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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의 보복 땐 숨은 상처 덧난다” 이유 있는 항변들

“시장(자유)경제 원칙은 지켜야한다(2009년 10월).” “정부 부처가 물가 억제에 나섰으면 좋겠다(2011년 1월).” 이명박 대통령이 달라졌다. 재임 기간 3년, 횟수론 4년 만이다. 대선 시절부터 신자유주의를 바탕으로 한 MB노믹스를 강조했던 그다.

치솟는 물가를 이대로 놔둬선 안 된다는 우려에서 나온 단호한 대책일까, 고도의 정치적 계산이 깔린 행동일까. 정확히 의도를 파악하긴 힘들다. 분위기만 놓고 봤을 땐 물가 안정을 위한 정부의 시장 개입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듯하다. 각 부처 장관과 공정위원장까지 나서 비싼 기름값, 통신비 인하를 요구하고 나섰다.

“통신·정유사는 지난해 독점이익으로 8조 원을 거뒀다.” “독점적 사업구조 업계의 적정가를 산정해보도록 하겠다.”갑작스런 정부의 강한 압박에 정유·통신업계는 전전긍긍이다. 유통업계도 마찬가지다. 살아있는 권력의 날선 공격을 방어하는 게 녹록치 않다. 정부와 대기업의 물가 공방에 중견·중소기업은 스러질지 모른다는 지적도 있다. MB가 변심한 이유는 뭘까.

2008년 2월 25일 오전 11시. 이명박 대통령의 취임식이 열렸다. 취임사를 통해 “경제를 살리겠다”고 강조했다. 경제 대통령이란 슬로건을 내세워 유권자의 표심을 이끌지 않았던가. 취임 이후 신자유주의를 근간으로 한 MB노믹스는 규제 완화와 감세 등 대기업 위주의 정책을 실현시켰다. 출자총액제한도 풀었다.

대기업의 자유로운 경제 활동을 보장해 줄 테니 많은 투자를 통해 경기를 회복시키라는 거다. 그 결과 지난해 국내 경제성장률은 6.1%. 2002년 이후 8년 만에 최고를 기록했다. 기업이 정책 변화에 화답한 결과다. 전경련에 따르면 2010년 30대 기업 투자 집계액은 100조8000억 원. 2009년 72조1000억 원보다 28조7000억 원이 늘었다.

2008년 92조8000억 원보다도 10조가 많다. 올해엔 사상 최대 규모인 113조2000억 원의 투자를 할 계획이라고 한다. 경제연구소가 예상하는 올해 경제성장률은 4∼5%. 글로벌 금융 위기를 겪은 나라치곤 빠른 회복세다. 정부의 시장 중심의 경제정책과 기업의 투자 확대는 국가 경제 성장이란 달콤한 과실로 이어진 셈이다.



비싼 기름, 통신비…누구 말이 맞나

그렇게 취임 3년, 횟수론 4년 후. MB와 대기업 사이엔 이상기류가 흐르고 있다. 한 마디로 ‘위기 상황’이다. 정확히 말하면 지난해 중순부터 이 같은 분위기는 감지됐다. 정부가 중소기업 상생을 내세워 대기업을 압박하더니, 이번엔 물가 안정을 들어 압박 강도를 높였다. 경제 성장세가 나타나고 있지만 서민, 중소기업의 체감 기온은 아직 낮다는 게 이유다. 사상 최대 실적을 갱신한 대기업과는 전혀 딴판이었기 때문이다.

투자로 발생된 이익의 재투자가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는 지적도 했다. 지난해 7월 최경환 지식경제부 장관은 “대기업이 쌓아둔 현금이 은행보다 많다”고 꼬집었다. 각종 규제를 풀어 투자를 활성화 하라고 했더니, 재투자에 나서지 않았음을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지난해 정부가 대기업을 향해 ‘중소기업과 상생’ 등을 강조했던 이유다.

최근 불거진 정부의 물가 개입 문제도 여기에 맥을 같이 한다. 정부가 개입하기 시작한 분야는 정유·통신·유통업계다. 모두 독점적 사업구조를 갖고 막대한 이익을 올리는 업체들이다. 임종룡 기획재정부 차관은 지난 16일 ‘휘발유 가격 국제 비교와 통신관련 자료‘를 내놓으며 “기름값이 다른 나라보다 빠르게 증가하고 했고, 통신비는 과다한 마케팅비 지출 논란에 빠져 있다”고 말했다. 또 “가격 적정성을 따져 보겠다”고 강조했다. 원가를 따져 그동안 발생했던 가격 거품을 모두 빼내겠다는 것이다.

