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코노믹리뷰 이미화 기자
 

미국이란 나라의 진가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드러나기 시작한다. 당시 미국인들은 이 전쟁에 참전하길 원치 않았다.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은 이런 사회 분위기를 이용해 ‘승리 없는 평화(Peace without victory)’라는 슬로건을 내세웠고 1916년 국민들의 지지에 힘입어 28대 대통령에 당선된다.

하지만 윌슨은 자신의 말을 뒤엎고 전쟁 참전을 선언한다. 이후 그는 어떻게 하면 국민들이 전쟁에 참전하게 만들 수 있을지 고민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설립된 것이 공공정보위원회(Committeeon Public Information)이며, 이를 통해 본격적인 선전(Propaganda) 시대가 열리게 된다. 미국인들은 선전에 압도당하고 애국주의에 광분해 결국 참전에 동조하게 된다. 이러한 윌슨의 선전 전략은 어쩌면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 대통령의 영향을 받았을지 모른다.

미국 남북전쟁이 일어나기 전, 남부지방에서는 노예를 통해 면화를 재배했고 이를 영국으로 수출하는 산업 형태였다. 반면, 북부지방은 제조업과 산업의 중심지로 발전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남부는 값싼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반면 북부는 반대의 상황이었다.

미국의 노예제도를 반대하는 대표주자는 링컨이었다. 그 결과 1860년 링컨은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 지명을 확보했다. 이듬해 4월, 노예제도를 지지하던 남부주들이 모여 미합중국으로부터 분리를 선언한다. 노예제를 반대하는 링컨 중심의 북부와 이를 허용하는 남부는 오랜 갈등을 겪은 끝에 결국 ‘미국 남북전쟁’이라는 결과물을 만들어 낸다. 당시 윌슨은 어린 시절 미국 남동부지역에 머물면서 전쟁의 참혹함을 목격했다. 그를 평화주의자로 만들어 낸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지만 자신이 속한 남부가 어떻게 전쟁에서 패배했는지도 알게 됐다.

 

1862년 미국 남북전쟁이 장기화될 것이 명백해지자 노예제도에 대한 문제의식은 더욱 일반화되기 시작했다. 당시 남부의 경제, 군사활동의 중심은 노예 노동력에 의존하고 있었고 노예제도를 폐지한다면 말 그대로 남부는 모든 활동이 마비되는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이미 남부지방은 이전부터 노예제도가 급격히 사라질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한편, 전쟁발발 직후 링컨은 노예해방에 대한 성급한 시도는 오히려 실패로 돌아갈 위험이 있다고 판단하고 시간을 뒤로 미루기 시작했다.

1862년 9월 앤티텀 전투(앤티텀 클리크 강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승기를 잡은 북부지방에 기회가 만들어졌고 링컨의 노예해방령에 대한 지지율은 더욱 높아졌다. 링컨은 1863년 1월 1일 최종적인 해방령을 발표했다. 하지만 당시 남부지방은 독립된 상태로 실제 이 선언이 남부지방의 노예제도 폐지에 즉각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그러나 북부연합이 전쟁의 승기를 잡아가고 남부지방을 탈출해 북부로 향하는 노예들은 점차 해방되기 시작했다. 이는 점차적으로 남부연합을 압박했고 해방된 노예들은 링컨을 추종할 수밖에 없었다. 1865년 전쟁은 끝나고 그 해 12월, 비록 링컨은 암살된 후였지만 노예해방선언이 공식 승인됐다.

미국 남북전쟁의 핵심은 ‘노예해방’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총칼을 겨눈 무력 전쟁도 존재했지만 링컨의 노예해방 지지는 무력 위에 군림했다고 볼 수 있다. 링컨의 ‘노예해방’을 선전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하지만 선전의 효과는 있었고 남북전쟁과 함께 윌슨의 유년 시절에 일부 영향을 미쳤다. 이는 윌슨이 향후 미국의 대통령으로 나라를 이끌어 가는 데 있어서 탁월한 역량을 발휘하는 기반이 됐다.

