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빗소리가 타닥이는 버스에 앉아 하늘을 보는 소녀가 있다. 좋은 직장, 좋은 인생을 위해 달려가는 한 소녀가 있었다. 어둑한 하늘에서 누구도 보지 못했던 길을 더듬던 소녀는 갈라지는 빗방울을 바라보며 눈을 감았다. 정해진 길을 따라가야 하는 운명에서 아주 조금 흔들리는 소녀가 있었다.

여기, 하늘을 보는 소녀가 있다. 따뜻한 햇살이 지평선을 따라 피어오른다. 손끝에서 번지는 온기가 금실처럼 맺혀 비스듬한 돌담을 어루만진다. 귓가를 스치는 바람, 눈을 감으면 보이는 풍경, 익숙한 흙냄새가 몽글몽글 피어오른다. 마법같은 설레임은 소소한 발걸음을 잡아끌어 아득한 인파속으로 끌어들인다.

원유리, 아니 청춘유리. 올해 나이 25세. 그녀는, 아니 소녀는 500일 동안 27개국 70개 도시를 유람한다.

▲ 출처=청춘유리

‘만국유람기 더 비긴즈’

청춘유리(본명 원유리)는 여행가다. 하지만 전문 여행가는 아니다. 대학생의 신분으로 아르바이트와 장학금만으로 세계를 여행했다. 최근에는 여행을 하면서 느꼈던 감정과 추억이 담긴 사진 등을 담은 포토에세이 출간을 준비하며 새로운 도전에 나서고 있으며, 여행을 하며 자신의 개인 SNS(페이스북, 블로그, 인스타그램 등) 페이지뿐만 아니라 유명 SNS 페이지 '나랑 여행갈래', '여행에 미치다', '유럽-어디까지 가봤니', 'Rave trip' 등을 통해 100만 명 이상의 '좋아요'를 얻으며 많은 팬을 보유하고 있다.

이코노믹리뷰가 직접 만난 청춘유리의 첫인상은 의외로 평범했다. 하지만, 평범함 속에서 아주 작은 용기를 냈던 청춘유리의 ‘쌩얼’을 발견하기에는 그리 오랜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이코노믹리뷰 박재성 기자

“여행을 통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용기를 주고 싶어요. ‘우리들은 틀리지 않았다’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죠” 청춘유리의 여행에는 이유가 있었다. 당당하게 자신의 길을 걸으며, 아주 조금 용기를 내 새로운 길로 걸어가라고.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한다.

하지만 분명히 계기가 있었을 것이다. 나름의 확신을 가진 기자의 집요한 질문에 청춘유리는 선선히 자신의 경험담을 풀어냈다.

18세, 청춘유리는 춤을 좋아하고 놀기 좋아하는 평범한 학생이었다. 특별히 공부를 잘하는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문제를 일으키는 학생도 아니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날 운명처럼 일본에 한 달 동안 교환학생으로 갈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일본어에 약간의 관심을 보였던 것이 결정적이었다. 청춘유리는 부모님을 설득하고 교장 선생님을 설득해 기어이 교환학생 자격을 따냈다. 그리고 일본으로 향하는 배에 몸을 실었다. 큰 모험이었다.

“무섭지는 않았어요. 오히려 제가 낯선 사람들과 의외로 잘 소통한다는 것이 놀라웠죠” 청춘유리는 자신의 첫 일본여행을 떠올리며 빙그레 웃었다. 난생처음 부모님의 품을 떠나 타국으로 향했지만 무서움보다 설레임이 컸다고 한다. 물론 처음에는 두려움 80, 설레임 20이었으나 일본으로 가는 배에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고 들으며 알 수 없는 이끌림을 느꼈다고. “그때 생각했어요. 내가 의외로 강한 아이구나”

▲ 출처=청춘유리 페이스북

일본에서 느낀 소소함

교환학생의 자격으로 일본에 머물게 된 18세 청춘유리. 처음의 걱정은 눈녹듯이 사라지고 즐겁고 행복한 시간의 연속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여행을 해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아니라고 한다. 단순히 사람이 좋고, 새로운 환경이 즐거웠다.

그러던 어느 날 교환학생으로 있던 학교에 수영수업이 열렸다. 하지만 청춘유리는 다른사람 앞에서 수영복을 입기 부끄러웠고, 수영수업에 참석하는 대신 교정을 둘러봐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냈다.