해당 업계도 할 말은 많다. 가격 상승의 요인이 내부에 있는 게 아니라 외부에 있다고 말한다. 익명을 요구한 정유업계 관계자는 “비싼 기름값은 국제 원유값 상승에 기인한다”며 하소연했다. 그는 또 “유류세, 관세, 석유세, 수송비 등을 제하면 석유 1ℓ를 팔았을 때 이익은 9원 정도”라고 말했다. 정부가 말했던 비싼 기름값의 진실은 업계 간 가격 확대에 따른 결과가 아니라는 얘기다. 대한석유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정유사들의 3분기 석유제품 판매량은 1061억ℓ, 영업이익은 9614억 원(휘발유·경유·벙커C유 등)이다. 리터당 9.1원의 이익이 났음을 알 수 있다.

석유제품 가격은 국제시장에서 원유를 구매, 정제공장을 거쳐 싱가포르 국제시장 가격과 환율 등을 고려해 결정된다. 여기에 정유가 세전 공급가에 유류세가 붙고, 납품된 주유소의 마진 등이 붙어 소비자 가격이 정해진다. 현재 시중에서 공급되고 있는 휘발유 가격은 평균 1850원. 가격 중 세금은 대략 900원 정도다.(유류세 745원, 부가세 150∼160원) 1리터를 팔았을 때 950원이 남는다. 여기에서 원유가(싱가포르 원유 2월2일 기준)는 1배럴(159ℓ) 당 108달러로 ℓ당 750원 가량을 빼면 200원이 남는다.

원유 정제비, 수송비, 유통 비용, 지점 마진을 합한 금액이 200원이란 얘기다. 정부가 기름값에 과다한 거품이 껴있다고 보는 것은 200원에 관련된 비용이다. 임 차관은 “1월 1~3주 평균 우리나라 세전 고급 휘발유 가격은 ℓ당 1047원으로 OECD 회원국 중 조사된 22개국의 평균가격(922원/ℓ)보다 125원 비싸다”고 했다. 정유업체 4곳이 독점적 사업 지위를 이용해 3조5000억 원의 이익을 봤다고 보고 있다. 휘발유 가격이 125원 이상은 내려야 정부가 만족할 만한 수준이 된다.

정유업계는 “억울하다”는 분위기다. 유가정보 서비스인 오피넷에 수치만 놓고 봤을 땐 OECD국 중 높아 보여도 사실은 다르다고 항변한다. 오피넷에 사용되는 기준을 무시한 셈법이라고 강조한다. 업계 관계자는 “오피넷에 공개된 옥탄가 수치에 맞춰 비교를 하다 보니 고급 휘발유가 비교 대상으로 높게 보인 것 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절대 가격, 정유사 세전 공급 자체는 OECD국 중 낮은 편이고, 세금은 높은 편이다”라고 덧붙였다.

대한석유협회에 따르면 유럽의 경우 나라마다 다르긴 하지만 일반적으로 옥탄가가 95인 휘발유가 일반 휘발유로 사용된다. 고급휘발유는 옥탄가 수치가 더 높다. 국내 휘발유는 옥탄가가 91∼93은 보통, 94 이상은 고급 휘발유로 분류된다. 그렇다 보니 고급 휘발유가 비교 대상이 되고 있다는 설명이다.

“국내 고급 휘발유는 옥탄가가 103 정도로 보통 휘발유와 차이가 있어 고급승용차 등 소비계층이 적은 편으로 일반 휘발유 가격을 비교해야 하는 것이 맞다. 오피넷에 고급과 보통 모두 공개된 나라는 한국, 뉴질랜드, 일본, 캐나다인데 보통 휘발유의 옥탄가는 91∼92 수준이다. 보통 휘발유 가격을 비교했을 땐 세계 최하위는 아니더라도 평균 이하보다 낮은 편이다.”

정부가 세계적으로 휘발유 가격이 높은 편이라는 것과는 분명 차이는 있어 보인다.
통신료 인하의 요구를 받은 통신업계도 답답해하고 있다. 임 차관은 “시장지배적 사업자에 대한 현행 통신요금 인가제도가 시장경쟁 및 요금 인하를 제한할 가능성이 있고 소비자 이익을 침해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돼 통신요금 TF에서 제도 유지 필요성을 재검토하고 있다”는 입장을 업계에 전달했다. 휘발유 가격 못지않게 통신비가 높다는 지적이다.

지난해 통신사의 영업이익이 35% 증가했고, 과다한 마케팅 비용을 소비자에 전가해 수익을 얻고 있다는 것. 하지만 SK텔레콤과 KT, LG유플러스 등 통신 3사는 지난해 초 단위 과금제, 데이터 무제한 요금제, 결합상품 할인제 도입으로 1인당 통신비가 오히려 감소했다고 반박하고 있다. 스마트폰의 증가로 인한 정액제 사용자가 계속 늘어나고 있는 상황에선 더 이상 가격 인하를 하는 것은 무리라는 입장도 내세웠다.

‘가격의 반란’ 일단 잠복기로

두 업계 모두 정부의 시장 개입을 통한 가격 인하에 대한 불만은 갖고 있는 눈치다. 모두 가격 인하에 동의를 했다. 청와대의 입김이 작용된 만큼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기획재정부, 공정거래위원회 등이 나선 강력한 압박도 피하고 보자는 식이다.

