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산자나 소비자의 경제활동이 시장거래에 의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또한 부수적으로 제3자의 경제활동이나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외부경제효과’라고 한다. 이때 그 영향이 이익이면 ‘외부경제’, 손해면 ‘외부불경제’라고 한다. 

일례로 우리가 매일 이용하는 자동차의 경우 우리 생활에 편리함을 주지만 공기를 오염시키기 때문에 이에 대한 부담금을 낸다. 이를 해결해기 위해 자동차회사들이 전기자동차를 개발한 것이 긍정적인 외부효과인 ‘외부경제’라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긍정적인 외부경제효과를 장려하기 위해 전기자동차를 구매하는 사람들에게는 국가에서 보조금을 준다. 전기차를 생산하는 자동차회사와 정기차를 구매하는 소비자를 장려하기 위한 정책이다.

반대로 쓰레기를 벌이는 행위는 부정적인 외부효과인 ‘외부불경제’에 해당한다. 이에 대해서는 억제하고 제제하기 위한 정책으로 가정엔 쓰레기봉투로, 기업엔 환경 부담금 등의 과세와 규제를 가 한다.

 ‘외부경제’, 최근 외부 원고를 작성하게 되면서 처음으로 접해본 용어다.

경제에 해박하지는 않지만 설마 초등학생과 중학생, 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글이 어려우면 얼마나 어려우랴 싶던 마음을 한 순간 사라지게 만든 주제다.

더욱이 고등학생도 아니고 중학생들이 배우는 중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용어라는 점에서 한번 더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경제’라는 분야를 중학교에서, 검정 교과서로 가르친다니. 고등학교에서는 ‘우주선 개발하는 법’이나 ‘워랜 버핏의 금융학’ 머 이런 걸 가르치는 걸까?

궁금하면 물어보라고 선전하는 000포털을 통해 ‘검색 찬스’를 썼다. 니코틴의 악영향일까? 참으로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기 쉽지 않았다.

검색 찬스로 일부 궁금증을 해소한 뒤 과연 이런 용어를 중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이 사실인지 궁금해서 담당 주무부처인 교육과학기술부 교과서 담당관에게 문의를 했다.

“저 중학교 교과서에 ‘외부경제’라는 용어를 나온다는데 맞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담당자는 “네? ‘외부경제’요? 그게 먼데요? 그런 용어가 나와요?”라며 오히려 되물었다.

순간 마음속에서 작은 희열(?)을 느끼며 다시 물었다. “중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과서에 수록된 내용이라는데 모르세요? 담당자 아니신가요?”

조금은 당황한 듯 한 그는 “에휴 제가 혼자 담당하는 중학교 교과서만 수 천권인데 그걸 어떻게 세부적인 내용까지 파악하겠습니까.”

이젠 떳떳(?)하고 당당(?)하게 물었다. “아니 학교 선생님으로 학생들을 가르치셨던 분이 모르세요? 교과서에 이런 내용이 있는지도 파악이 안되나요?”

조금 더 위축된 그는 “현장을 떠난 지 조금 오래됐고...현장으로 문의하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만...”

교과부 담당 공무원과의 통화를 통해 자신감(?)을 회복한 후 서울시내 모 중학교에 연락해 경제를 가르친다는 3학년 사회선생님과 통화했다.

같은 질문에 대해 그 선생님은 “그런 어려운 경제용어를 왜 가르치는지는 교과과정에 포함시킨 정부 당국에 물어보시고요. 휴... 외부경제요? 네 가르쳤죠...앞으로는 모르겠지만...”

이건 또 무슨 시추에이션이람. 무슨 의미인지 다시 묻자 그는 “이전까지는 분명히 가르쳤는데 올해 또 교과서 내용이 바뀌면서 올해는 안 가르쳤고, 내년에 또 교과서에 포함되면 다시 가르치겠죠...”란다.

그의 말에 따르면 매년 교과 내용이 달라진단다. 매년. 또 교과서도 7개 이상의 출판사에서 제각각 내용을 다르게 펴내고 있다.

결국 현재 중학교 교과과정에서 ‘외부경제’를 가르치는지 안 가르치는지를 확인하려면 서점에 가서 모든 경제교과서를 펴고 일일이 살펴 본 후, ‘외부경제’가 포함된 교과서를 채용한 중학교가 어딘지 또 일일이 확인해봐야 알 수 있을 거란다.

다시 한번 ‘교육은 국가의 100년지 대계이며 청소년은 국가의 미래’라고 주장하는, 그런 대계와 미래를 이끄는 정부 관계자들의 생각과 얼굴이 진정으로 궁금해 진다.

아주 작은 주제인 ‘외부경제’를 놓고도 현 우리나라 교육 현실이 어떤지 한 숨이 나오는 판국에 전반적인 입시체계와 교육과정을 논하기엔 우리의 미래가 너무 무섭다는 생각이 든다.

올해도 어김없이 11월 13일에 수학능력시험이 진행된다. 과연 학생들은 무엇을 ‘수학(修學)’했을까. 또 시험을 내는 이들은 그들이 무엇을 배웠는지 알고 문제를 출제하는 것일까라는 우문(愚問)을 하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