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우리 국군에서 “귀신 잡는 해병대”로 알려진 “해병(海兵)”은 생각보다 긴 역사와 유래를 가진 군대다. 통상적으로 해군 예하에 설치되어 해군 혹은 육군의 상륙작전 등을 지원하는 해병은 각 군 중에서 시대의 변화에 따라 그 역할이 가장 크게 변해왔다. 한때 세계 규모의 전쟁과 함께 그 역할이 크게 확장됐던 해병은 냉전 후 수송기술 및 무기체계의 발달 등으로 인해 역할이 많이 감소했다. 하지만 “테러와의 전쟁” 이후 전 세계 범위의 해외원정과 파병이 많아지고, 도서지역 영토 마찰이 늘어나며 새로운 역할과 임무가 부여되는 중이다.

해병이 처음 문헌상에 등장하는 것은 중국 전국시대(481~221 B.C.)로, 이들은 해상에서 적선과 아군선이 접근전을 벌이게 됐을 때 선상에서 전투를 벌이는 전투 부대였다. 서구에서 비슷한 목적의 병과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로마-그리스 시대로, 지정학적 특성상 해전이 빈번했던 그리스 해군은 아예 선상 전투 전문의 장갑보병을 승선시켜 전투 시 적의 함선으로 넘어가 상대방의 군선을 탈취하는 임무를 부여했다. 로마 해군도 두 개의 함대에 선상 전투를 목적으로 한 보병 부대를 승선시킨 기록이 있지만, 당시 로마군이 활용한 부대는 딱히 함상 전투나 상륙전을 목적으로 양성한 부대라기보다는 통상적인 보병 부대를 배에 승선시켜 싸우게 한 형태였다. 로마의 명맥을 이은 비잔틴제국 또한 아나톨리아 지방이나 그리스에 정착해 있던 마타디 인들의 후예를 군함에 승선시켜 유사시 전투뿐 아니라 노 젓는 임무까지 병행시켰다. 이후 바실리우스 1세(Basil I, 811~886)는 4000명의 엘리트 병사를 뽑아 함상 전투 전문 연대를 운영했으며, 십자군에게 제국을 잃었다가 회복한 미카엘 8세(Michael VIII, 1223~1282)도 해군을 재건하면서 라코니아 출신의 짜코네스(Tzakones)인들과 서유럽-그리스인 혼혈인 가스물리(Gasmouloi)인들을 모아 함상 전투 전문 부대를 창설했다. 비록 비잔틴 제국 자체가 이후 쇠퇴기를 걸었기 때문에 비잔틴 군이 이렇다 할 활약을 펼칠 기회는 없었지만, 이 전문 부대는 제국의 후반 시기인 그리스계 왕조가 들어설 때까지 운영됐던 것으로 확인된다.

정식으로 “해병” 부대가 창설된 첫 사례는 스페인의 카를로스 1세(Carlos I, 1500~1558)가 1537년경 지중해 갈레온 전대에 편성시킨 해군 보병부대가 최초이며, 이후 시대가 흐르면서 함상 전투 외에도 연안 전투나 상륙전 등에서 활약하는 부대로 변화했다.

일찍이 오늘날의 개념으로 해병을 운영한 대표적인 국가로는 프랑스가 있다. 최초 왕정 시절인 1622년, 주로 캐나다의 프랑스 식민지에 전개시킬 목적으로 창설한 해상 보통 중대 (compagnies ordinaires de la mer)는 나폴레옹 시대에 가서 전열(戰列) 보병연대가 됐지만, 나폴레옹 시대가 끝난 후인 1822년에 해병대(Troupes de marines)로 다시 재편했다. 프랑스 해병대는 19세기 식민지 경쟁시대 때 해외에서 활동한 프랑스군의 주축을 이루었으며, 1900년에는 아예 정식명칭 자체도 ‘식민지군(Troupes Coloniales)’으로 변경했다. 양차대전이 끝나고 냉전이 시작된 1958년에는 이 ‘식민지군’의 명칭을 ‘해외 군(Troupes d’Outre-Mer)’으로 변경했지만, 1961년에 다시 최초의 임무로 돌아가게 되면서 ‘해병대’라는 명칭이 환원됐다. 프랑스 해병대는 해군에서 탄생한 군대지만 나폴레옹 시대 이후부터는 내내 육군에 소속되어 있었다는 점이 특징이다. 현재에는 주로 해외 파병 등의 임무를 전담해 수행한다.

