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 안이었다. 시간은 자정을 향해가고 있었다. 어떤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에 갔다가 뒤풀이를 하던 도중 부랴부랴 빠져나와 탄 평택행 마지막 기차였다. 술기운에 설핏 잠이 들었었고, 주머니 속에서 사납게 떨어대는 진동에 깜짝 놀라 비몽사몽 간에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아이고, 이거 자는 걸 깨았나 보네요.” “어…… 누……구세요?” “하하, 목소리도 이자뿌린 모양이네.” 단잠을 깨운 것도 그렇고, 어딘가 껄렁한 기운이 전해오는 통에 살짝 기분이 상하려고 했다. “여, 마라돕니다.” 아, 마라도. 맞아, 그 섬에 한 남자가 있었지. 그제야 사내의 목소리가 생각났고, 사내와 주고받은 이야기들이 화다닥 떠올랐다. 사내는 청혼이라는 일생일대의 큰일을 저지른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상당히 당황스러웠을 것이고, 그 겸연쩍음을 덮기 위해 조금 껄렁껄렁해졌을 것이다.

그래도 그렇지, 지금 시간이 몇 신데……. 나는 오밤중에 전화를 걸어온 무례한 이가 누군지 알았음에도 여전히 뜨악한 반응을 보였다. “그런데, 왜요?” 그렇다고 사내의 목소리에 술기운이 있었던 건 아니다. 모르긴 해도 꽤 많은 시간을 내게 전화하려 했을 테고, 벼르고 벼르다, 미루고 미루다 큰 맘 먹고 전화를 걸었을 것이다. 그러나 전화는 데면데면한 분위기 탓에 짧게 끝났다. ‘그동안 잘 지냈느냐’와 같은 안부 인사를 주고받았던 것 같고, 사내가 집 주소를 물어와 불러주었던 것 같다.

그로부터 얼마 후, 커다란 종이상자 하나가 배달되었다. 크기에 비해 상당히 가벼웠다. 마라도에서 날아온 그 크고 가벼운 택배상자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뜯어보니, 시커먼 것이 한가득 들어 있었다. 보고도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접혀 있는 쪽지 하나가 시커먼 것 속에 꽂혀 있었다. A4용지 한 장에 일필휘지로 써내려간 듯한 글자들이 커다랗게 종이를 메우고 있었다.

To. 노처녀

맛없고 귀찮더라도

몸 생각해서

일주일에 3번은, 아니지

매일 챙겨 드시오

혹 나의 색시가 될지도 모를 일이니

다 드시고 연락 바라오

얼마든지 보내 드리리다

From. 노아저씨

나는 이 쪽지를 지금도 가지고 있다. 앨범 속에 끼워 고이 간직하고 있다. 지금 쪽지를 다시 꺼내 보니, 마라도에서 나는 그를 줄곧 ‘아저씨’라 불렀고, 본인은 절대 아저씨가 아니라고 우겨댔던 것이 기억난다. 그래서 No아저씨가 老처녀에게 보낸다나 어쨌다나. 무려 열한 살이나 많은 늙다리 아저씨가 새파란 처자한테 보내는 연서가 나는 참 맘에 들었던 모양이다. ‘허 참, 이 남자 뭐야?’ 하면서도 약간의 껄렁함이 싫지 않았고, 떠나면 그뿐일 줄 알았던 그 섬의 로맨스가 끝난 게 아님을 알려주며,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떡하니 적어놓은 ‘색시’라는 글자가 다시금 설렘을 불러일으켰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생경한 것을 어찌 먹어야 하는지, 그 많은 양을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지, 보관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턱이 없으니 전화를 걸어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이것저것 물어보는 것을 시작으로 노아저씨와 노처녀의 장거리 전화질이 잦아졌던 것이다.

그 커다랗고 가볍고 시커먼 것은 말린 ‘톳’이었다. 마라도 기원정사에서 삼시세끼 톳 밥을 얻어먹었지만, 그것을 자르지 않은 채 담아놓은 것을 보니 무엇인지 알기가 힘들었다. 톳은 마라도 특산물이고, 해녀들의 재산이라서 아무나 채취하지 못한다. 사내가 내게 보내준 것도 직접 따서 말린 것이 아니라 마라도 해녀에게 구매한 것이다. 마라도 톳은 제주 본섬 톳보다도 훨씬 비싼 값을 받는다. 생긴 모양도 조금 다르고, 영양성분이 아주 뛰어나다고 한다. 톳은 해녀들의 큰 수입원인데, 제주 본섬에서도 마라도 톳은 구경하기가 힘들다. 김을 비롯한 해조류라면 사족을 못 쓰는 일본인들이 수협을 통해 오래전부터 전량 수매해가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콩나물 먹듯이 톳을 먹는다는 일본인들은 마라도 톳의 우수성을 일찌감치 알았던 것이다.

