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역발상 대가들… 이병철·정주영 등 ‘국리민복’ 이념 실천

지난 1930년 가을, 조선의 혼마치(명동) 미쓰코시 백화점. 시인 이상을 사로잡은 이 화려한 쇼핑의 공간은 욕망의 집어등이었다. 매장을 가득 채운 상품, 제복으로 복장을 통일한 친절한 점원들, 화려한 조명은 조선인들을 사로잡았다.

일본 기업가들은 탄탄한 자본력, 마케팅 노하우, 정부지원을 등에 업고 시장을 잠식해 들어갔다. 일제강점기, 조선의 기업가들은 늘 불리한 환경에서 생존을 도모해야 했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었다.

하지만 성실, 신용, 타고난 기업가 정신으로 위기를 기회로 바꾼 이들도 있었다. 그 선두주자는 덕원상회를 운영하던 유통왕 최남. 그는 일본의 대형 백화점에 맞서 토종 백화점을 설립한 야심찬 인물이었다.

최남이 던진 승부수는 과감한 인재수혈. 미쓰코시에 근무하는 일본인 전문가 와타나베를 상대로 줄기찬 러브콜을 보낸 그는 이 일본 백화점 특유의 마케팅 기법을 전수받는 데 성공한다.

덕원상회를 운영하며 터득한 유통 노하우에다, 일본인 마케터의 도움으로 자신감이 붙은 그는 동아백화점을 연다. 경성은 일본 미쓰코시, 미나카이를 비롯한 일본 백화점의 독무대였다.

그는 덕원상회를 발판으로 동아백화점, 국일관 등을 경영하며 일제 강점기 조선재계를 대표하는 기업인으로 성장했다. 최남이 갑부의 반열에 오를 수 있던 이면에는 과감한 도전정신이 있다. 조선의 미곡왕으로 이름을 날리던 김복천도 무일푼으로 출발해 현재 가치로 1000억원대의 자산을 모은 인생역전의 주인공이었다.

일본 상인들이 조선의 쌀을 대량 수입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한 뒤 일본에 건너가 수출 시장을 직접 개척했다. 최창학은 미국의 골드러쉬에 비유되던 1930년대 황금광 시대를 수놓은 조선의 금광왕으로 유명한 거부였다.

백수건달이던 그는 일제말기 운좋게 금광을 발견해 일본재벌인 미쓰이, 미쓰비시에 매각해 갑부의 반열에 오른다.

30대 중반부터 금광을 찾아 전국을 주유한 그는 사업가적 기질이 다분했다. 금을 직접 캐는 방식으로 큰 돈을 벌수 없다고 본 그는 금광 주변의 땅과 산천을 사들인다. 그리고 이 소문을 듣고 몰려온 이들을 상대로 일정 지역을 임대해 개발을 맡기는 방식으로 200만원에 달하는 거액의 돈을 벌어들인다. 물론 알짜배기 금광은 직접 개발했다.

최창학은 금광 사업으로 경성방직의 김연수, 화신백화점의 박흥식, 부동산 부자 민대식 등을 제치고 단숨에 최고의 부자 반열에 오른 인생역전의 주인공이었다. 최남, 김복천도 과감한 도전정신으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한 거부들이었다. 두산그룹의 모태인 박승직 상점을 창업한 보부상 박승직도 빼놓을 수 없다.

조선시대 초기, 부마를 배출한 명문가 출신이던 그는 사서삼경을 비롯한 서책을 내려놓고 보부상의 길을 걸으며, 훗날 두산그룹의 기틀을 닦는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기업가의 사회적 책무에 눈을 뜨고 이를 앞장서 실천한 이들은 드물었다. 신용, 근면 등 프로테스탄트의 윤리에는 눈을 떴으나, 사회공헌은 이들에게는 아직 생소한 단어였다.


최창학, 금광 투자로 조선 최고 갑부 등극

부동산 거부 백선행은 이런 점에서 이례적인 사업가였다. 수원이 고향으로 16세때 남편을 잃고 홀로된 청상과부인 그녀는 타고난 재테크 감각으로 수백억에 달하는 자산을 모았다.

그녀에게 날개를 달아준 자산이 부동산이었다. 그녀는 생활고로 타향으로 떠나는 이들에게 땅을 헐값으로 사들여 재산을 불렸다.

또 시멘트의 원료인 석회석이 풍부한 만달산을 매입해 일본인 사업가에게 되팔아 엄청난 차익을 남긴다. 경성을 비롯한 대도시는 새로운 건물들이 우후죽순으로 들어서고 있었고, 이러한 변화에서 재산을 늘릴 기회를 엿본 것. 이 여성 거부의 재부활동의 백미는 부의 사회환원. 그녀가 타계하기 전까지 사회에 환원한 돈이 무려 31만 6000원.