해군이나 육군 예하에 설치된 해병대와 달리, 아예 독립적인 군으로 운용되는 대표적인 해병대는 미 해병대(US Marine Corps)와 1755년에 창설한 영국 왕립해병대(Royal Marines)가 있다. 미 해병대는 독립전쟁 당시 대륙회의가 새뮤얼 니콜라스(Samuel Nicholas, 1744~1790) 소령을 지휘관으로 하여 창설한 ‘대륙 해병대(Continental Marines)’를 모체 부대로 인정한다. 1775년 두 개의 대대로 창설된 미 해병은 독립 후인 1783년 대륙 해군과 함께 해체됐지만, 미 정부는 1798년 7월에 프랑스와 대륙 식민지 문제를 놓고 전쟁 분위기가 고조되자 정식으로 미 해병대를 재창설했다.

제1차 세계대전 때 7만명이 넘는 규모의 원정군을 파병한 미 해병대는 제2차 세계대전 때 태평양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전쟁을 치르며 최대 48만명에 가까운 병력을 투입했으며, 대전 중 2만명 이상의 장병이 전사하고 82명의 명예 대훈장(Medal of Honor) 수훈자를 배출했다. 현재 미 해병대는 지구 상에서 가장 큰 해병 전력인 동시에 육, 해, 공군 자산을 독자적으로 모두 갖춘 독립 원정부대의 성격을 띠지만, 이들 또한 시대의 흐름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존폐의 위기에 몰렸던 적이 있었다. 예산 문제뿐 아니라 “해병대의 임무” 자체가 문제로 제기되면서 해체 위기에 몰렸던 것이다. 훗날 ‘제독의 반란(Revolt of Admirals)’ 사건이라고 불리게 된 이 사건은 사실 루이스 존슨(Louis Johnson, 1891~1966) 국방장관과 해군 사이의 미묘한 파워게임이 야기한 문제였다. 심지어 당시 합참의장이던 오마 브래들리(Omar Bradley, 1893~1981) 장군도 “양륙전은 과거의 유산”이라는 입장을 보였으며, “해군과 해병의 임무 중 (새로 창설된) 공군이 대신할 수 없는 것은 없다”며 해군과 해병대의 축소 혹은 해체를 지지했다. 심지어 해병과 같은 입장에 처한 해군조차 해군항공단을 보호하기 위해 정치적 거래로 해병대 축소를 받아들이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에 미 해병대의 첫 4성장군(대장)인 알렉산더 밴더그리프트(Alexander Vandergrift, 1887~1973) 사령관은 이 상황에서 미 의회의 지지를 얻어 난국을 타개해보기로 결정했다. 그는 1946년 5월 6일, 상원 해군위원회로 찾아가 호소가 담긴 애절한 연설을 했다. 이 연설에서 그는 “해병대가 쓸모없어졌다는 전쟁부(육군성/국방부의 전신)의 주장 하나로 해병대가 사라져서는 안 되며, 입법부에 의해 탄생한 해병은 입법부에 의해 그 운명을 결정 받을 권리가 있다. 170년간 국가를 위해 헌신한 해병대를 설령 해체하더라도 그 명예와 자존심은 마땅히 지켜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이 ‘제독의 반란’ 사건은 트루먼 대통령이 존슨 장관을 해임하면서 한 발 뒤로 물러서 해군과 해병대의 존속이 결정됐지만, 결과적으로는 신규 창설된 공군에게 힘이 실리며 트루먼 행정부가 정치적인 승리를 하는 형태로 끝났다. 어쨌든 해체의 위기를 넘긴 미 해병대는 전차, 장갑차, 전투기, 경항모까지 보유하면서 양륙전과 항공전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는 종합 원정부대로 다시 태어났으며, 강한 군기와 전투태세로 미 육군 보병부대보다 강력한 전투력을 자랑하는 긴급 전개 및 긴급 대응 특화 부대가 되었다. 다른 나라와 달리 지휘권이 독립적인 미 해병대는 원수를 배출한 적은 없지만 대장이 사령관을 맡고 있으며, 2005년에는 피터 페이스(Pater Pace, 1945~) 대장이 첫 해병 출신 합동참모본부 의장을 지냈다. 미 해병부대 중 오키나와에 주둔 중인 군단급의 미 제3해병기동원정군(III-MEF: III-Marine Expeditionary Force)은 유사시 한반도에 일차적으로 전개되는 부대 중 하나이며, 대한민국 해병대와 연합해병기동원정군(CMEF)을 구성한다.

