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는 ‘방어’였다. 사내가 들고 온 아이스박스 안에는 커다란 물고기가 박스를 꽉 채운 채 누워 있었다. 사내는 마라도 바다에서 잡히는 고기들이 육지 촌놈들의 환심을 사는 데 얼마나 혁혁한 공을 세우는지 잘 알고 있었다. 사내의 표현에 의하면 언제나 마라도 아니면 “죽었다 깨어나도 못 먹는” 황송한 먹거리였고, 그 귀한 것을 인심 좋게 쓱쓱 썰어 내놓으며 이것은 뱃살이고, 이것은 등 쪽이고, 이것은 아가미 쪽이고, 하며 거침없는 설명을 곁들이는 사내는 그때만큼은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특별한 존재가 되었다. 마라도나 모슬포에 가면 흔해 빠진 것이 낚시꾼이고 ‘사시미칼’ 든 사람들이지만, 육지 촌놈들에게 그 특별한 바다 것을 먹여주는 사내는 확실히 딴 세상에서 온 사람이었다. ‘이것이 프로다’라는 엄청난 자존심과 자신감이 온몸으로 뿜어져 나오는 진정한 전문가였다. 물론 거기에 자아도취는 기본으로 깔려준다.

방어는 겨울 한철 장사로 모슬포 어민과 상인들을 1년 동안 먹여 살리는 귀중한 바다 자산이다. 방어가 본격적으로 연안으로 돌아오는 시기인 11월에 모슬포 부두에서 열리는 방어축제를 시작으로 다음해 2월까지 그 동네에서 복작거리는 사람들은 딱 두 부류로 나뉜다. 방어를 파는 사람과 방어를 사먹는 사람. 모든 횟집과 수산의 수족관에 있는 고기의 90%가 방어다. 방어로 시작해서 방어로 끝나는 그곳의 겨울나기는 역시 관광객들에겐 진풍경이고, 특별한 체험거리다. 방어를 잡는 방법까지 알면 더 신나 할 것인데, 방어를 잡기 위해선 먼저 자리돔을 잡아야 한다. 손바닥보다 작은 자리돔 수천 마리를 그물로 낚아 올려 방어가 포착되는 지점에 가서 다시 풀어놓고, 주낙을 떨어뜨린 채 기다리다 감아올리면 방어가 줄줄이 사탕처럼 올라온다. 그래서 방어 뱃속을 갈라보면 자리돔 네댓 마리까지 덤으로 먹을 수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제 겉으로 드러나는 이 활기차고 경쾌한 풍속도의 속사정은 결코 유쾌하지가 않다.

후쿠시마 핵발전소 폭발 이후, 몇 년 단위의 시차가 있을 뿐, 전 세계 바다가 방사능으로 오염되어 가고 있는, 그야말로 암울한 시대인데, 방어는 후쿠시마와 더 깊은 연관이 있다. 한반도에 따뜻한 봄이 오면 방어는 차가운 바다를 찾아 북상하여 알을 낳는데, 그곳이 하필이면 후쿠시마 위쪽 러시아 캄차카 반도 연안이다. 그곳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내다 가을이 되면 서서히 남하하여 후쿠시마 연안을 지나 한반도 남쪽으로 내려오는 것이다. 방어가 회유(洄游) 어종이 아니라, 마라도 연안에서 나고 죽는 붙박이 어종이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방어 스스로 후쿠시마 연안을 경계하여 서식지를 바꾸는 생태계 반란이 일어나지 않는 한, 바꿀 수 없는 현실이다.