요즘 가치로 환산하면 300억원이 훌쩍 넘는 거액이다. 장학 사업에도 18만원을 쾌척해 세상을 놀라게 만든 백씨가 1933년 타계하자, 평양 시민들이 시내 중심가에 모여들어 그녀의 죽음을 애도할 정도였다.

“먹기 싫은 음식을 먹고, 입기 싫은 옷을 입고, 하기 싫은 일을 한다”평양 최고의 부자로 통하던 백씨는 ‘돈을 벌어야 한다’는 개인적 욕망에 머물지 않은 선각자였다.

청부의 주인공하면 떠오르는 또 다른 인물이 유한양행을 설립한 유일한 박사이다. 그가 이 회사를 창업한 뒤 윌로우(Willow)구락부라는 공제회를 만든다. 미국에서 유학을 한 그는 자본주의의 심장부인 미국기업들의 사회공헌에 정통했다. 그는 사원들에게 주택자금을 융자해줬으며, 교육비 지원폭을 넓혀 나갔다.

유일한 박사는 돈벌이에 몰두하는 기업가들과 달리, 국권상실이라는 암울할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다. 미국에서 항일무장독립군인 맹호군을 창설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전범이 된 유일한

유 박사는 또 사재를 헌납해 유한학원을 설립했다. 평생을 기업가이자, 교육자, 사회사업가로 산 유일한 박사가 남긴 유언장은 다시 한 번 한국사회를 감동시킨다.

전 재산을 학교 재단에 기부하고, 아들에게는 자립하라는 내용을 남긴 것. 한때 사회 일각을 풍미한 ‘유산 남기지 않기 운동’은 그의 이러한 정신을 본받으려는 취지에서 비롯됐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정성껏 좋은 상품을 만들어 국가와 동포에 봉사하고, 정직성실하고 양심적인 인재를 배출한다. 일자리를 만들고, 정직하게 납세하며, 그리고 남은 것은 기업을 키워 준 사회에 환언한다” 그는 일찌감치 나눔과 상생의 문화를 앞장서 실천한 기업인이었다. 삼성그룹을 창업한 고 이병철 회장도 기업가의 사회적 책무를 고민한 경영자였다.

그는 사업보국의 깃발을 높이 들고 국리민복(國利民福)의 기틀을 놓은 선각자였다. 이병철 회장이 지향하는 목표가 바로 사업보국이었다. 그는 기업을 동포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것으로 규정했다. 나라에 이롭고 국민에 복이 되는 사업을 일으키고, 발전시키는 것을 사명으로 삼고 이를 실천해온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국제 정세에 어둡고 뒤떨어져 망한 조선을 부국강병의 길로 이끌 사업보국의 이념은 그렇게 등장했다 그는 나라를 만사의 기본으로 보았다. 나라가 잘 돼야 기업도 잘될 수 있다는 사업보국의 이념은 암울한 식민지 현실에서 태동했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도 사업가적 감각을 타고난 경영자였다. 서산 간척지 개척, 주베일 항만 공사를 비롯해 한국 기업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무용담들이 오롯이 그의 몫이다.

그는 판문점을 통해 소떼를 몰고 방북하며 남북 화해협력에도 거대한 족적을 남긴 경영자이다. 이밖에 고 최종현 SK그룹 회장도 숲 가꾸기, 장묘문화개선 등 늘 기업가의 사회적 책무에 관심을 기울이던 경영자이다.

김한원 경희대 경영학부 교수는 “이들은 위기를 새로운 도전의 기회로 삼는 역발상과 창조적 사고의 소유자였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를 지닌 기업인들이었다”고 평가했다.

대한민국 근대 이후 부자들

■최남
동아백화점 창업자
인재라면 국적을 가리지 않고 영입

■김복천
미곡수출왕
일본을 직접 찾아가 수출선 개척

■최창학
금광왕
30대 중반부터 금광 찾아 전국 주유

■백선행
부동산 갑부
종잣돈으로 유민 부동산 집중

■유일한
유한양행 창업자
정재계에 밟이 넓고 사회적 책무 다해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자 젊은 시절 국내외 다니며 견문 넓혀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자
천재적 발상으로 위기를 기회로 전환

■최종현
SK그룹 창업자
수펙스 등 도요타식 마이크로 경영 선보여

박영환 기자 yunghp@asia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