대한민국 해병대는 국군 창설 후 상륙전 전문부대의 필요성이 제기됨에 따라 1949년 4월 15일에 창설됐다. 신현준 중령(해병 중장 예편)을 초대 사령관으로 한 해병대는 최초 2개 대대 규모로 편성됐으며, 한국전쟁 전까지는 주로 무장공비 소탕 등의 대 게릴라전 중심의 임무를 소화했다. 6.25 전쟁 발발 이후인 1950년 8월 17일에는 통영 방면에서 해병대 1개 중대가 북한군 1개 대대를 격퇴했는데, 이때 종군기자였던 마거릿 히긴스(Marguerite Higgins, 1920~1966)가 “귀신 잡는 해병대(Ghost-catching Marines)”라는 제목으로 이 전투를 보도하면서 그대로 해병대의 별명이 되었다. 이후 전쟁 기간에 증편된 해병대는 에드워드 아몬드(Edward Almond, 1892~1979) 소장의 제10군단에 배속되어 활약했으며, 인천상륙작전 이후 서울을 수복하면서 중앙청에 태극기를 꽂고 전쟁 말까지 ‘단장의 능선(Heartbreak Ridge)’ 전투를 비롯한 주요 전투에서 분투했다. 베트남 전쟁 때는 남베트남 공화국 지원을 위해 “청룡부대”가 파병되어 1972년까지 활약했다. 이후 해군에 통합 편성됐던 해병대는 1987년부로 다시 해군에서 분리되어 해병대 사령부를 창설한 후 독자적인 지휘권을 행사하며 연평도를 비롯한 서해 5도의 수비를 책임지고 있다. 해병대는 특히, 연평도 포격사건 이후 서북도서 방위사령부를 창설한 후 국가 전략기동부대로 임무를 수행 중이다.

앞서 말했듯이 해병대는 시대가 흐르면서 전쟁 기술과 교리, 무기의 발달 때문에 여러 차례 성격이 바뀌기도 했고, 폐지의 위기에도 몰렸다. 최초의 해병은 선상 전투를 전문 부대의 성격으로 가졌지만, 조선술의 발달과 해상 무기의 발달 때문에 이 임무는 오래 전에 사라졌다. 해병대에 부여된 그다음 임무는 해상에서 육지로 공격을 실시하는 양륙작전 중심이었지만, 냉전 이후 수송 수단과 장거리 타격 능력이 발달하면서 전문적인 양륙전 부대를 별도로 유지할 필요성이 없어져 일부 국가에서는 해병대를 해체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테러와의 전쟁” 이후 전 세계 각지에 대한 주요 국가들의 해외 개입 상황이 늘어나면서 미군이나 프랑스, 영국군처럼 원정작전에 특화된 독립 전투부대로 진화한 경우도 있고, 여전히 도서지역 작전과 양륙 작전이 중요한 우리나라의 경우는 양륙 기동부대의 성격을 갖고 있다. 최근 중국과 영토 마찰이 붙은 일본의 경우도 조어도처럼 본토 열도에서 떨어진 섬 등을 방어하기 위해 해상자위대 예하에 해병대(육전단) 설치를 검토 중이다. 어쩌면 환경의 변화에 따라 필요한 임무에 맞춰 변혁해 온 해병이야말로 가장 시대의 흐름에 빨리 적응해 온 군대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