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때 세계 젊은이들의 필수품이었던 워크맨을 대체하며 21세기 문화 아이콘으로 각광받던 휴대용 오디오 MP3 플레이어. 애플에서 쫓겨났던 스티브 잡스가 복귀해 화려하게 재기할 수 있었던 건 바로 MP3 덕분이었다. 그가 2001년 10월 발표한 MP3 ‘아이팟’은 세계시장을 휩쓸며 PC시장에서 하향세를 그리던 애플을 부활시켰다.

2009년 말까지 2억5000만개나 팔았다. 하지만 이 MP3를 세계 최초로 개발한 주인공은 따로 있었다. 한국의 작은 벤처기업인 엠피맨닷컴이다. 이 회사가 누릴 수도 있는 영광을 어째서 애플이 가져간 것일까.

원천 기술에 대한 특허권을 지키는 데 소홀히 했던 것이 후발주자들에게 틈새를 제공한 단초가 됐다. 경쟁사들의 잇따른 특허 분쟁으로 회사는 점점 어려워졌고 결국 레인콤에 인수됐다. 혁신적인 기술 개발로 전도유망했던 ‘작은 거인’은 그렇게 사라지고 말았다.

특허 경영을 어떻게 하느냐가 기업의 생사를 판가름하는 중요한 잣대가 되고 있다.


당시 김경태 엠피맨닷컴 대표대행은 “특허를 지킬 능력이 없다면 아무리 원천기술이 있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냐”며 후회했다고 전해진다. 레인콤은 ‘아이리버’라는 브랜드를 구축하고 엠피맨닷컴의 기술을 기반으로 새로운 제품을 선보이며 승승장구했다.

미래 디지털 생활을 보여주는 상징이라는 마이크로소프트 빌 게이츠 회장의 찬사를 받기도 했다. 당시 양덕준 레인콤 대표는 MP3 시장 1위 자리를 놓고 스티브 잡스와 격돌, 패권을 다퉜다. 그러나 디자인과 서비스에서 혁신을 일으킨 아이팟이 나오면서 승기는 애플 쪽으로 기울었다.

경영난에 빠진 레인콤은 2006년 엠피맨닷컴의 특허권을 미국 시그마텔에 넘겨줬다.
우리나라가 종주국으로서의 위용을 떨치기도 전에 국내 업체간 분쟁으로 결국 MP3 플레이어 원천기술 특허권은 해외로 빠져나가게 됐다.

지재권 방어는 승리기업의 요건

기술 개발 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지면서 연구개발(R&D)의 결과물인 특허는 기업을 비롯한 국가의 핵심 경쟁력이 됐다. 엠피맨닷컴은 세계 최초의 MP3 플레이어 원천 특허를 보유했으나 그 수가 단 3건에 그쳐 세계 무대에서 쓸쓸히 퇴장해야 했다. 일본의 소니가 이룬 ‘워크맨 신화’보다 더 화려한 신화를 쓰겠다던 꿈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국내 PC생산업체 삼보컴퓨터도 특허 전략의 부재로 한순간에 공든 탑이 무너지는 상황을 맞았다. 이 회사의 미국 법인 이머신즈가 컴팩컴퓨터를 인수한 휴렛팩커드(HP)와의 특허권 관련 소송에서 패소한 것. 법원은 컴팩이 보유하고 있는 특허권 9개를 침해했다고 판결, 이머신즈에 대해 9개 특허권 가운데 2개를 영원히 이용할 수 없다는 금지 명령을 내림으로써 해당 기술을 제품에서 제거하거나 이 기술이 적용된 제품을 미국에서 판매하지 못하도록 했다.

이 때문에 삼보컴퓨터는 저가 컴퓨터로 미국 시장에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행보에 큰 타격을 입었다. 두 사례에서 보듯이 치밀하게 특허 전략을 세우지 않으면 이제 세계 특허 전쟁에서 살아남기 어렵다.