그래도 겨울철 벌어지는 모슬포의 풍속도는 앞으로도 수년 동안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후쿠시마에서 나는 쌀이 無방사능 딱지가 붙은 채 유통되듯이, 일본 사람들 대부분이 쉬쉬하며 인지하기를 거부하고 아무 일 없었던 듯 일상을 살아가듯이 말이다. 언뜻 이해가 안 가는 상황이지만, 인간이 스스로 사고하기를 거부하고 스스로를 최악의 공간에 유폐시키는 것은 그 공포가 인간 개개인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하기 때문일 것이다. 감당할 수 없으니, 모른 채 살아가는 것이 유일한 해법인 것이다. 한국에서도 이미 그런 상황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고, 방어축제 역시 모르쇠하며 계속 이어질 것이지만, 나는 이번 겨울부터 방어를 먹지 않는다. 다만, 인간이 저질러 놓은 이 어마어마한 죄악을 경이로운 자연이 대신 치유해주길 바랄 뿐이다. 수천 년 불모의 땅이 될 것이라던 우크라이나의 체르노빌이 50% 이상 정화가 되었다는 놀라운 소식도 들려오지 않는가. 그 주인공들은 바로 풀이다. 먹이사슬의 가장 아래쪽에 존재하면서 이 지구상 어떤 생명체보다 영양분이 충만한 풀. 독을 빨아들여 해독시키기까지 수십억 개 풀이 죽고 태어나기를 반복했을 것이다. 이렇듯 경이로운 자연은 그 자체가 자애고 사랑이고 성령이다. 부처님, 하느님, 알라신 찾을 일이 아니라 자연 앞에 무릎 꿇고 사죄하고 경배할 일이다.

아무튼 그날 그 방어는 사내의 계획대로 육지 촌놈들의 마음을 송두리째 사로잡았다. 사내가 처음으로 만난 나의 최측근은 과 후배였다. 당시 평택과 붙은 안성의 중앙대학교 자취촌에 살며 학원강사를 하던 그 남자후배는 나의 ‘알콜씨씨’였다. 친절하게 영문을 덧붙이자면 ‘Alcohol Campus Couple’이란 뜻이다. 함께 학교를 다니던 때는 이미 등단을 한 뒤 문창과에 들어온 시인 누나와, 시인이 되고 싶어 그런 ‘뛰어난’ 시인 누나를 스승으로 삼고자 했던 한참 어린 후배 사이였다가, 누나는 서울로 돈 벌러 가고, 후배는 군에 끌려가 몇 년을 소식도 모르다가 거의 같은 시기에 누나는 다시 평택으로, 후배는 다시 안성으로 복귀하면서 자연스럽게 재회하게 된 바, 사는 게 딱히 재미도 없고, 딱히 해야 할 무언가도 없던 우리는 술이 생각날 때마다 서로를 호출하여 부어라 마셔라 하며 한 시절을 유랑하였던 것이다. 가끔은 다른 선후배 집을 찾아 지역을 옮겨 다니며 술판을 벌이는 ‘알콜투어’도 서슴지 않았는데, 그 바람에 후배는 멀리 부산에 두고 있던 애인에게 차이는 사태까지 벌어졌지만,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하나도 안 미안하다. 오로지 술만 마셨을 뿐인데, 안 믿어주는 여친을 후배나 나나 어찌할 도리가 없었으니 말이다.

훤칠한 훈남인 후배는 얼마 가지 않아 보란 듯이 새로운 여친을 만들었고, 그 여친도 그날 방어 맛에 정신을 잃은 육지 촌놈 중 한 사람이었다. 아이스박스 뚜껑을 열어 눈앞에서 현신하는 방어의 늠름한 자태를 보는 순간부터, 사내가 그것을 상 위에 척하니 얹어 가방에서 호기롭게 꺼내든 ‘사시미칼’로 능수능란하게 회 뜨는 장면을 거쳐 부위별로 친절한 설명까지 곁들이며 한 점 한 점 접시에 올려놓는 손놀림을 지나 입 속으로 들어와 이와 혀와 침이 혼연일체가 되어 맛을 음미한 후 목구멍으로 넘어갈 때까지 그 연인들의 감탄사는 그칠 줄을 몰랐다.