‘인종의 용광로’ 세계 경제도 흡수

미국의 이러한 선전 능력은 현 시대에도 흔히 볼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슈퍼맨, 배트맨, 아이언맨 등의 영웅(Hero)을 무수히 만들어내고 이를 통해 미국만이 세계를 지키는 수호자라는 인식을 심는 것이다. 외계인 침공, 지구 재난 등을 다룬 영화만 봐도 미국이 주도적으로 맞서 싸운다. 마치 세상 모든 것의 중심이 미국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듯하다.

독특한 것은 미국은 ‘이민 사회’라는 것이다. 우리나라처럼 ‘토착민’, ‘한민족’이라는 단어로 똘똘 뭉칠 수 없는 민족이다. 미국 남북전쟁 이전에 미국으로 건너온 사람들은 점차 ‘미국인’이 됐다. 하지만 1865년 이후 미국으로 온 이민자들은 이전보다 다양한 국가에서 몰려 왔다. 이는 토착 미국인들에게 불안한 요소로 작용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이렇게 미국은 다인종 사회로 출발했다. 하지만 ‘하나의 미국인’으로 만들려는 노력이 역사적으로 행해지고 이러한 노력은 ‘인종의 용광로’라는 표현에서 절정에 달한다. 문화, 종교는 물론 사상까지 모든 것을 녹여(Melting) ‘미국화’한다. 미국의 이웃나라인 캐나다가 ‘인종의 모자이크’라 불리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이민 사회지만 마치 한 민족인 것처럼 단합을 이루게 만든 '미국화'의 결정판이다.

미국은 영국의 파운드화를 밀어내고 달러를 기축통화로 만들어 통화를 ‘미국화’했다. 1970년대 오일쇼크에 당황했지만 원유의 결제 통화를 달러로 만드는 등 그에 상응하는 것을 얻었다. 이제 미국은 에너지를 ‘미국화’하기 시작했다. 셰일에너지를 앞세워 중동은 물론 냉전시대에 강력한 라이벌이었던 러시아(구 소련)를 압박한다. 싼 에너지를 맘껏 쓰라며 모든 제조업은 미국으로 오라고 손짓한다. 실제로 셰일가스의 개발이 활성화돼 2007년 미국의 천연가스 가격은 러시아의 80% 수준이었지만 최근에는 20% 수준까지 급락했다. 이 과정에서 독일 최대의 화학업체 바스프, 오스트리아 철강업체 푀슈탈피네 등 에너지를 많이 소비하는 제조업체들이 값싼 에너지를 찾아 러시아를 떠나 미국으로 몰렸다. 제조업의 ‘미국화’가 이뤄지는 셈이다.

결국, 세계 경제성장의 중심은 미국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미국은 수많은 위기를 거치면서도 ‘미국화’와 이를 뒷받침하는 ‘선전’ 능력으로 더욱 강해진다. 이를 방증하듯 대다수의 국내 연구기관들은 미국의 향후 경제 전망을 긍정적으로 내다보고 있다.

 

1972년 2월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했다. 반공주의자로 유명한 닉슨의 행동에 세계가 놀랄 수밖에 없는 사건이었다. 당시 미국은 여전히 세계 최강국이었으나 베트남 전쟁 등의 피로가 극에 달했다. 특히, 베트남 전쟁으로 인해 미국은 53만6000명의 참전 병력 중 3만500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165만톤에 이르는 폭탄을 퍼붓고 500여대의 항공기가 손실됐다. 게다가 연간 200억달러에 달하는 전쟁비용은 미국 경제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GDP 대비 국방비의 비중은 1966년 7.9%에서 1967년 9.0%, 1968년에는 9.7%로 점차 늘었다. 이렇다 보니 미국 내 반전운동이 확대되고 여론도 이에 동조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새로운 활로가 필요한 상황이었으며 그 대상이 바로 ‘중국’이었다.