 

그때만 해도 우리가 정말 결혼을 하게 될지도 몰랐고, 하더라도 마라도에서는 전혀 살 계획이 없었고, 육지에서 신혼살림을 차리더라도 나까지 장사에 끼어들 계획은 더더구나 없었다. 사내의 청혼 조건에 이 모든 것이 들어 있었다. 어떻게 먹고살 것이냐는 질문에 사내는 ‘육지에서 횟집을 차리면 되지 않겠느냐고, 당신이 많이는 말고 조금만 도와주면 되지 않겠느냐’고 했었더랬다. 그 정도라면 한 배를 탄 입장에서 나 몰라라 할 수는 없으니, 당연지사 ‘도와주어야지요’ 했었더랬다. 그러나 결혼하기 한 달 전부터 이 계획들은 하나씩 삐거덕거리기 시작했고, 결국 지금까지 하나도 실현된 것이 없다. 뒤웅박의 실체가 그때부터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짜장면집은 더하다. 우리가 그 말도 안 되는 짜장면집을 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그러니까 짜장면집은 우리의 뜻도, 의지도, 계획도 아니었다. 순전히 외부적 조건에 의한 사건이었다. 그것이 뭐냐고 물어오면 멍석을 깔아주기 전에는 썰을 풀기가 간단치 않아서 대개 ‘어쩌다 보니’라고 답하며 넘어가는데, 마라도를 사랑한 소설가 이나미의 연작소설집 <섬, 섬옥수>와 조헌용의 연작소설집 <햇볕 아래 춤추는 납작거북이>에도 주요하게 다루어지는 큰 사건 때문이었다. 얼마나 대단했으면 두 소설가의 작품에 고스란히 녹아들었겠는가. 그러나 지금 여기서도 ‘어쩌다 보니’ 상상도 못 하던 짜장면집을 하게 되었다며 일단 넘어가자.

톳은 긴꼬리벵에돔 다음으로 마라도를 상징하는 해산물이다. 마라도를 떼어 놓고는 설명할 수 없는 우리 짜장면집은 마라도 톳을 짜장면에 응용하면서 ‘톳 짜장면’을 개발했고, 나중에는 특허까지 받았다. 그때 사내가 보내준 상자 가득한 톳은 대부분 지인에게 나눠주고 내가 먹은 건 얼마 되지 않지만, 우리 부부에게는 평생을 동고동락하는 소중한 자산이 되었다. 골다공증은 물론 심장병에도 탁월한 효과가 있고, 우리가 톳을 갈아서 면에 넣어 보니, 영양성분 이상으로 그 성질이 참으로 대단하다.

처음엔 수입 밀에 톳 가루와 식소다와 천일염을 넣고 반죽을 했었다. 톳은 그저 몸에 좋으라고 넣었던 것인데 먹거리 공부를 조금씩 하다 보니, 소다는 먹어서는 안 되는 탁월한 천연세척제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소다를 뺀 채 반죽을 해보았다. 놀랍게도 반죽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물론 그러기까지 톳 가루와 밀가루의 황금비율을 찾아내는 실험이 녹록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그 후, 우리 밀로 바꾸었을 때도 톳은 제 역할을 톡톡히 해내었다. 우리 밀은 수입 밀에 비해 글루텐 함량이 낮아 반죽이 잘 안 된다고 알려져 있다. 특히나 밀도가 높은 면류에는 우리 밀이 더욱 맞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톳이 들어가니, 그 비율을 잘만 맞춰주면 얼마든지 쫄깃한 식감을 낼 수가 있다. 톳이 없었다면 우리 짜장면은 기존의 짜장면처럼 식소다나 면파워에 의존해야만 했었을 것이다. 원해서 시작한 일은 아니지만, 톳은 마라도가 우리에게 준 귀하디귀한 선물이다.

톳은 짙은 갈색이고, 말리면 검은색에 가깝다. 이것을 갈아서 반죽하면 면이 갈색이 된다. 톳이 들어간 것을 모르는 손님들은 대부분 메밀로 만든 것이냐고 묻는데, 여기서 한 가지 웃지 못할 상황과 맞닥뜨린다. 사람들이 흔히 메밀이라고 아는, 그 갈색 면발은 사실 메밀면이 아니다. 메밀은 하얀색에 가깝다. 짙은 갈색을 띠는 메밀면이나 메밀전은 소량의 메밀에 어떤 색소를 넣은 것이다. 그리고 메밀은 글루텐이 거의 없기 때문에 절대로 쫄깃한 식감을 낼 수 없다. 칼국수 같은 넓적한 굵기에 길이는 한 뼘 정도가 최선이다. 찰기가 없어 뚝뚝 끊어지니 그 이상 길게 만들 수가 없다. 제주 여느 식당의 메밀칼국수를 먹어보면 메밀의 성질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니 쫄면에 버금가는 쫄깃함을 자랑하는 짙은 갈색의 메밀면은 화학성분이 다량 들어간 것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그렇게 사내는 톳 한 상자를 보내놓고 섬을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톳을 따라 육지로 나오고 싶었던 모양이다. 소설 쓰는 나미 언니가 일갈했듯이 그는 이제 그만 섬을 떠나야겠다고 무의식중에 깨달은 것을 나를 통해 실현하고 싶었던 것인지 모른다. 그 사건이 터지지만 않았다면 그도 나도 마라도와의 인연은 거기서 끝이었을 텐데, 전생에 무슨 인연이 있었던 건지 우리는 대를 이어서 마라도를 부여안고 살아가게 생겼다. 아무튼 사내는 톳을 보낸 지 한 달쯤 뒤에 평택으로 나를 찾아왔다. 커다란 아이스박스 하나와 무거운 가방을 둘러메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