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M&A 태풍의 핵인 현대건설 인수전은 이제 중심점을 잃은 상황이다. 새 국면이 새 화합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사진=아시아경제 이기범 기자).


현대그룹의 현대건설 인수합병(M&A)이 사실상 무산될 것으로 보인다. 채권단이 인수 자격을 박탈하기로 결정했다. 전체회의에 ▲주식매매계약 체결 승인안과 ▲양해각서(MOU) 해지 동의 안건을 올렸다.

또 ▲현대그룹이 낸 이행보증금 반환 ▲ 현대차그룹의 우선협상자 지위 부여 문제도 포함시켰다. 다수의 안건이 상정된 것은 다양한 법률적 상황을 대비하기 위한 의도라는 게 채권단 관계자의 귀띔이다. 현대그룹이 채권단의 결정에 불만을 갖고 소송을 제기한다 하더라도 어떤 상황에서든 협상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현대그룹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채권단이 보인 그동안의 행동은 상식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우선협상권을 뺏길 수 없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라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할 예정이다.

아닌 밤중 홍두깨 결과에 당혹

현대그룹은 “채권단이 우선협상자 지위를 뺏으려 한다”며 법원에 ‘양해각서(MOU) 해지 금지 가처분 신청’을 낸 바 있다. 지난 11월16일 현대건설 M&A 우선협상자로 선정된 지 불과 한 달 만에 지위를 박탈당할 위기에 놓였으니 당연한 일이었을 게다.

현대건설 M&A가 이렇게 된 데는 채권단의 책임이 가장 크다. 우선협상자 선정에 있어 면밀한 검토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조건 높은 금액을 써낸 기업의 손을 들어준 것이 가장 큰 실수다. 경쟁력 향상, 경제적 효과에 높은 점수를 주겠다고 했던 채권단이다.

무조건 돈을 많이 적어 낸 곳의 손을 들기 전에 철저한 검증이 선행됐어야 한다는 얘기다. 유재한 정책금융공사 사장은 “대출 자금 확인 절차를 거쳐 미흡하거나 부족하면 정도에 따라 상응한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뒤늦게 밝히기도 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현대그룹이 우선협상자로 선정된 직후부터 자금 출처에 대한 논란이 쏟아져 나왔다. 정·재계에서 채권단을 공격했다. 현대그룹이 제시했던 인수가 5조5000천억 원 중 외부자금 2조 원의 출처가 분명치 않다는 게 이유다.

특히 프랑스 나타시스 은행에 예치돼 있는 1조2000억 원의 대출금에 대해선 외환법 위반 논란에 해당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대출금을 예금해 놓은 경우라면 어떤 담보를 제공했는지 등도 따져보지 않았다는 것. 자금 출처는 향후 매각 기업의 정상화에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만큼 꼭 따져봐야 했을 부분이다.

문제가 제기되자 채권단은 현대그룹에 자금 출처의 자료를 요구했다. 정확히 말해 1조 2000억 원의 대출계약서를 요구했다. 당초 우선협상자 선정 당시 자금 활용 등에 대한 부분을 꼼꼼히 살피지 못했으니 다시 살펴보겠다는 것.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는 꼴이 됐다. 현대그룹이 채권단의 요구에 순순히 응하지 않은 이유다.

현대그룹은 “입찰 규정도 지켰고, 자금 출처도 모두 밝힌 이상 추가 자료를 낼 필요가 없다”고 받아쳤다. 채권단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법적 의무가 없다고 한껏 목소리를 높였다. 채권단이 요구한 대출계약서만 제출하면 현대건설 M&A를 둘러싼 의혹이 어느 정도 해소될 수도 있었다는 지적도 있다.

여기에서 눈여겨봐야 할 점은 현정은 회장의 선택이다. 현 회장은 실리를 중시하는 경영자로 손꼽힌다. 현대건설 인수가 그룹 경영권 위협에 직결되는 현재 상황을 지켜만 보고 있을 수는 없다. 무슨 수를 내놓아야 할 때다.

채권단과 끝까지 싸움을 벌인다면 법정 소송밖에는 뾰족한 대안이 없다. 현재대로라면 현 회장은 채권단이 요구한 대출계약서를 공개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현대그룹은 “대출확인서의 법적 효력에 문제가 없다”며 채권단의 행동이 부당하다는 입장이다.

채권단은 현대그룹의 인수자격이 박탈될 경우 예비협상대상자인 현대차그룹에게 우선협상대상자의 지위를 부여하는 쪽에 무게를 두고 있다. 남은 관건은 사태 봉합을 위한 시간과 결단이다.

인수 포기 고통스런 결단에 무게

현대그룹의 현대건설 인수 자격이 박탈되면 현대차그룹이 우선협상자 자격을 승계 받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M&A 계약상 우선협상 대상자가 지위를 잃게 될 경우 차선에게 자격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채권단은 관계자는 “현대그룹이 제출한 자료가 불충분했다”며 “인수자격이 박탈될 경우 예비협상대상자인 현대차그룹에게 우선협상대상자의 지위를 부여할지 여부는 추후 주주협의회에서 결정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M&A전문가는 “현대건설 매각에 있어 현대그룹의 자격이 상실될 경우 현대차그룹으로 공이 넘어가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말했다. 현대건설 같은 대형 M&A의 경우 매입자가 선뜻 나서기 힘든 만큼 채권단 입장에선 어떻게든 매각을 마무리 짓기 위해 노력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당초 우선협상자 선정 과정에서 현대건설 인수 후 미래 발전 가능성에서 현대차그룹이 현대그룹보다 높은 점수를 받았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금융권 관계자는 “향후 경제적 효과만 놓고 봤을 때 현대차그룹이 현대그룹 보다 앞선 것은 사실”이라며 “채권단도 이점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문제는 그 시점이 언제가 되느냐는 것이다. 법정 소송이 난무한 상황에서 채권단이 현대차그룹의 손을 당장 들어줄 수는 없는 노릇. 사태를 진정시킨 뒤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현대건설의 매각은 국가 경제 뿐 아니라 기업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친다. 채권단도 이점을 인지하고 있다. 채권단 관계자는 현대차와 협상이 언제쯤 이뤄질 것으로 예상하느냐는 질문에 “가능한 빠른 시일 내 처리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김세형 기자 fax123@asia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