 

1960년대에 들어 중국과 소련은 미묘한 갈등을 보이기 시작하고 이 관계는 1969년 국경분쟁으로 치달으면서 중국의 위기감은 극에 달하기 시작했다. 이에 중국은 1970년대에 들어 고립을 피하기 위해 미국과 화해의 제스처를 취하기 시작한다.

이동률 동덕여대 중어중국학과 교수는 ‘1972년 중국의 대미 데탕트 배경과 전략’ 보고서를 통해 “중국은 1970년대 외교적 고립과 위협에서 탈피하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3개 세계론’을 주창했다”며 “미·소 양 패권국에 대항할 수 있는 견제세력으로 제3세계 국가들과 반패권 통일전선을 가치로 관계발전을 모색했다”고 전했다. 그는 이어 “중국은 소련의 팽창에 대한 위기의식이 최고조에 달했고 그 대안으로 미국과 관계 개선을 모색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당시 중국은 미·소 양 초강대국으로부터 협공의 위협에서 탈출하고자 미국의 데탕트(긴장완화) 제안을 수용하는 전략적 도박을 감행했다는 것이다.

무겁지만 빠른 나라 중국, 그러나 ‘쉬어 간다’

중국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인구’다. 현재 중국의 인구는 약 14억명으로 추정되고 있어 전 세계 인구 60억명의 25%에 해당된다. 이 때문에 전 세계가 중국의 성장에 목을 메는 것처럼 보인다.

일반적으로 한 나라의 인구가 많을수록 이를 다스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이를 통제하기 위해 중국은 ‘사회주의’가 반드시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민주주의 대비 사회주의 폐쇄적 성향이 중국의 움직임을 더욱 굼뜨게 만들 수 있지만 생각보다 중국 정부의 판단력은 상당히 빠르다. 지난 2012년 2월 시진핑 당시 중국 부주석은 미국을 방문해 중·미 관계의 새로운 구상을 제시했다. 닉슨의 중국 방문을 연상케 하듯 이번에는 40년 만에 중국이 미국으로 향했다.

이동률 교수는 “중국의 대외정책에서 가장 중요한 목표는 국가 안보”라며 “중국은 안보에 최대 위협이 누구인가 하는 판단을 바탕으로 강대국과의 관계에서 우군과 적군을 명확히 하는 ‘우적개념’의 변화에 따라 대외 정책을 결정했다”고 밝혔다.

중국에서 제시하고 있는 이른바 ‘외교이론’에 따르면, 1950년 말까지는 양대진영론에 따른 소련일변도 외교, 1960년대에는 세계 혁명론에 근거한 반제반수(反帝反修)의 반미반소전략(反美反蘇戰略) 그리고 1970년대에는 3개 세계론을 기치로 한 반소 국제통일전선전략으로 변화가 진행됐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을 고려할 때 시진핑의 미국 방문은 중국 주도의 데탕트가 시작되고 있음을 뜻한다. G2라 불리는 중국의 국력과 국제적 위상이 수면 위로 드러난 것이다. 이와 함께 중국은 전략적 선택의 폭을 넓히기 위한 노력도 병행하고 있다. 서방국가들의 제제를 당하고 있는 러시아는 물론 과거 불편한 역사를 뒤로 한 채 인도와의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려는 분위기다.

최근 중국은 우리나라와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하는 가하면 후강퉁 제도를 실시하면서 시장을 개방하려는 움직임도 관측되고 있다. 이와 함께 중국 정부는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해 구조 개혁에 무게를 둘 것을 천명했으며, 지난 9일부터 중앙경제공작회의를 열고 내년 경제 성장률을 7%로 결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즉, 변화의 시기를 앞두고 성장을 포기하는 빠른 판단을 내린 것이다.

