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천천히 드세요!”

식사 때면 어김없이 시작되는 아내의 잔소리다. 누가 쫓아오는 것도 아니고 밥을 빼앗는 것도 아닌데, 너무 빨리 먹는 필자의 나쁜 습관이 영 못마땅하기 때문이다.

아주 오래된 습관이다. 어릴 적 아침 6시면 가족들 모두 모여 식사를 했다. 너무나 바쁘셨던 아버지께서 ‘가족끼리 한 번 보기도 힘드니 아침이라도 함께 하자’고 만든 ‘법’이었다. 덕분에 매일 아침이 고통스러웠다. 일단 자리에서 일어나 눈곱만 떼고 옷을 갈아입는다. 절대 잠옷 차림으로 밥상에 앉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리고 번개처럼 식사를 한다. 아버지 또한 급하게 드시는 편이라, 가족 식사시간은 길어야 15분이었다. 아버지를 배웅하고 나면, 약속이나 한 듯 가족들은 다시 침대로 향했다. 빨리 식사를 해야 아버지의 출근 시간이 당겨졌고, 아버지가 나가셔야 모자란 잠을 보충할 수 있었으니, 가능하면 식사를 빨리 해야 했다.

속식(速食)은 불행의 지름길

성인이 되어서 필자의 빠른 식사 습관은 또 다른 이유로 더 강화되었다. 언제나 바쁜 의사라는 직업 때문이다. 특히 인턴(수련의)시절이 최고조였다. 인턴의 열악한 현실을 비아냥거리는 농담 중에 ‘인턴은 삼신(三神)이다’라는 말이 있다. 일 하는 데는 ‘등신(等神)’, 자는 데는 ‘귀신(鬼神)’, 먹는 데는 ‘걸신(乞神)’이라는 것이다. 그때를 생각하면, 처음 의사로서 일을 시작하니 고도로 숙련된 선배 의사와 비교하여 업무수행 능력이 형편없고, 늘 수면부족으로 시달리니 엉덩이만 대면 잠이 들었고, 업무량과 스트레스가 너무 많아서 항상 배가 고팠던 기억이 새롭다. 그 시절 빠른 식사, 이른바 ‘속식’은 경쟁력이었다. 언제 불현듯 시작할지도 모르고, 또 언제 갑자기 끝날지도 모르는 식사시간 때문이다. 빨리 먹는 인턴이 칭찬을 받기까지야 했겠냐만, 확실히 늦게 먹는 인턴은 한 소리 들어야 했다. 군에 입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 시절에는 식사를 한꺼번에 끝마치는 것이 중요했다. 역시나 느리게 먹는 사람들은 타박을 받기 일쑤였다. 모든 소대원이 식사를 끝마치고 함께 일어나, 배식판을 설거지하고, 빙 둘러 앉아 담배를 피우는 맛이란…! 만약 누구 하나라도 식사가 늦어져 끽연 시간을 빼앗기면, 그만큼 억울한 일도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행복으로 가는 길에는 역행하는 짓이었다. 음식을 먹는 것은 참으로 기쁜 일이다. 배고픔을 채우는 것은 본능적 욕구의 충족이니 가장 근원적인 기쁨이 따른다. 입맛에 맞는 음식은 혀를 즐겁게 한다. 천천히 씹다 보면 전에는 느끼지 못한 깊은 맛을 느낄 수도 있다. 무엇보다 느긋하게 가족들과 담소를 즐기다 보면, 마음이 편안하고 따뜻해진다. 이런 기쁨들을 마음껏 누려야만 했는데 그렇게 하지를 못했다. 목적달성과 성취를 위해, 그리고 집단주의의 틀에 맞추기 위해, 그저 배를 채우기 위해 얼마나 서둘렀던지…. 음식을 음미하고 만끽하는 것은 아주 가끔 있는 행사와 같았다. 일상의 식사는 그저 살기 위한 수단 중 하나일 뿐이었다. 당연히 아무리 돌이켜봐도, 행복했던 식사시간, 행복했던 음식 맛, 행복했던 식탁의 추억들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도 우리나라 국민들의 습성인 ‘빨리빨리’를 감안하고 생각해보면, 필자만 그런 것은 아니리라.

