아이들에게는 그저 지금처럼 그들이 가는 길을 걸어주기만을 바래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바라는 것과 상관없이 그들은 소중한 자신들의 임무를 다하며 살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내 유전자의 반을 지닌 채 말이다.

자식이 행복이 조건일까? 아니다. 자식은 행복의 조건 그 이상이다. 살아남아야 행복을 이야기할 수 있으니 생존이란 것은 행복 이상의 가치가 있듯이, 자식은 그 어떤 행복보다도 높은 곳에 있는 가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