 

이어령 작가의 소설 <축소지향의 일본인>은 일본에 대한 객관적인 사실을 뛰어넘어 일본의 역사와 문화는 물론 문제점까지 적나라하게 표현한 책이다. 제목에서 느껴지는 그대로 일본은 축소지향을 통해 경제발전을 이뤘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일본의 대표 전자회사인 소니의 ‘워크맨’이다. ‘워크맨’은 소니의 등록상표로 지난 1979년 휴대용 스테레오 카세트 플레이어의 형태로 출시됐다. 손 안에 쥘 수 있는 즉 ‘축소지향’의 음향기기가 탄생한 것이다. 이는 현 시대에 존재하는 모든 휴대용 기기들의 모태가 됐을 정도다. ‘워크맨’이 출시됐을 당시 일본의 전자산업계는 붐을 이뤘고, 우리나라의 대형 전자회사들도 유사 제품을 양산하기 이르렀다. 하지만 경쟁사들의 제품 확대와 함께 2000년대에 MP3가 등장하면서 ‘워크맨’의 수요는 감소한다. 축소지향 일본의 경제와 문화는 소니와 함께 했던 것일까? 아니면 우연의 일치일까? 한국은행에 따르면 일본의 1970~1980년대 경제 성장률은 연평균 4.5%에 달했지만 1990~2000년대에는 0.8%대로 떨어졌다.

 

반면, 이어령 작가는 저서를 통해 “일본이 확대를 지향할 경우 언제나 패배했다”고 말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으킨 임진왜란이나 20세기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것 모두 일본의 패배로 돌아간 것은 사실이다.

일본 양적완화, ‘패배’할 것인가

지난 11일 국제신용평가사 피치가 내년 초에 일본의 장기 국가신용등급을 한 단계 강등할 전망이라고 로이터통신이 보도했다. 일본이 추가 소비세율 인상 시기를 1년 반 연기하면서 재정 건전화 목표를 달성하기 어려워졌다는 것이 그 배경이다. 일본 아베 신조 총리가 대규모 양적완화를 시행하고 있지만 경제가 기대만큼 회복되지 않고 있는 것도 문제다.

대규모 양적완화로 인해 엔달러 환율는 지난 11일 기준 118.23엔을 기록했다. 아베노믹스가 시작된 2013년 1월 80엔대에 불과했던 것과 비교하면 엔화의 가치는 불과 2년 만에 급격히 하락했다.

이트레이드 증권은 ‘엔의 정치학: 샷초동맹의 균열’ 보고서를 통해 엔화 약세는 아베정권과 생명을 같이한다고 전했다.

아베정권의 경제정책은 크게 ‘3개의 화살’로 상징된다. 우선 대담한 금융완화를 들 수 있다. 이어 기동적 재정운용과 민간투자를 끌어내 성장으로 이끄는 전략이다. 그 뒤에는 일본중앙은행(BOJ)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다. 여기서 ‘3개의 화살’은 일본말로 미쓰야(三矢)라 하는데 이 말은 일본의 정치 역사에서 낯선 단어가 아니다.

미쓰야 계획 ‘미쓰야 연구, 쇼와 38년 통합방위도상연구, 통합막료부 작성’이라는 보고서에는 한반도 유사시 작전계획이 포함돼 있다. 한반도에서 다시 전쟁이 발발하면 핵폭탄을 떨어뜨리고 주일 미군과 함께 자위대가 한반도에 상륙해 재주둔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여기서 ‘미쓰야’란 단어는 1965년 당시 방위청 장관이었던 고이즈미 준야(고이즈미 총리의 아버지)에 대한 국회의 대정부 질문에서 나온다. ‘미쓰야’는 한미 상호방위조약과 ‘미일 안보조약’을 기반으로 한 남한, 일본 그리고 미국 이 세 나라를 화살에 빗대어 표현한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아베 총리의 외할아버지인 기시 노부스케는 야당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1960년 ‘미일안보조약’ 개정을 통해 불평등한 부분을 대폭 개선한 현재의 미·일안보관계의 기본틀을 만들었다. 아베 총리에게 ‘미쓰야’라는 단어가 낯설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베 총리는 마치 준비했다는 듯 3개의 화살(미쓰야)을 들고 나타났다. ‘미쓰야’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엔화 약세는 아베 정권과 함께한다는 뜻이며 양적완화는 팽창을 뜻한다. 게다가 아베 총리는 외할아버지인 기시 노부스케처럼 강하게 그의 정책을 추진한다. '강한 팽창'을 하는 일본에게 ‘축소지향의 일본인’은 ‘패배’를 암시하는 듯하다.

