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자금 조성 혐의를 받고 있는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이 조사를 받기 위해 지난 1일 오후 서울 마포구 서부지방검찰청으로 출두하고 있다.(사진:아시아경제 윤동주 기자)


'2차례의 총수 소환, 20여 차례의 압수수색, 600여 명의 소환조사.’ ‘사면초가’한화그룹의 상황이 딱 이렇다. 검찰의 비자금 의혹 수사의 강도는 날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의심될 만한 사안에 대해선 먼지 한 톨까지 모두 털어낼 기세다.

뭔가 걸려도 단단히 걸린 것일까. 그런데 웬걸. 검찰은 아직까지 이렇다할 만한 성과를 내놓지 못하고 있다. 수개월째 제자리만 맴돌고 있는 모양새다. 한화그룹의 전 CFO(재무최고책임자) 홍동옥(62) 여천NCC 사장에 대해 최근 구속영장을 청구했지만 법원에서 기각 당했다. 검찰 안팎에선 이를 두고 한화의 비자금 의혹 수사가 해를 넘길 것이란 얘기도 나오고 있다.

한화 비자금 의혹이 제기된 것은 지난 6월. 한화증권의 퇴직 직원이 금융감독원에 차명계좌 관련 비자금 의혹 관련 자료를 넘기면서 시작됐다. 금감원은 두 달간 조사를 벌인 뒤 8월 대검찰청에 자료를 넘겼다. 9월부터 서부지방검찰청이 사건을 담당, 수사를 벌이고 있다. 한화가 사정당국으로 부터 조사를 받고 있는 기간은 무려 6개 월. 내사가 아닌 수사치고는 긴 시간이라는 게 재계 전문가들의 말이다.

실제 기업에 대한 검찰 수사는 속전속결로 처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조용히 내사를 거쳐 물증을 확보한 뒤 마지막으로 총수를 불러 처리하는 식이다. 검찰 수사가 장기화 될 경우 기업 전반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최근 김준규 검찰총장이 “검찰 수사는 외과 의사처럼 신속히 환부만 도려내야 한다”고 밝힌 것도 이 때문이다.

대한상공회의소 관계자는 “검찰의 수사가 장기화 될 경우 기업이 받는 압박은 엄청나다”며 “진실은 밝히되 기업과 경제에 미칠 충격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검찰은 수사에 신중을 기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날선 ‘검찰 칼날’에 경영전략 올스톱

검찰의 수사가 장기화 될 경우 기업이 받는 타격은 심각하다. 한화의 상황도 심각한 수준. 2011년 경영전략을 세운다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다. 연말 인사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조직에 타격을 받았다. 특히 당초 세워놨던 신규사업 확장 등의 계획이 모두 중단됐다.

한화증권과 푸르덴셜증권과의 합병이 지연되고 있는 것이 대표적 사례. 계획대로라면 금감원의 심사를 받고 금융위원회의 승인 여부를 기다리고 있어야 하지만 검찰 조사가 장기화됨에 따라 합병 작업에 손을 댈 수가 없다.

또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기 위한 전략에 빨간불이 켜졌다. 그룹 차원에서 추진했던 중국 솔라펀파워홀딩스 공장, 중국 닝보공장 증설, 중국 텐진 백화점 신규 추진에 차질을 빚고 있다. 특히 태양광 산업의 투자에 상당한 차질을 빚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미국 다운스트림 태양광 개발업체 인수와 국내 업체 인수 및 합작사업이 무산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화 관계자는 “검찰 수사가 장기화됨에 따라 본사뿐 아니라 계열사까지 신규사업 추진, 우수 인력 확보 등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또 “중장기전략에 기반을 둔 사업계획에 차질이 생기게 될 경우 기업 경쟁력 차원의 손실은 엄청나다” 고 강조했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 김승연 회장의 검찰 출두다. 일반적으로 총수의 검찰 출두는 사건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밝혀진 혐의에 대해 최종 확인 작업을 벌이는 식이다. 과거 비슷한 비자금 문제로 검찰 수사를 받았던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은 혐의 대부분이 밝혀진 상황에서 검찰에 출두 했고, 사건은 종결됐다.

