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랜드 오픈

1960년대 종로·퇴계로 판자촌 주변엔 윤락업소가 즐비했다. 지난 1966년 제14대 서울시장으로 취임한 김현옥은 이를 뜯어고치려고 했다. ‘근대화 불도저’로 불리던 그는 대대적인 정비에 나섰다. 판자촌과 윤락업소를 없애고 근대화의 상징물을 만들려고 했다.

최신식 대규모 주상복합 단지가 제격이었다. 설계는 ‘천재 건축가’ 김수근에게 맡겼다. 그는 근대 문명의 활기를 상징하는 건물을 짓겠다고 했다. 김 전 시장과 뜻이 통한 것이다. 그로부터 2년 후 최대 17층에 달하는 건물 8개로 이뤄진 주상복합 단지가 모습을 드러낸다. 김 전 시장은 ‘세상의 기운이 다 모인다’는 뜻을 담아 ‘세운’이라고 명명했다.

그렇게 세운상가가 그랜드 오픈을 알렸다. 시공할 때부터 이미 엘리베이터까지 있었던 신식 고층건물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대중의 관심이 집중됐다. 문을 열기가 무섭게 연예인·고위공직자·대학교수 등이 서둘러 주거시설에 입주했다. 그 당시 세운상가에 사는 사람들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세운상가는 최신 문물의 거래소이기도 했다. 국내 최초의 종합전자상가이자 제조 공장이었다. ‘없는 것 빼고 다 있다’는 말은 세운상가를 위한 것이었다. 전자제품은 물론 부품까지 완비돼 있었고, 월남전에 파병됐던 군인들이 가져온 녹음기, 카세트, 카메라 등도 거래할 수 있었다. 누군가는 세운상가 한 바퀴를 돌면 탱크, 잠수함, 로켓, 인공위성까지도 만들 수 있다고 했다. 나중엔 이른바 ‘빨간책’을 파는 상인들이 나타나며 음란물 유통의 본산이 되기도 했다.

신생 업체의 경우 세운상가에 자리 잡을 경우 여러 가지 프리미엄을 누릴 수 있었다. 기계나 금속은 물론 전기와 조명, 페인트, 건설기자재까지 웬만한 부품은 모두 구할 수 있어 비즈니스가 용이했다. 이곳에선 생산은 물론 도·소매까지 이뤄지기 때문에 물류비용을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한국판 실리콘밸리’라는 수식어가 세운상가에 따라붙었다. 실제로 여러 IT 업체가 세운상가 출신이다. 먼저 ‘국내 벤처기업 1호’ TG삼보컴퓨터가 그렇다. 이용태 TG삼보컴퓨터 명예회장이 지난 1980년에 7명의 젊은이와 의기투합해 세운상가에서 창업한 ‘삼보전자엔지니어링’이 TG삼보컴퓨터의 전신이다.

▲ 출처=서울시

국내 소프트웨어(SW)의 자존심인 ‘한글과컴퓨터’도 세운상가가 낳았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서울대 컴퓨터연구회 출신들이 개발한 ‘아래아 한글’은 지난 1989년 세운상가에서 유통을 시작했다. 홈 네트워크 기업인 ‘코맥스’도 세운상가가 사업적 고향이다. 이렇게 많은 업체가 세운상가에서 태동했다.

세운상가는 1970~80년대에 전성기를 구가했다. 1980년대엔 3000여개 업체와 2만여명의 고용인구가 세운상가에 있었다. 이곳에 ‘한국 전자·전기산업의 혼이 깃들어 있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그 시절 세운상가는 전자산업의 메카였다.

‘청계천 랜드마크’ 혹은 ‘유령상가’

어느덧 세운상가는 반백 년 가까이 된 건물이 됐다. 지금 젊은 세대는 자신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세운상가에 대해서 잘 알 턱이 없다. 종로 일대를 오가면서 느낀 어렴풋한 이미지만 가지고 있다. 체험에 기반을 둔 아련한 기억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세운상가는 점차 잊혀가고 있었다. 세운상가가 지금까지 최신 문물이 오가는 신식 공간으로 남지 못했기 때문이다. 명성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부터다. 1987년 정부는 용산역 서부에 세운상가 상점들을 이전시키는 계획을 수립했다. 그해 7월 용산전자상가가 탄생했다.

세운상가가 ‘국내 최대 종합전자상가’ 타이틀을 용산전자상가에 빼앗기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여기에 후발주자인 구로디지털단지까지 세운상가의 위상을 넘봤다. 세운상가는 이리 치이고 저리 치였다. 쇠락의 내리막길은 이렇게 시작됐다.

현재 세운상가엔 문을 닫아버린 상가들이 수두룩하다. 예전 같은 생기가 없다. 많은 상인들의 표정엔 근심이 가득해 보인다. 가끔 부품을 사러 오는 전자공학도와 옛 기억에 잠긴 몇몇 손님이 오가는 정도가 돼버렸다.

▲ 세운상가 내부. 출처=서울시

한때 ‘청계천의 랜드마크’로도 불렸지만 이젠 ‘도심 속 흉물’이라고 부르는 사람까지 생겨났다. ‘유령상가’라든가 ‘도심의 버려진 섬’이라고 일컫는 사람도 있다. 최근에 세워진 번지르르한 주상복합에 비하면 세운상가는 몹시 낡아 보였다. 세운상가는 부정적인 메타포(Metaphor)로 채워진 공간이 됐다.

지난 2009년엔 전면 철거될 위기까지 찾아왔다. 오세훈 전 시장의 녹지축조성사업에 따른 것이었다. 그런데 상인들의 반대와 갖가지 이유로 지난해 3월 박원순 시장은 철거계획을 취소했다. 정부의 결정에 상인들은 울었다가 웃었다가, 그야말로 혼란스러웠다.

메카 명성 되찾을까

현재 세운상가는 도심재생 사업 대상으로 선정된 상태다. 서울시, 종로구청, 중구청 등 이번 재생사업을 추진하는 주체기관들은 세운상가 활성화 방안을 수집하기 위해 국제현상설계 공모를 진행 중이다. 이는 5월 18일까지 진행된다.

밑그림도 속속 뚜렷해지고 있다. 이번 재생 사업은 7개의 건물이 들어선 총 1km 구간을 2단계로 나눠서 추진한다. 서울시는 오는 5월까지 재생계획의 청사진을 구체화하고 올해 11월에 1단계 구간(종로~세운상가~청계·대림상가) 공사에 착수해 내년 말에 끝마칠 계획이다.

세운상가의 빈 사무실은 도심산업 체험 공간, 전시실, 창업지원 거점 공간 등으로 다시 태어난다. 아울러 도심산업 지원센터와 공방·작업실 공간도 마련할 예정이다.

‘공중보행교’ 재건도 계획된 상태다. 상가와 상가를 다리로 연결하겠다는 것이다. 미적인 기능을 강화해 관광객을 유치하겠다는 계산이다. 예컨대 미국 뉴욕 맨해튼에 있는 ‘하이라인 파크’의 한국판을 만들겠다는 로드맵이다. 일각에서는 이에 대해 의구심을 보이기도 하지만 기대하는 사람도 많다.

‘전자산업의 메카’ 세운상가는 변신을 꾀하고 있다. 우여곡절이 많았고, 시대의 외면을 받았던 세운상가지만 리뉴얼이 코앞이다. 다시 메카의 위상을 되찾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