 

일반적으로 반도 국가들의 특징은 열정적이고 국민들의 단합이 잘된다고 알려져 있다. 그 원인은 명확하지 않지만 우선 반도 국가는 대륙과 해양이 절충된 문화권으로 문명의 교두보 역할이 중요하게 다뤄질 수 있는 지정학적 위치에 있다. 따라서 문명의 교류는 물론 그만큼 주변 국가들의 충돌이 발생할 수 있다. 그만큼 내부적으로는 단합이 잘되고 외세의 침략에 맞서 싸우는 나라를 위한 열정이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다.

이를 보면 우리나라는 지정학적 위치는 물론 그 외에도 반도 국가의 성향을 가지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축구경기를 보면 알 수 있다. 서로 으르렁대고 싸우다가도 특히 한·일 축구경기는 국민 모두를 단합하게 만든다. 우리나라의 월드컵 길거리 응원은 해외에서도 놀랄 정도다. 아시아 외환 위기 때는 나라를 살리겠다며 너도 나도 할 거 없이 장롱 속에 있던 금을 꺼내 나라에 바쳤다.

우리나라의 또 다른 성향이라 하면 진출 시 힘이 강해지고 반대의 경우는 약해진다는 것이다. 고구려하면 광개토 대왕이 떠오르고, 한국 경제의 전성기를 누렸던 1980년대에는 그 이전부터 중동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의 노력이 있기 때문이었다.

 

반면,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통상수교거부정책)’은 반도 국가로서의 지리적 위치는 물론 500여년을 자랑하는 유교 국가인 조선에게 서양이란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존재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나라를 지키려는 의지와 함께 우리나라의 문화는 지킬 수 있었지만 현대문명에는 적응하지 못하게 된다. 이에 반해 일본은 1868년 메이지 유신을 통해 과감히 문호를 개방했고, 내적으로 축적된 역량은 물론 서구의 선진과학기술과 융합시켜 단기간에 국력을 신장시켰다. 1875년 일본군함 윤요호가 부산지역을 불법 측량하고, 강화도해협을 불법 칩입해 포격을 가했다. 흥선대원군의 실각(1873년) 후 윤요호 사건이 발생했기에 일본의 침략에 무기력하게 당한 조선을 두고 쇄국정책을 탓하는 것은 무리다. 다만, 폐쇄적인 정책이 국력 신장을 저해한 것은 아쉬운 일이다.

규제, 쇄국정책의 다른 이름

참여정부가 출범한 지난 2003년, 7836건에 달했던 규제는 노무현 정부가 들어선 후 8083건으로 증가했다.

이중 기업과 밀접한 경제활동을 담당하는 경제부처의 규제는 같은 기간 3392건에서 3467건으로 늘었다. MB정부 첫해인 2008년에는 5186건으로 또 다시 늘었고, 2009년에는 1만1050개로 늘어났다. 이후에도 규제는 해마다 늘어 2009년 1만1050건에서 2013년 말 1만3914건으로 증가했다. MB정부 임기 중에만 2864건의 규제가 늘었다.

규제의 증가세는 현 정부에 들어서도 이어지고 있다. 지난 8월 업계 및 규제정보포털에 따르면 지난 3월 이후 5개월 사이에 23건의 규제가 새롭게 생겨났다. 박근혜 대통령 주재의 ‘규제개혁 장관회의’를 통해 끝장토론을 벌인 후 오히려 규제가 늘어난 것이다.

‘기업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는 말이 있지만 규제는 기업들의 활동을 가로막는 것은 물론 더욱 위축시키는 판국이다. 기업들에 대한 규제는 개방을 저해하는 요소다. 21세기 현대판 ‘쇄국정책’이 한국 경제의 앞날에 빛이 될지 의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