그런데 이번엔 다르다. 김 회장은 지난 1일과 15일 검찰에 출두했다. 첫 번째는 어쩔 수 없었다고 하더라도 두 번째 출두 요청에 대해선 일정 등을 이유로 거절했을 법도 한데 검찰의 요청에 모두 응했다. 검찰의 수사를 통해 뚜렷한 증거가 확보되지 않은 상황에서 총수의 검찰 출두는 유례없는 일이다. 검찰은 지난 15일 김 회장의 조사가 끝난 직후 한두 차례 더 소환해 조사한 뒤 구속영장 청구를 검토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김 회장은 두 번째 검찰 소환 조사를 마친 소감에 대해 “내 팔자가 세서 그런가보다(웃음)”라고 말했다. 검찰에 대한 불만을 표시하기보다 그룹 경영 차질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라면 수사에 협조하겠다는 투다.

이런 점에 비춰봤을 때 김 회장이 두 번이나 검찰 소환 조사에 응한 것은 과감한 베팅인 듯 보인다. 자신의 안위보다는 그룹 경영에 차질이 심각해진 상황에서 사건을 최대한 빨리 마무리하겠다는 의도가 읽힌다. 특히 검찰의 잦은 총수 소환에 순순히 응하며 그룹의 경영전략 차질 등의 문제점이 알려질 경우도 염두에 뒀을 가능성이 크다.

저인망식 수사 경제에 악영향

검찰은 김 회장이 700억 원대의 비자금을 조성해 빼돌리고, 계열사에 수천억 원대의 계약을 몰아줬다는 의혹 등에 대해 집중 추궁한 것으로 알려진다. 이에 김 회장은 검찰이 주장하는 비자금은 선대 회장으로부터 받은 상속 재산이며 계열사 지원 차원에서 이뤄진 거래는 있지만 부당 계약은 아니었다고 답한 것으로 전해진다.

‘별은 혼자서 빛날 수 없다’는 말이 있다. 깜깜한 밤하늘과 빛을 전달해주는 매개체와의 조화. 삼박자가 모두 맞아 떨어져야 한다는 말이다. 기업 경영도 마찬가지다. 잘 갖춰진 경영 계획, 인재 확보 등 주변 여건이 잘 갖춰져 있어야 원활하게 돌아갈 수 있다. 뭔가 하나만 빠져도 삐거덕 거리기 십상이다. 검찰의 기업 사정 활동이 신속하게 이뤄져야 하는 이유다.

증권업계 관계자는 “검찰의 기업 사정 활동은 경제 활동의 긍정적인 부분에서 꼭 필요한 일이지만 사정 활동에 있어 저인망식 수사 방식은 바꿔야 한다”며 “(기업 수사는) 신속하고 정확하게 끝내는 게 기업이나 경제에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결정적 증거 못찾은 태광 수사도 장기화
지난 10월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태광그룹의 비자금 의혹. 검찰 수사 초기만 해도 엄청난 파장을 예고했다. 케이블TV 시장 확대를 위한 정관계 로비에서부터 계열사를 통한 수천억 원대의 비자금 실마리를 잡은 듯 보였기 때문이다.
검찰은 장충동 그룹 본사와 이호진 회장 자택과 집무실, 모친인 이선애 상무의 은행 대여금고 까지 압수수색을 벌였다. 또 오용일 태광산업 부회장과 고위 인사의 조사와 대다수 계열사에 압수수색을 실시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검찰은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으로 알려진다. 이 회장을 소환할 결정적 증거도 확보하지 못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회장은 검찰 수사 초기 입국해 현재 출국 금지 상태로 자택에서 머물고 있다.

김세형 기자 fax123@asia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