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 최고사령관을 지냈고, 훗날 프린스턴 대학교 총장과 NATO 사령관을 거쳐 미국 대통령까지 오르게 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D. Dwight Eisenhower) 원수에게는 존 아이젠하워(John D. Eisenhower, 1922~)라는 외아들이 있다. 지금도 전쟁 역사가로 활동 중인 그는 자기의 부친이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시행하던 1944년 6월 6일에 웨스트포인트(West Point) 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했다. 아이젠하워의 자서전을 보면, 아들 존 아이젠하워는 사관생도 시절 “아버지를 보면서 나도 군인이 되겠다고 결심했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다른 무엇보다 훌륭한 사람들과 함께 일한다는 자부심에 만족하셨고, 나 또한 그럴 수 있다면 진급은 상관하지 않을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라며 군인의 길을 결심했다고 소개됐다.

안타깝게도 이렇게 의욕이 충천했던 신임 소위의 앞길은 아버지 때문에 순탄하게 풀리지 못했다. 부친인 아이젠하워 장군이 연합군 최고사령관이 된 후 유럽 전선을 밟은 그였지만, 혹시라도 전투 중에 아들이 전사하거나 독일군에게 포로로 잡힐 경우 ‘최고사령관’의 심기가 흐트러져 판단력이 떨어질 것을 우려한 연합군 지휘부가 존 아이젠하워 소위를 후방으로 전출시켜버렸기 때문이다. 5년 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한국전쟁이 터졌을 때에도 그는 대대장이 되어 한국으로 파병을 왔지만, 이번에는 부친이 당선이 유력한 대선 후보로 출마했기 때문에 군은 그를 후방으로 보냈다. 그는 자신이 전쟁터에서 두 번이나 후방으로 밀려나는 사이 동기들은 두 번의 전쟁에서 전공을 세웠기 때문에  자신의 군 경력이 결정적으로 망가졌다고 판단했다. 존 아이젠하워는 훗날 육군 준장까지 진급했고, 아버지의 대통령 임기 중에는 국방보좌관으로 백악관에 파견 나가 있던 앤드류 굿패스터(Andrew Goodpaster) 장군의 보좌관까지 지냈을 뿐만 아니라 1963년 전역 후에는 벨기에 대사를 지내고 정계에서 활동했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 때문에 야전 군인으로서 역할을 할 수 없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두고두고 안타깝게 생각했던 것 같다. 군사 관련 역사가로 활동 중인 그는 2008년 한 기고 글을 통해 “대통령의 아들들은 전쟁조차 마음대로 참가할 수 없다”고 적었다.

전쟁터에서 위업을 남긴 지휘관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작게는 몇 명, 크게는 수백, 수천만명의 생명뿐 아니라 조국의 운명까지 책임졌다. 하지만 아버지의 길을 보면서 함께 군인의 길을 걷게 된 “장군의 아들들”은 운명이 많이 엇갈린 듯하다. 혹자는 아버지를 뛰어넘기도, 또 누군가는 아버지에게 가리기도 했지만 어쨌든 공통적인 점은 이들 모두 아버지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군인으로서 두각을 나타냈지만 아버지의 위상에 가려 잘 알려지지 못한 케이스들도 꽤 흔하다. 예를 들자면 히틀러로부터 “연합군 장성 중 가장 위험한 사나이”라고 지목됐던 조지 패튼(George S. Patton) 장군의 아들인 조지 패튼 4세(George Patton IV, 1923~2004) 역시 군인의 길을 걸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그의 부친이 바이에른에서 사고로 사망한 이듬해인 1946년에 소위로 임관한 패튼 4세는 훗날 소장 계급까지 올라서면서 아버지가 전쟁 중에 지휘했었던 미군 제2기갑사단 사단장을 지냈다. 한국전쟁에도 중대장으로 참전했던 그는 부상으로 퍼플하트(Purple Heart, 戰傷章)를 수상했으며, 베트남 군사지원단(MAC-V)에도 참가했다가 베트남 전쟁 후 장군으로 진급했다. 소장 진급 후 독일 슈투트가르트에 주둔했던 그는 마침 슈투트가르트 시장이던 “사막의 여우” 에르빈 롬멜(Erwin Rommel)의 아들인 만프레드 롬멜(Manfred Rommel, 1928~2013)과 교류하고 지냈으며, 마침 생일(12월 24일)까지 같았던 두 사람은 패튼 장군이 사망할 때까지 친분을 유지했다.

한국전쟁 중 미 8군을 지휘하며 낙동강 전선을 사수해 역습의 발판을 마련한 월튼 워커(Walton Walker) 장군의 아들인 샘 워커(Sam Walker, 1925~) 또한 웨스트포인트를 졸업한 후 군인의 길을 걸었다. 그는 한국전쟁에 참전해 제24사단 예하 중대를 지휘했지만, 한국전쟁 중 아버지가 전방부대 순시를 위해 아차산 고개를 넘다가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비운을 겪었다. 그는 베트남 전쟁이 터지자 1보병사단 작전 참모로 참전했으며, 나중에는 중령 계급으로 1사단 제2여단을 지휘했다. 1977년 대장이 됐을 때 그는 모든 대장들  중 최연소로 계급장을 달았다.