나야 긴꼬리벵에돔을 먹어본 자로서 줏대도 없이 방어 맛을 찬양하지는 않았지만, 사내의 선물이 내 사랑하는 후배를 행복하게 만드니 덩달아 기분이 좋았다. 마치 부모님에게 소개하는 상견례 자리 같았다. 나에게 청혼을 한 남자가 이 정도는 된다는 식의 뿌듯함이 몰려왔다고나 할까. 방어와 함께한 1차 술자리를 마치고, 2차를 하러 가는 길에 후배는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우며 이렇게 말했다. “누나, 남자인 내가 봤을 때 말야, 진짜 괜찮은 사람 같아. 한번 제대로 사겨 봐.” 아, 방어의 위력이 이 정도일 줄이야. 후배는 분명 방어 때문은 아니라고 사족을 붙였지만, 마치 첫눈에 ‘뿅 간’ 지 애인을 만난 듯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2차 술자리가 진행되는 동안, 그 마음은 나에게까지 전이되기에 이르렀다.

사내가 짊어지고 온 가방 안에는 한 달을 살 수 있는 옷가지와 생활용품이 들어 있었다. 애초에 평택에 찾아오겠다고 할 때부터 사내는 오래 머무를 작정이었던 것이다. 마라도를 한 번 떠나오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라 이왕 만나러 오는 거 결판을 짓고 가자는 작심이었을 것이다. 하여 한 달 동안 지낼 숙소를 찾는 일을 나의 부탁으로 후배가 대신하여 주었고, 안성 자취촌에 마침 딱 한 달 동안 비어 있는 원룸을 찾아내었던 것이다. 나는 평택에서, 사내는 안성에서 지내면서 매일 만나기 시작했다. 여전히 낯설고 어색하고, 마라도 횟집 사장이라는 거 말고는 정말이지 아는 게 하나도 없는 늙다리 아저씨하고 매일 만나서 노는 일이 그다지 기껍고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머나먼 마라도에서 배 타고 비행기 타고 버스 타고 와준 노고를 생각해서도 혼자 방에 처박혀 있게 할 순 없었다. 게다가 섬으로만 떠돌던 사내가 내륙인 안성에서 만날 사람도 없었고, 할 수 있는 일도 없었기에 내가 한 달 동안은 봉사 차원에서라도 놀아주기로 했다. 그러니 둘 다 술을 좋아한다는 것은 참 다행스러운 공통분모가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사내는 한 달 치 숙박비를 모두 낸 그 방에서 일주일도 머물지 못했다.

나는 당시에 경차를 몰고 다녔고, 평택에서 안성으로 출근해 사내를 태우고 이곳저곳 다니다 사내를 안성에 내려다 주고 다시 평택으로 귀가하는 일상이 매일 반복되었는데, 그게 참 불편한 일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데이트의 마지막 코스로 마땅히 술이 필요했고, 술은 여전히 쭈뼛거리는 만남의 어색함을 풀어주는 구실을 톡톡히 했는데, 그러자니 대리기사비가 만만찮게 깨지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과감하게 제안했다. 생활이 피곤해서 안 되겠으니, 그냥 가방 싸들고 내 집으로 가자고. 그러자 사내는? 말해 무엇하겠는가. 두 말 않고 따라나서는 것이었다. 속으론 쾌재를 불렀겠지. 지금 생각해보면 예의상이라도 두어 번 거절을 했어야 하는데, 사내는 그때나 지금이나 눈치가 젬병이다.

그리하여 사내가 평택으로 찾아온 지 일주일 만에 우리의 연애는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기왕 연애를 하기로 마음먹었으니, 남은 기간 동안 원 없이 놀아보기로 했다. 평소 혼자서는 아무데도 여행을 가지 못할 만큼, 나름 소심했던 나는 사내 덕에 그렇게 가보고 싶던 정선이며, 아우라지며 강원도 일대를 종횡무진 돌아다녔다. 여행은 즐거웠고,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갔다. 사내는 또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마라도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