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속되는 중동 불안에도 불구하고 국제 유가는 이전과 같은 강한 상승세를 보이지 않는다. 마치 평화의 시대가 온 것처럼 유가는 비교적 낮은 수준에서 안정적인 흐름을 유지하고 있다. 이는 미국의 원유 생산증가로 인한 공급능력 확대가 가장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결국 미국은 과거 금본위제도를 통해 달러의 시장지배력을 굳힌 것처럼 에너지의 중심인 원유 통제력을 발휘해 달러의 위상을 재차 높일 것으로 관측된다. 현재 미국의 모습이 과거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의 미국과 유사해 보이는 이유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당시, 유럽의 강대국들은 전쟁 피해를 우려해 자국이 보유한 금을 모두 미국에 맡기고 전쟁비용 자금마련을 위해 막대한 자금을 찍어냈다. 미국은 막대한 금 보유량을 무기로 1944년 ‘브레튼우즈 체제’를 출범시킨다. 금을 담보로 한 미국 달러의 기축통화시대가 열린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60년대까지 미국은 원유 수출국이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금본위제도 하에서 유가는 낮은 수준에서 장기 안정세를 유지했으며 세븐시스터즈(7 Sisters)라 불리는 서방의 메이저 석유업체들이 글로벌 석유시장을 지배하던 시대였다.

오일 쇼크와 미국 에너지 정책의 변화, 영광의 시대로의 귀환

하지만 미국은 베트남 전쟁(1960~1975년)등으로 인해 국제수지 적자가 발생하기 시작한다. 전비조달을 위해 막대한 자금을 쏟아낸 미국은 달러 가치의 급락과 함께 인플레이션을 경험했다. 당시 달러 가치 하락에 위협을 느낀 일부 국가들이 미국 중앙은행에 달러를 들고 와 금으로 교환해줄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1971년 미국 닉슨 대통령은 금태환 정지를 선언했고 브레튼우즈 체제는 막을 내리게 된다.

금본위제도인 ‘브레튼우즈 체제’가 폐지된 이후 변동환율제가 도입되면서 달러의 변동성은 확대됐다. 1973년 중동전쟁이 일어나자 석유수출국기구(OPEC)는 석유를 정치적 무기로 사용할 것을 선언했다. 이 사건이 바로 ‘1차 오일 쇼크’다. 공급 부족에 기인한 유가 급등이 발생하고 소비대국인 미국은 유가 급등으로 인해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은 외교문제에 있어서 에너지 보안을 최우선 과제로 뒀다.

이러한 인식 속에 미국은 1975년 ‘에너지정책 보호법’을 제정하고 원유수출을 제한했으며 같은 해 사우디아라비아로부터 그들의 석유를 달러로만 결제해 수출한다는 약속도 받았다. 그 결과 OPEC은 국제 석유 자본이 독점하고 있던 원유 가격의 결정권을 장악했다.

이후 1979년 대산유국인 이란에서 혁명이 발생해 석유 수출이 하루 500만배럴에서 200만배럴로 급격히 감소한다. 정세불안이 원유의 공급 감소로 이어져 유가가 급등한 ‘2차 오일 쇼크’로 이어진 것이다.

미국은 ‘에너지정책 보호법’으로 원유 수출이 제한된 만큼 중동지역 전쟁 등으로 인한 정세 불안은 유가를 급등시키는 가장 큰 요인으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최근 상황은 달라졌다. 지난해 이슬람 국가(IS)의 탄생, 이라크와 시리아에서 미국과 대치하는 상황이 지속되는 등 중동 지역의 정세 불안에도 불구하고 국제 유가는 이전과 같이 급등하지 않는다. 그 배경에는 ‘셰일혁명’이 자리 잡고 있다.

'셰일혁명'을 등에 업은 미국은 지난 2014년 6월 초경질유 수출을 제한적으로 허용했다. 40년 만에 미국의 원유 수출 빗장이 일부 풀린 것이다. 이는 1950~60년대 미국이 원유를 수출하는 시대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즉 강력한 달러를 통해 에너지를 지배하는 영광의 시대를 말한다.

2001년 9월 11일 ‘9·11 테러사건’이 발생했다. 이듬해 미국은 이라크·이란·북한 등을 악의 축으로 규정했다. 미국은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WMD)’ 제거를 명분으로 2003년 영국·오스트레일리아 등 동맹국과 함께 이라크를 침공했다. 전쟁 발발 후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사실상 전쟁은 끝났지만 미군은 이보다 훨씬 시간이 흐른 2011년 12월에 이라크에서 철수했다.