4개 정유회사는 등유 가격을 일제히 내렸고, 통신업계도 통신비 인하에 노력하겠다는 의견을 정부에 전달했다. 다른 업계도 혹여 불똥이 튈 수 있다는 우려에 긴장감이 역력하다. 유통업계는 벌써부터 가격동결 정책을 내세워 물가 안정에 앞장서겠다고 자처했다. 대형 제조업체들도 원자재가 인상에 따른 가격 인상 부분을 잠시 미뤘다.

경제학자들과 재계 관계자들은 이 같은 정부의 움직임에 대해 ‘임시방편적인 대책’ ‘보여주기식’ 행정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물가 상승을 이끌고 있는 채소, 육류 등이 아닌 다른 곳에서 답을 찾고 있다고 지적한다. 최근 물가가 오르고 있는 것은 이상기온, 원자재가 상승, 원유가 상승 등에 따른 것이란 것을 근거로 내세우고 있다. 특히 물가 안정을 내세우면서 금리 인상 등의 거시적 경제정책을 펼치지 않은 점을 문제로 지적했다.

물가는 단순한 가격이 아니다. 수많은 상품이 시장에서 연계되며 만들어진 수치다. 물가 안정을 위해선 통화량, 금리, 환율, 재정 지출 등에 대한 정책적 움직임이 선행돼야 한다. 최정표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정부가 민간기업 가격 결정에 개입하는 것은 부작용이 크고 시장경제를 흔드는 일”이라고 말했다. 관리가 느슨해질 경우 임시적으로 눌렸던 물가가 가파르게 상승 할 수 있다고도 했다.

김병철 한국필립모리스 전무는 모 언론에 ‘과도한 물가 개입도 포퓰리즘이다’라는 제목의 기고를 올렸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물가 안정에 대한 충정을 십분 살핀다고 하더라도 정부가 시장경제 발전을 위한 거시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좌고우면 대신 손쉬운 정책수단을 선택한 것이 아니냐는 아쉬움을 갖게 한다…(요약)…시장에서 가격결정 주도권이 제조업체가 아닌 유통업체 즉, 대형마트·홈쇼핑·온라인판매점 등으로 넘어간 지도 오래 됐다. 가격이 내려갈지 여부도 모르는 상태에서 제조업체에 부담을 더 안기는 형국이다.”

정부와 대기업의 물가 공방에 중견·중소기업은 사라져 없어질 지 모른다는 의견이 나오는 이유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물가 인상을 대기업의 몫으로 간주하는 것은 위험하다. 무턱대고 대기업을 압박하는 식의 물가 조절은 임시방편에 불과하다. 또 중소기업이 받게 되는 부담으로 인해 향후 발생될 수 있는 것도 문제다.

치솟는 물가는 분명 잡아야 한다. 무조건 대기업을 압박한다고 해서 근본적인 물가 인상의 원인은 잡히지 않는다. 물가와 시장 상황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원자재가, 유통비, 납품단가 등의 사안이 얽힌 복잡한 구조를 띄고 있다. 어느 한쪽만 누르다 보면 다른 한쪽은 터질 수 있다. 물가 안정을 위해선 정책이 수반된 근본적인 해결 방법의 모색이 필요하다.

물가 안정과 경제 성장을 내세워 원자재가 상승 등을 무시한 채 전기요금 인상을 누른 결과 한전은 적자회사로 변했고, 세계적으로 입증 받은 원자력 기술을 갖고 있지만 해외 원자로 입찰에 실패한 것은 극단적인 예다.

한전의 눈덩이 적자, 시장 역행의 결과

한국전력의 지난해 성적은 참담하다. 2010년 매출은 39조1897억 원을 기록했지만 1조7874억 원의 적자를 냈다. 경제 성장과 물가 안정을 위해 정부 차원에서 전기요금 인상을 극도로 자제한 결과라는 게 증권가의 분석이다. 일부에선 산업전력 요금 특혜가 낳은 결과라는 말도 있다. 정부가 경제 성장을 위해 산업전력을 싼 가격에 공급하는 등 원자재가 상승을 고려하지 않아 발생했다는 것이다.

한전은 지난 2008년 3조6592억 원, 2009년 5687억 원을 기록 한 바 있다. 현재까지 누적적자 규모는 30조 원에 달하고, 부채비율도 70%를 넘어 섰다. 운영에서 부족한 부분은 세수가 투입되며 운영된다. 시장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싼 전기료를 유지한 데 따른 대가다. 한전의 전기료는 전력생산 적정원가의 93%정도. 밑지고 전기를 팔고 있다는 얘기다.

지난 10년 사이 국제유가는 200%가량 뛰었지만 전기료 인상 폭은 12%에 그쳤다. 시장 가격은 시장 상황이 반영돼야 한다. 한전의 전기료는 정부의 입김에 눌려 인상을 자제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지식경제부는 이 같은 점을 고려, 2분기 중 전기료 인상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전의 눈덩이 적자, 시장 역행의 결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