햇살이 따사로운 계절이었다. 청춘유리는 MP3를 귀에 꽂고 아무도 없는 교정으로 나왔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혼자’였다. 바람이 불고 마음속에서 알 수 없는 엔돌핀이 솟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일상에서 느낄 수 있는 소소함과 낯선 곳이 되어버린 바람이 마음을 들뜨게 했다. 그때 청춘유리는 말없이 교정을 걸으며 다짐했다고 한다. ‘어른이 되면 정말 많은 나라를 다니자. 이 감정을 낯선 곳에서 또 느끼자’

 

평범한 대학생에서 여행속으로

하지만 한 달간의 짧은 교환학생이 끝난 후 청춘유리는 자연스럽게 일상에 적응했다고 한다. 교환학생으로 있으면서 낯선 곳에 대한 마법같은 설레임을 느꼈지만 어느새 평범한 사람이 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고. “일본에 있을 때 느꼈던 감정을 잊었다는 것을 느꼈어요. 대학교에 진학하고 공부하며 수업을 듣고, 1등을 놓치지 않으려 아등바등하고 스펙을 쌓고 취업만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있는 나 스스로를 발견했습니다”

청춘유리는 당시의 자신을 ‘소’와 비교했다. “자신에게 주어진 길만 걸어가는 소처럼, 저는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갑자기 18세의 제가 몹시 부러웠어요”

그러던 어느날, 오후 8시까지 이어진 수업을 마치고 통학버스에 올라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마침 그날은 비가 많이 내렸다고 한다. 청춘유리는 차창 너머로 빗방울이 떨어지는 하늘을 바라보며 아무 생각없이 스마트폰을 꺼냈고, 누군가의 블로그에서 ‘죽기 전 사람이 후회하는 10가지’라는 글을 읽었다고 한다. “마지막에 이런 말이 있더군요. ‘행복은 결국 자신의 선택이었다’라는 말” 우울한 구름이 드리운 빗속의 청춘. 청춘유리의 마음속에 잠시 잊었던 결심이 피어오르는 순간이었다. ‘여행을 떠나자’

하지만 여행은 현실이었다. 시간과 돈이 필요했고, 무엇보다 큰 용기가 필요했다. 하지만 청춘유리는 정해진 길에서 ‘한 발자욱만 벗어나자’라는 심정으로 마음을 다잡았다고 한다. 당장 휴학계를 내고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 출처=청춘유리 페이스북

소소함을 찾아서

돈이 모였다. 이제 여행을 갈 순간이다. 하지만 예상했던 대로 부모님의 반대가 극심했다고 한다. 어머니는 ‘일단 결심이 서면 무조건 하고 보는’ 청춘유리의 성격을 아는 지라 선선히 응원에 나섰지만 문제는 아버지를 설득하는 일이었다. 결혼 후 10년 만에 얻은 늦둥이 딸이 갑자기 혼자서 해외여행을 가겠다고 하니 아버지 입장에서는 깜짝 놀랄만 했다.

“돈을 모아 여행을 가겠다고 하니 아버지는 반대하셨어요. 차라리 돈을 더 보태줄테니 카페를 차리라고 말하시더라고요. 하지만 포기하고 싶지 않았어요. 물론 카페를 차리고 장사가 잘 될 수 있겠죠. 하지만 절대 행복하지 않을 것 같더라고요. 나중에 후회하는 내 모습이 싫었습니다. 아버지한테 공부도 열심히 하고 스펙도 열심히 쌓을테니 절 한번만 믿어달라고 했죠”

결국 청춘유리의 설득에 아버지도 항복했다. 여행허락이 떨어졌다. 이후로 준비는 일시천리였다고 한다. 아일랜드에 머물며 유럽을 여행하는 계획을 세우고, D-day를 정했다. 그리고 운명의 출국하는 날. 공항으로 떠나는 청춘유리에게 아버지는 “파이팅”을 외쳤다고 한다. 심정이 어땠을까. “그런데 사람 마음이 참 이상해요. 부모님의 허락이 떨어지고 응원을 받으면서 공항으로 가는데 마음이 찡했어요. 4시간 30분동안 버스타고 가면서 펑펑 울었습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