2012년에는 ‘셰일혁명’이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시점이었다. 미군의 이라크 철수와 ‘셰일혁명’의 묘한 인연이 맞닿은 시기에 국제 유가가 상승세를 멈췄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라크 전쟁 발발 전 배럴당 20달러에 불과했던 국제 유가는 이후 2012년까지 100달러가 넘는 고공행진이 지속됐다. 하지만 현재는 두바이유 기준 50달러를 소폭 상회하는 수준이다. 여전히 IS로 인해 중동의 정세가 불안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를 해석할 수 있는 부분은 분명 국제 원유시장의 공급적 측면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공급은 ‘셰일혁명’을 통해 미국이 이뤄냈다. 70년대 오일 쇼크로 골머리를 앓았던 미국이 40여년만에 원유의 가격 결정권을 가진 셈이다. 이는 미국이 원유의 가격 결정권을 쥔 만큼 기축통화인 달러의 시장 지배력은 더욱 견고해짐을 뜻한다.

원유, ‘뉴브레튼우즈 체제의 담보’… 지표는 과거로 가고 있다

이러한 정황은 지표에서도 나타난다. 국제금융센터에 따르면 지난 1950~60년대 말까지 유가와 달러의 상관계수는 -0.62로 나타났다. 상관계수란 두 변수의 관계를 표시하는 것으로 -1에 가까울수록 두 변수의 관계는 반비례, 0에 근접할 경우 관계가 없으며 1에 다가갈수록 비례 관계임을 나타낸다. 따라서 미국이 원유 수출은 물론 금본위 제도를 통한 달러 지배력을 공고히 하던 시대에 유가와 달러의 상관계수가 마이너스를 보였다는 것은 두 변수가 서로 반비례 관계라는 것이다. 하지만 1971~84년까지 유가와 달러의 상관관계는 -0.18로 나타나 두 변수의 관계가 무의미해졌다. 이 시기는 1, 2차 오일 쇼크가 발생하고 1985년 ‘플라자합의’가 이뤄지기 직전까지의 기간이다. 이 기간 동안 미국은 재정적자와 무역적자가 동시에 발생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그만큼 달러가 원유에 영향력을 미칠 수 없었다는 뜻이다.

‘플라자합의’로 달러는 장기 약세 국면에 돌입했으며 1990년대 들어 미국 경제는 제조업체들의 높아진 가격경쟁력에 힘입어 회복세를 보였다. 플라자합의 이후 1998년까지(90년 걸프전, 97년 아시아 외환 위기에는 유가와 달러가 음의 상관관계를 보임)유가와 달러의 상관관계는 +0.44로 나타나 그 움직임이 비례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통화와 상품 가치의 관계가 반비례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례적인 일이다.

 

‘플라자합의’의 후 같은 해 OPEC회원국들은 고정유가제를 폐지하고 원유의 경쟁적 생산 및 시장점유율 확대정책을 취함으로써 유가도 동반 하락해 두 변수가 양의 상관관계를 보인 것이다. 이에 미국은 ‘저유가, 약달러’에 힘입어 제조업을 기반으로 한 수출로 경제의 불씨가 살아난다. 이후 달러 약세는 1995년 선진 7개국 재무장관 회담에서 비공식 체결된 ‘역(逆)플라자합의’로 막을 내린다. 달러 약세에도 불구하고 경상수지 적자가 축소되지 않는 현상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그 이면에는 무리한 달러 가치의 하락이 세계 경제 안정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선진국들의 인식이 깔려 있었다.

시간이 흘러 2003년 이라크 전쟁 발발 후 2004년 1월부터 2014년 11월까지 상관계수는 -0.65로 나타나 다시 두 변수가 지난 1950~60년대와 유사한 움직임을 보였다. 1987년 1월부터 2014년 11월 유가와 달러 간 상관계수가 -0.24를 기록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유가와 달러의 반비례 관계는 더욱 강해진 상황이다. 유가 수준이 달러 가치에 영향을 미치는 것보다 역으로 달러 가치가 유가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것을 고려하면 유가와 달러 상관계수의 변화는 달러의 시장 영향력이 확대됐음을 의미한다.

금융위기 이후 미국이 막대한 양의 달러를 풀자 유가는 지속 상승해 지난 2012년 정점을 찍었다. 공교롭게도 미군의 이라크 철수 후 2012년 ‘셰일혁명’이 그 자리를 대신하면서 원유는 좀처럼 힘을 쓰지 못했다. 중동 지역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지만 유가와 달러 가치의 결정권을 미국이 동시에 쥐었다는 점에서 국제 원유 시장은 전쟁이 끝난 것처럼 반응하고 있는 것으로 관측된다. ‘제2차 세계대전’ 종식 후 브레튼우즈 체제의 ‘승전국 미국’이 오버랩되는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