특허청 우종균 산업재산정책국장은 “기업이 특허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강한 특허 포트폴리오를 구축하는 것과 함께 특허를 전략적으로 관리하고 활용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특허청은 이와 관련, 지식재산권 중심의 기술 획득 전략을 방법론으로 제시하고 있다. 5∼10년 후 미래시장을 주도할 제품과 그 제품 생산에 필요한 최강 특허 포트폴리오를 미리 확인하고 이를 확보하기 위한 구체적 전략을 미리 설계해 이에 따라 기업의 R&D 전략과 경영전략을 수립하는 것이다.

미국 퀄컴은 무선통신 운용에 필요한 코드분할다중접속(CDMA) 기술을 개발하고 1700여 건의 관련 특허 포트폴리오를 잘 설계한 덕분에 거액의 로열티(특허권 사용료)를 벌어들이며 미국 주식시장에서 우량기업으로 발돋움했다. 안전면도기를 발명한 미국의 면도기 회사 질레트도 균일코팅 기법 등 핵심 기술에 대한 1000여 개의 특허를 확보해 세계 시장 1위를 지키고 있다.

IBM은 2009년 4914개의 특허를 획득해 17년 연속 최다 특허 보유 1위에 올랐다. 국내 기업으로는 LED 전문회사 서울반도체가 눈에 띈다. 앞선 첨단 기술력과 조명, TV 등 관련 분야에서 5000여 건의 강력한 특허 포트폴리오를 보호막으로 무장했다. 그 결과 특허 소송이 잦은 LED 업계에서 미국, 일본, 대만 등을 제치고 경쟁 우위를 점하며 매출 1조 원대 돌파를 눈앞에 두고 있다.

구멍난 특허 경쟁력 보완대책 시급

우리나라는 특허 건수만 본다면 세계 상위권이다. <2010년 지식재산백서>에 따르면 2009년 국내 특허 출원 건수는 16만3395건, PCT(특허협력조약) 국제특허 출원도 매년 증가해 8066건으로 미국, 일본, 독일에 이어 세계 4위를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 기업들의 특허 경쟁력은 많은 특허를 보유하고 있음에도 특허 선진국의 추세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나라는 2008년 31억 달러의 기술무역 적자를 기록했다. OECD 국가 중 44억 달러의 적자를 낸 스위스에 이어 두 번째로 큰 규모다. 기술 혁신을 위해 R&D 투자를 확대, GDP 대비 총 연구개발 비중이 세계 5위 수준에 이르렀으나 기술무역 수지 적자는 계속 확대되고 있다.

특허 관련 분쟁도 2006년 47건에서 2009년 106건으로 증가했다. 게다가 6만 건의 등록 특허 가운데 5만 건은 활용되고 있지 않다고 한다. 특허를 통한 수익 창출과 방어 수단으로서의 역할 모두 취약한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특허 경제 환경의 급변화는 한국 제조기업에게 위기로 다가올 수 있다는 분석이다.


특허관리 전문회사 등장 ‘청신호’

최근 특허가 비즈니스 수단으로 부상했다. 2000년대 들어서 제조 활동 없이 특허를 집중 보유해 전문적으로 관리하는 특허 전문 관리 회사(NPE, Non-Practicing Entity)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들은 2001년 IT업계를 덮었던 거품이 사그라지면서 파산한 벤처기업들의 특허를 사들여 막대한 로열티 수입을 올렸다. 특허 매입이 확대되면서 거래 시장도 급성장했다. 2억 달러 수준에 머물던 시장 규모가 2008년에는 14억 달러 이상을 웃돌 만큼 확장됐다. 그러자 중개, 평가, 금융 등 다양한 특허 비즈니스 모델을 가진 기업들이 등장했다.

이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건 ‘특허 괴물’의 출현이다. 본래 개인이나 기업으로부터 특허를 사서 로열티 이익을 창출하는 라이선싱 회사지만 특허권을 침해한 기업에 소송을 제기해 거액을 거둬들이고 있어 이 같은 용어가 생겨났다. 실제로 이들이 제기한 소송 건수가 2000년 100여 건에 불과하던 것이 최근에는 500건 정도로 크게 늘었다.

