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은 애플에게 있어 최고의 해였다. 아이폰과 아이팟, 아이패드 등 애플이 내놓은 스마트 디바이스가 3연타석 홈런을 때렸기 때문이다. 애플의 스마트 디바이스가 연달아 성공을 거둔 것은 스티브 잡스의 환상적인 프레젠테이션이나 디바이스들마다 독특하고 뛰어난 성능이 원인이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바로 심플하지만 혁신적인 디자인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사실이 있다. 미국 애플 본사는 제품의 기술 개발이나 마케팅에만 관여하고 디자인에 대한 전반적인 사항은 중국이나 대만 등 아시아 지역에 퍼진 금형(제품 제작에 사용되는 금속 틀을 만드는 것) 하도급 업체에 일임한다는 것이다.

제품의 틀을 디자인하는 금형기술은 소비자들로부터 제품의 선호도를 평가받을 수 있는 가장 기초적 단계의 첨단 산업으로 재인식되고 있다.


사실은 다르다. 애플의 심플한 디자인을 고안해내고, 이를 그대로 실물로 옮긴 것은 중국인 디자인 하도급 업자의 솜씨가 아니라 미국 애플 본사의 전문가 솜씨였다. 이미 미국 애플 본사는 최고 수준의 금형기술 전문가와 디자인 전문가를 보유하고 있었다.

미국의 애플이 이렇게 손을 쓰고 있는 사이, 우리의 현실은 너무나 어두웠다. 애플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 지난 10여 년간 우리는 금형기술에 대한 관심을 끄고 살았다. 제품을 직접 만드는 업체가 금형 사업에 직접 손대는 것이 아니라, 중소업체에 아웃소싱으로 맡기는 수준에 불과했다.

국내 양대 전자기기 업체이자 휴대전화 제조 브랜드인 삼성전자와 LG전자는 이미 1990년대 후반에 공식적으로 금형 사업에서 손을 뗐다. IMF 외환 위기로 인해 구조조정이 필요했고,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사업을 다른 중소업체에 매각한 것이다. 그랬던 두 업체가 지난해 하반기 들어서 다시 금형기술에 투자하기 시작했다. 두 업체는 왜 지난 10여 년간의 무관심을 접고 다시 금형기술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일까?

완제품 품질 경쟁력 제고 필요성

삼성전자는 지난 10월 총 예산 1400억 원을 투자해 연면적 19590㎡, 지상 2층 규모의 정밀금형개발센터를 광주광역시에 세웠다. 세계 최고 수준의 금형기술 개발 클러스터다. 이곳에서는 광주·전남지역 대학과 연계한 금형 기술 인재 육성, 금형 신기술 개발 등이 진행 중이다.

삼성전자는 2012년까지 금형개발센터에 약 1600억 원을 추가로 투자해 금형제작 전 공정 자동화, 신공법·신기술 개발, 초정밀·고품질 금형기술 개발, 금형 관련 원천기술 확보 등에 적극적으로 나설 예정이다.

LG전자도 경기도 평택시 디지털파크 내 생산기술원 산하 2만6400㎡ 대지에 연면적 11500㎡ 규모로 금형기술센터를 설립하기로 했다. 이르면 올해 여름부터 본격 가동될 금형기술센터에는 휴대폰 등 소형 금형과 TV·냉장고·세탁기 등 중대형 금형을 개발·생산할 수 있는 초정밀 금형제작 첨단 설비 및 시험 사출기들이 확보된다.

LG전자 역시 금형기술센터의 운영을 통해 초정밀, 고생산성의 금형기술을 내재화시키고 금형 관련 R&D를 강화시켜 금형 개발기간을 기존 대비 50% 이상 단축하겠다는 가시적인 목표를 세우고 있다.

정부에서도 금형기술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고 지원의 폭을 늘리기 시작했다. 지난해 10월 지식경제부는 2014년까지 금형기술 등 기초 정밀 산업과 IT 융합 사업 육성에 1900억 원의 예산을 들여 지원하기로 결정한 바 있다.

자칫하면 중화권 기술 추월 위기감

금형기술에 대한 시장의 태도가 달라진 이유는 간단하다. 금형기술이 점차 완제품의 품질 경쟁력을 결정하는 핵심 요소로 부각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스마트 디바이스의 디자인과 외형적 품질에 대한 경쟁이 치열한 상황에서 더 이상 금형기술을 무시했다가는 더 큰 실패를 맛볼 수 있다는 위기의식도 태도 변화에 한몫을 한 것으로 보인다.

지난 10여 년간 무관심으로 일관했던 전자업계가 금형기술에 대해 다시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사진은 지난해 10월 광주에 설립된 삼성전자 정밀금형개발센터 전경.

삼성과 LG가 10여 년 전 지엽적 시각에서 판단했던 것들은 모두 빗나갔다. 실제로 국내 대기업들이 금형기술을 무시하고 외부 업체에 아웃소싱을 맡긴 사이 국내 금형기술의 경쟁력은 빠른 속도로 취약해졌다. 반대로 다른 나라의 금형기술은 눈부신 성장을 기록했다.

감덕식 LG경제연구원 책임연구원은 “협력사인 애플 본사의 성공을 본 중국과 대만이 빠르게 각성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감 연구원은 “아이폰 협력사인 혼하이와 폭스콘 등 중화권 기업의 금형기술 향상 속도가 매우 빠르다”면서 “이는 금형기술에 대한 꾸준한 투자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하지만 우리의 경우 근본적으로 금형기술이 발전하기 힘든 환경”이라고 꼬집었다.

두 업체의 수장들이 금형기술에 대해 관심이 높다는 점도 금형기술에 대한 재투자를 불러 일으켰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1990년대 중반부터 ‘디자인 경쟁력’을 강조했던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지난 2003년 “금형기술이 좋아야 좋은 물건이 나온다”는 말을 언급한데 이어, 수차례에 걸쳐 금형기술과 제품 디자인에 대한 관심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LG전자의 수장인 구본준 부회장 역시 제품에 대한 디자인과 품질의 완성도를 중시하는 인물 중 하나다. 구 부회장은 취임사에서 “품질은 생존의 조건이며, 고객과 타협할 수 없는 것”이라며 “품질을 놓치면 생존기반을 잃는다는 각오를 새겨 달라”고 언급할 정도로 품질의 완성도를 강조했다.

세계적 명품 ‘황금알 잉태하는 기술’

전문가들은 금형기술을 단순한 기초 산업으로만 판단할 것이 아니라, 더 큰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첨단 산업으로 인식을 전환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김세종 중소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한국의 스마트폰이 뛰어난 통신 기술에도 불구하고 외산 스마트폰에 완승을 거두지 못하는 이유는 디자인에서 뒤처지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김 위원은 “디자인에서 승부를 보기 위해서는 금형기술에 대한 지속적 투자가 필요하지만 우리나라는 이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다”고 말했다. 그는 “금형기술이 발전해야 첨단 산업의 열매도 크게 볼 수 있다”면서 “과감한 인식 전환과 투자가 없다면 금형기술의 발전도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복득규 삼성경제연구소 연구전문위원은 “금형은 제품 어필을 위한 디자인을 구현하는 고부가가치 정밀기술”이라고 말했다. 복 위원은 “고객은 물건의 생김새와 촉감 등을 면밀히 따져가면서 구매를 결정하게 되는데 바로 이것이 금형기술에 달렸다”면서 “금형기술에서 호평을 얻는 나라만이 세계적인 명품을 만들 수 있다”고 지적했다.

정백현 기자 jjeom2@asia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