10가지 음미(吟味) 증진법

미국의 저명한 긍정심리학자 ‘프레드 브라이언트(Fred Bryant)’에 의하면, 행복해지려면 천천히 먹어야 한다고 했다. 다시 말해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느끼는 기쁨을 만끽하려면, 절대 급히 먹으면 안 되고, ‘음미(Savoring)’해야 한다는 것이다. 반드시 식사만 음미하는 것이 아니다. 음미는 ‘사물이나 개념의 내용을 새겨 느끼거나 생각하다’는 또 다른 뜻이 있다. 주변에 벌어지는 여러 가지 사건과 경험들의 깊은 뜻을 찾아 오래도록 느끼고 생각한다는 뜻이다.

음미는 행복을 배가시키는 속성이 있다. 기쁜 일을 접했을 때의 행복감을 되도록 오래 지속할 수 있다면, 더 오래 그리고 더 많이 행복해질 수 있다. 그뿐만 아니다. 연구에 의하면 음미는 관계를 돈독하게 해주고, 정신과 육체의 건강을 증진시키며, 문제 해결에 대한 보다 창의적인 해결책을 찾게 해준다.

어떻게 하면 음미를 잘할 수 있을까? 브라이언트 박사가 소개한 10가지 ‘음미 증진법’을 살펴보았다. 첫 번째, 좋은 감정은 다른 사람과 나누어라. 좋은 소식을 접했을 때 무엇을 해야 할까? 무엇보다도 내게 중요한 배우자나 친구에게 얼른 알려야 한다. 행복은 나눌수록 커진다. 두 번째, 멘탈 사진기를 사용해라. 의식적으로 나중에 기억하고 싶은 찰나를 사진기처럼 찍어서 기억 속에 저장해두면, 행복감을 되살리는데 도움이 된다. 세 번째, 스스로를 칭찬해라. 우리와 같은 동양적인 사고에서는 스스로 잘 한 일을 자랑하지 않는 겸양이 미덕이지만, 이제는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 자신을 칭찬하는 습관을 들이자. 네 번째, 감각기능을 연마해라. 좋은 음식은 혀뿐만 아니라, 코와 눈으로도 맛볼 수 있다. 감각을 살리면 더 다양한 기쁨을 누릴 수 있다. 다섯 번째, 마음껏 기쁨을 표현해라. 크게 웃고, 몸서리치게 좋아하고, 기쁨을 온몸으로 표현하라. 좋은 감정을 밖으로 잘 표현하는 사람이 더욱 긍정적이기 때문이다. 여섯 번째, 더 나쁜 결과와 비교하라. 때로는 더 나쁜 일과의 비교를 통해 지금의 기쁨이 커질 수 있다. 지각을 했다면, 결석을 했을 때보다는 다행이지 않은가! 일곱 번째, 순간에 몰입하라. 어떤 경우에는 가능하면 의식적으로 한곳에만 몰입해야 한다. 예를 들어 정말 훌륭한 예술작품이나 자연경관에 빠져들어 잡념이 없다면, 더 효과적으로 음미할 수 있다. 여덟 번째, 감사하고 축복하라. 얼마나 당신이 행운아인지 표현해야 하고, 식사 전에 음식에 대해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는 것처럼, 작은 일에도 감사해라. 아홉 번째, 즐거움을 해치는 생각을 피하라. 부정적인 생각을 피하는 것은 긍정적인 생각을 하는 것만큼 중요하다.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히면, 아무리 좋은 결과가 나와도 기쁨이 줄어든다. 열 번째, 얼마나 시간이 빨리 흐르는지 잊지 말아라. 즐거운 시간은 빨리 흐른다. 그러므로 의식적으로 행복한 순간을 더 오래 즐길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당장 시작하는 음미

브라이언트 박사의 음미 증진법이 어렵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 모든 것을 다한다면, 물론 음미를 제대로 하는 것이고, 당연히 더 행복해질 수 있다. 하지만 쉽지는 않다. 노력이 필요하다. 만약 10가지 모두가 어렵다면, 당신이 하기 쉬운 한 가지만이라도 실천하지 바란다. 하나가 잘 되면 또 다른 한 가지 방법을 익히면 된다. 욕심은 행복을 멀리 가게 한다.

예전의 필자는 속식의 달인이었다. 자장면은 5분 완성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시계를 놓고 가능하면 20분 이상 천천히 먹으려 한다. 비록 10분 정도에 식사의 대부분을 해치우고 10분 동안 음식을 함께하는 사람들과 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음식이 주는 기쁨과 내 몸이 느끼는 행복을 음미하려고 애쓰고 있다. 비록 좀 귀찮고 유난스럽기는 하지만, 어쩔 수 있나? 행복해지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