대표적인 특허 괴물은 미국의 인텔렉추얼 벤처스(IV)다. IV는 사모펀드 형태로 라이선싱 사업을 하는데 50억 달러 이상의 펀드를 조성해 3만건 이상에 달하는 특허를 확보했다.

영향력이 큰 특허들을 기반으로 소송을 걸어 세계 산업계를 긴장시키기로 유명하다. 얼마 전, 9개 글로벌 IT 기업을 상대로 특허 소송에 들어갔고 여기에는 한국의 하이닉스도 포함돼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난해 11월 삼성전자가 바로 이 IV와 라이선스 계약을 체결했다. 현재까지 특허 소송에서 최다 피소를 당한 삼성전자다. 이번 계약을 통해 IV가 보유한 특허를 폭넓게 사용하면서 특허 포트폴리오를 강화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그 대가로 수천억 원에 이르는 엄청난 액수의 금액을 지불했을 것이란 추측도 들린다.

특허 괴물에 의한 기업 피해가 늘면서 이에 맞서는 비즈니스 모델도 등장했다. 시스코, 소니, 노키아, HP, IBM, 필립스 등 16개 글로벌 기업이 만든 특허방어펀드 RPX가 그것. 분쟁 소지가 있는 특허를 매입해 특허 괴물에 대응하는 회사다. 삼성전자와 LG전자도 이 펀드에 회원으로 가입했다.

국내에도 특허 괴물에 대항하기 위해 지난해 9월 처음으로 정부와 민간기업이 공동 설립한 지식재산 전문회사 인텔렉추얼디스커버리가 출범했다.

공세적 특허전문가팀 구축 등 시도 눈길

전문가들은 지금까지 양적 성장과 특허 분쟁 위험을 피하려는 방어에 치중해 온 국내 특허 전략을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삼성경제연구소 임영모 수석연구원은 <진화하는 특허 비즈니스>라는 보고서에서 “한국기업은 매출이 많으나 상대적으로 특허 경쟁력이 약하기 때문에 강력한 특허망을 구축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세계에서 가장 큰 특허 유통시장인 미국의 특허 전문회사들을 활용해 특허 역량을 보완하고 각 분야의 전문가들로 구성된 특허팀을 구축하는 방안도 고려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지식재산 강국 실현을 위해 정부는 지난해 상반기 <지식재산기본법>을 마련했다. 대통령 직속 국가지식재산위원회를 설치하고 국가 어젠다로 추진하고 있다. 선진국과 비교하면 다소 늦은 감이 있지만 절박한 과제인 만큼 적극적이고 강력한 지원 전략과 정책이 뒷받침될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뜨는 ‘특허비즈’ 기업

특허 생태계의 변화로 다양한 특허 비즈니스 기업들이 등장했다. 오션토모(OceanTomo)는 2006년 세계 최초로 오프라인 특허 경매를 시작했다. 2010년 시카고 탄소배출권 거래소 사장을 영입해 특허권을 주식처럼 거래하도록 중개해주는 IPXI(IP Exchange International)를 설립했다. 매각 후 라이선싱, 특허 담보대출, 지적재산 유동화 증권 발행 등 다양한 특허 금융 서비스를 제공한다.

특허 침해 전문조사 기업도 나타났다. 칩웍스(Chipworks)는 반도체와 전자제품의 특허 침해 여부를 전문적으로 조사한다. 회로, 시스템 등 다양한 분야의 70여 명의 기술자가 침해 가능제품을 발굴하고 기술적 증거 등을 확보한다. 지금까지 3만 건의 특허와 1만 개의 제품 조사를 실시했다. 자료 : 삼성경제연구소 ‘진화하는 특허 비즈니스’ 보고서

전희진 기자 hsmile@asia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