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맞은 지 얼마 안 돼 동네 지인과 자주 이용하는 실내포장마차에 간 적이 있었다. 한창 손님들로 북적거려야 할 저녁 황금시간인데도 웬일인지 매장 안에는 한두 테이블에만 사람이 있는 것이 영 썰렁한 분위기였다.

홀 서빙을 맡은 종업원에게 “아니, 왜 이리 손님이 없어요?”라고 물었더니, 돌아온 대답은 ‘흡연 금지’ 때문이란다.

그랬다. 올 1월부터 매장 면적 규모와 관계없이 모든 휴게음식점과 일반음식점, 제과점에서 담배 피우는 게 전면 금지된 것이다. 손님이 매장에서 담배를 피우다 적발되면 개인 흡연자에게 과태료 10만원, 금연을 막지 못한 영업주는 1차 위반 시 170만원, 3차 이상 위반 시 500만원의 과태료가 붙는다.

하루 100만원 어치 매출을 올리는 것도 버거운 동네 음식점에서 ‘배보다 배꼽이 큰’ 금연위반 벌금 한 방으로 하루 장사를 망칠 업주가 누가 있겠는가. 손님 또한 아무리 애연가일지라도 한 개비의 유혹에 굴복해 4500원짜리 담배 22갑을 몽땅 날려버릴 손해 볼 짓을 하진 않을 것이다.

같이 자리했던 지인도 흡연자인지라 ‘니코틴 보충’을 위해 서너 번을 추운 밤공기를 쐐가며 들락날락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당연히 지인의 입에서 좋은 소리가 나올 리가 없었다. 당장 “무슨 놈의 나라가 흡연자를 범죄자로 보느냐”며 목에 핏대를 세우더니, 급기야 “정부가 아예 담배 판매를 금지하던가, 담배를 피우라고 팔면서도 흡연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주지 않는 게 말이 되느냐”며 격하게 성토했다.

사실 필자는 12년 전부터 담배와 ‘절연(絶緣)’해 온 터라 담배 연기를 싫어하고, 흡연자들의 찌든 담배 채취에 질색한다. 또한, 흡연 인구가 늘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국민 중 한 사람이다.

소비자단체나 담배업계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흡연 인구는 대략 1000만명으로 추정한다. 전체 국민 5명 중 1명이 ‘끽연족(喫煙族)’인 셈이다. 이 가운데 남성은 절반에 가까운 43.7%, 여자는 7.9%가 담배를 핀다(2012년, 보건복지부 통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34개 회원국 중 최고의 흡연율을 기록하고 있다.

담배의 폐해성도 익히 알려져 있다. 세계 공중보건의 기념비적인 보고서로 유명한 지난 1964년 미국의 ‘테리 보고서’는 그 이전까지 흡연의 건강 위해성 논란에 종지부를 찍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테리 보고서의 요지는 세 가지다. 흡연자의 사망률은 비흡연자보다 70% 높고, 흡연과 폐암의 상관관계가 다른 요인보다 높으며, 만성기관지염·폐기종·심장병과도 연관성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우리나라도 지난 1990년대부터 정부 차원의 폐암 사망률 줄이기에 나서 금연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오고 있다. 20년가량 지나면서 이제 우리나라에서도 가정 및 공중장소에서의 금연문화는 일반화돼 있다.

그럼에도 정부의 금연정책에 선뜻 박수를 보내지 않는 이유는 우리 사회가 드러내는 정책 수행 메커니즘의 배타성 때문이다. 한마디로 ‘흡연은 나쁘고 정부의 금연정책은 옳으니 무조건 흡연자는 금연해야 한다’는 일방통행식이다.

설사 정부 금연정책의 명분에 99% 찬성하더라도 그 정책을 입안하고 실행하는 프로세스에서 과연 흡연자를 위한 최소한의 배려가 반영되었는지 의문이다.

매년 줄고 있지만 국내 흡연인구 수는 여전히 전체 국민의 20%에 해당하는 1000만명에 이를 정도로 수적 비중이 높다. 비록 모든 음식점의 금연정책을 유예기간을 두고 진행했더라도 금연은 ‘무조건’ 나쁘니까 ‘모든’ 음식점에서 흡연자는 ‘일절’ 담배 피우지 말라는 식의 정부 행정은 마치 1920년대 미국의 금주(禁酒)법(The Prohibition Law)을 연상하게 한다.

미국 정부는 1919년 금주법을 시행하면서 제1차 세계대전 뒤 부족한 곡물을 메우기 위한 명분을 내걸었지만, 불행히도 밀주를 양산해 술 가격을 폭등시켰고 저질 술, 가짜 술이 판치면서 오히려 경제난을 술로 달래던 서민들의 건강과 목숨을 앗아가는 부작용을 낳았다. 여기에 마피아 같은 범죄조직(갱단)들이 가세해 검은 자금의 한 축으로 작용했을 정도였다. 결국, 1929년 대공황기에 금주법 폐지를 대선공약으로 내걸고 출마한 루스벨트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금주법은 1933년 종언을 고했다.

금연법과 금주법을 동일한 잣대로 비교하기엔 무리가 있지만, 둘 다 당시 시대 상황에서 비슷한 ‘공익(公益) 명분’을 내걸었다는 점에선 유사하다.

한국 사회는 종종 수적 우위를 전체의 우위로 간주하고, 이를 공익의 이름으로 공권력을 행사하는 경향성이 있다. 다수결의 원칙을 민주주의의 절대원칙으로 신봉한다는 것이다. 소수자의 이해와 견해를 무시하거나 때론 억압하는 집단주의적 강제성을 휘두른다.

얼마 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황상익 교수가 한 포럼 기고문에서 ‘흡연의 해악은 학술적으로 재론의 여지가 없지만, 그것이 ‘금연 천당, 흡연 지옥’을 외칠 정도로 전체주의적 모습을 띠어도 과연 괜찮은 것인지 의문이 든다’고 제기한 반론과 일맥상통한다.

다행히 음식점의 전면 금연 이후 서울시 광진구가 실외 흡연부스 2곳을 설치하고, 중구도 연내 흡연부스를 검토하는 등 흡연자를 배려하는 움직임을 서울시 일부 자치구에서 보여 작은 변화를 기대해 본다.

실외 흡연부스뿐 아니라 일정 면적을 갖춘 음식점에 흡연 공간 설치를 의무화해 흡연권을 충족시켜 주는 동시에 ‘금연 마일리지제’를 만들어 음식점이나 공공장소에서 금연을 실천한 흡연자에게 금연교실 등 프로그램 참가비용을 보조해 주는 등 포지티브 지원정책을 실시해 보면 어떨까. 다시 강조하지만, 필자는 금연주의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