아버지를 뛰어넘었던 ‘장군의 아들’들도 얼마든지 있었다. 그중 로빈 올즈(Robin Olds, 1922~2007) 장군도 빼놓을 수 없다. 제2차 세계대전 말엽부터 전쟁에 참가해 한국전쟁, 베트남 전쟁까지 참가한 그는 “트리플 에이스(세 전쟁에서 각각 최소 5대 이상 격추 기록 달성)” 반열에 오른 명 조종사다. 육군항공대가 공군으로 변모하는데 큰 일조를 했던 로버트 올즈(Robert Olds) 장군(육군 소장)의 둘째 아들인 그는 웨스트포인트 시절부터 풋볼 선수로 이름을 날렸고, 에이스 파일럿이었을 뿐 아니라 할리우드 여배우인 엘라 레인즈(Ella Raines, 1920~1988)와 결혼하며 화려한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베트남 전쟁에서는 “울프팩(Wolfpack)”으로 알려진 제8전투비행단을 지휘한 인물이지만, 안타깝게도 주사 문제가 심하고 상관과 마찰이 잦았기 때문에 준장 이상으로는 진급하지 못했다.

일본군이 진주만 공습을 실시했을 당시, 전함 애리조나(USS Arizona) 함에서 일본군 기습에 대항하다 함교가 피탄되면서 첫 장관급 전사자로 기록된 아이잭 키드(Issac Kidd, Sr.) 제독의 아들인 아이잭 키드 주니어(Issac Kidd, Jr., 1919~1999)는 당시 애나폴리스 미 해군사관학교 졸업을 불과 12일 남겨두고 있었다. 아들의 졸업식에 참석하려고 여행 준비를 하고 있었던 키드 제독이 진주만에서 전사하자 아들인 키드 소위는 전쟁 속에서 쓸쓸히 임관했고, 제2차 세계대전 내내 유황도를 비롯한 태평양 각지의 전선을 누볐다. 훗날 키드 주니어는 대서양함대(LANTFLT) 사령관으로 보직되면서 해군 대장까지 올랐으며, 해군 참모총장 후보로 거론되기까지 했다. 그는 전역 후 윌리엄 앤 메리(William and Mary) 대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해양법 등을 강의하며 후학 양성에 힘을 쏟았다(미군이 이란 수출용으로 건조했다가 1998년에 대만에 매각한 “키드급(Kidd-Class)” 구축함, 알레이버크급 구축함인 DDG-100 “키드 함”, 그리고 1964년에 퇴역한 플레쳐급의 DD-661 “키드 함”은 모두 다 애리조나 함에서 전사한 아이잭 키드 소장의 이름을 따왔다).

‘장군의 아들’이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전쟁 영웅이자 미 대통령을 역임한 시어도어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의 장남인 시어도어 루즈벨트 주니어(Theodore Roosevelt, Jr., 1887~1944)도 특기할만한 인물이다. 해군성 차관을 역임하다 미-서 전쟁이 발발하자 자원병을 조직해 전쟁에 참전했던 루즈벨트 대통령의 명성에 걸맞게 제1차 세계대전 때는 그의 3남 2녀 중 결혼한 장녀 하나를 제외한 온 가족이 참전한 애국자 집안이다. 이중 막내인 쿠엔틴 루즈벨트는 파일럿으로 참전했다가 전사했고, 둘째 딸은 적십자 소속 간호사로 유럽 땅을 밟고 돌아왔다. 전쟁에 참전하기 전에 이미 성공한 사업가였던 루즈벨트 주니어는 대위로 전쟁에 참전해 사비를 털어 중대원 전투화를 모두 바꿔줬을 정도로 부하들에게 자상한 지휘관이었다.

전쟁 후 귀국한 루즈벨트 주니어는 정계에 투신했으나, 민주당 소속인 오촌 관계의 프랭클린 루즈벨트(Franklin D. Roosevelt)와 뉴욕 주지사 선거부터 사사건건 부딪혔다.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대통령 당선을 막아보려던 노력이 실패한 후 그는 푸에르토 리코와 필리핀 총독 등을 지냈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예비역 대령에서 현역으로 환원되어 전쟁에 참전했다. 준장으로 진급하면서 4사단 부사단장에 보임된 그는 심장과 다리가 좋지 않음에도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직접 참가하겠다고 자원했으며, 상륙이 시작되자 병사들과 함께 지팡이를 짚은 채로 해안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사단이 잘못된 상륙지점에 상륙했으나 원래 예정된 상륙지점의 포화가 엄청난 것을 본 그는 후속 사단들을 모두 4사단 뒤로 유도해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대성공으로 그는 사단장인 레이먼드 바턴(Raymond Barton) 소장에 의해 진급 상신이 들어가 소장 진급과 함께 90사단장 보임이 예정됐지만, 상륙작전 간 심장의 무리로 결국 그날 밤 진중에서 사망했다. 루즈벨트 주니어에게는 사후 명예 대훈장이 추서됐으며, 미국 역사상 최초로 부자가 명예 대훈장을 수상한 케이스로 기록됐다(두 번째는 아더 맥아더-더글러스 맥아더 장군).

이들 외에도 대(代)를 걸쳐 조국에 헌신한 사례들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가장 잘 알려진 경우로는 한국전쟁 중 UN군 사령관으로 재직하던 중 이곳에서 외아들을 잃은 제임스 밴플리트(James A. VanFleet) 장군이 있고,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우군 폭격으로 전사한 레슬리 맥네어(Lesley McNair) 중장의 경우도 있다. 맥네어 중장의 아들인 더글러스 맥네어(Douglas McNair, 1907~1944) 대령은 제77사단 참모장이었는데, 부친이 노르망디에서 전사하고 불과 두 주 후 괌에서 일본군의 저격으로 전사했다.

위대한 부친 뒤에서는 그 그늘에 가려지기 쉬운 법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를 두고 위대한 인물이 된 부자들의 공통점은 그 누구도 선대의 이름과 후광에 기대지 않으며 스스로 가문의 이름에 걸맞은 인물이 되려고 노력했다는 점이다. 약소군대로 평가받던 미군이 20세기로 들어오면서 세계 최강의 군대로 발돋움 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이들의 헌신적인 희생 덕이 아니었나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