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한 편의 영화가 대한민국 전체를 눈물바다로 만들었습니다. <울지 마, 톤즈>라는 다큐멘터리였습니다. 사람들이 너도나도 앞다투어 아프리카로 구호 물품을 보냈고, 아무도 가지 않았던 아프리카 오지로 의료봉사를 자청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대한민국에 나눔의 아름다움을 알려 준 분이 <울지 마, 톤즈>의 주인공 이태석 신부님입니다. 이태석 신부님은 원래 의사였습니다. 

의사로 편하게 잘살 수도 있었지만, 신부님이 되어 더 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어야겠다고 다짐한 후 성직자의 길을 걸은 것 입니다. 그리고 신부님이 되어 아프리카 수단에서도 가장 가난한 땅인 톤즈로 떠났습니다. 수단 톤즈에 도착한 이태석 신부님은 충격에 빠졌습니다. 하루 한 끼도 제대로 먹지 못해 뼈만 앙상히 남은 사람들, 전쟁으로 인해 부서진 건물과 수족이 없는 장애인들, 거리를 누비는 헐벗은 사람들.

기온이 40~50도를 오르내리는 불볕더위는 가만히 있어도 등줄기를 흥건히 젖게 만들고, 숨이 턱턱 막혔습니다. 지네를 비롯해 이름 모를 벌레들은 살충제를 뿌리고 모기장을 쳐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벌레가 문 자리는 순식간에 부풀어 올랐고, 나중에는 벌레가 더 물어뜯을 자리가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해마다 2월쯤 홍역이 번지면 많은 아이들이 죽었습니다. 이태석 신부님은 환자를 무료로 진료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날 신부님은 나환자 마을로 진료를 갔습니다. 그곳에서 다달이 강냉이와 식용유를 나누어 주었지요. 한 번은 일곱 살쯤 된 여자아이를 진찰하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나병은 아니었지요. 이태석 신부님은 다행이라며 아이 엄마에게 축하한다고 말했지만 아이의 엄마는 실망한 모습으로 돌아섰습니다. 이태석 신부님은 왜 기뻐하지 않느냐고 물어봤습니다. 

그러자 그 엄마가 말했습니다. “나병에 걸려야 강냉이와 식용유를 얻을 수 있잖아요.” 신부님은 저주 같은 가난이 사람들을 너무나 불행하게 만든다고 생각하며 더욱더 진료에 매진했습니다. 이태석 신부님이 아프리카 수단에 갔을 때 거리에서 구걸하는 아이들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들이 달라고 하는 것은 돈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펜’이었습니다. 아이들은 공부를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 톤즈에는 학교가 없었습니다. 이를 안타깝게 생각했던 신부님은 뜨거운 뙤약볕 아래에서 혼자 벽돌을 구워 학교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한국 학생들이 입다가 버린 교복을 가져와 아이들에게 나눠 주고 통나무로 책상을 만들어, 흙바닥에 나뭇가지로 글을 쓰면서 공부를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전쟁과 병으로 죽은 가족이나 친구들로 가슴에 상처를 입은 아이들을 위로하기 위해 한국에서 낡은 악기를 가져와 아이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아이들은 놀라울 만큼 열심히 연습해서 밴드까지 만들었지요. 

아이들의 실력도 대단해 한 번은 수단의 대통령이 밴드를 초대하기에 이르렀죠. 그렇게 이태석 신부님은 아픈 사람들의 병을 고쳐 주고 아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치며 희망의 싹을 틔워 주었습니다. 2010년, 이태석 신부님이 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마지막 미사를 올리던 날, 묘지 위에 아름다운 무지개가 떠올랐습니다. 오늘도 톤즈의 아이들은 이태석 신부님을 그리워하며 밴드 연주를 합니다. 신부님이 세상을 떠나고도 많은 사람이 신부님의 뒤를 이어 봉사의 길을 떠납니다. 그리고 이 움직임은 이태석 신부님을 기억하는 한 영원히 계속되겠지요.

본 기사는 아하경제신문 2014년 제 218호 기사입니다.
아하경제신문 바로가기(www.ahaeconom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