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 신간 서적이 배송돼왔을 때 서평자의 처리과정은 늘 비슷하다. 봉투를 뜯고 책 제목을 보고 저자와 출판사를 훑는다. 책 갈피에 꽂힌 A4용지 몇 장짜리 보도자료를 속독으로 읽는다. 이 1분 남짓한 시간에 경제전문 주간지의 성격과 수준에 부합하는 책인지 여부가 감별된다.

지난 수요일(15일) 오전 책상 위에 올려진 책은 저자명이 눈길을 끌었다. ‘최태원 지음’. 동명이인일까. 표지 안쪽 날개에 적힌 저자 소개에는 SK그룹회장이라든가, 시카고대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다든가 하는, 우리가 아는 그 ‘최태원’임을 식별할 만한 내용이 일절 없었다. 물론 최 회장이었다. 문정인 연세대 교수의 추천사를 읽고서야 알았다.

저자의 의도적인 프로필 숨기기는 자신에게 쏠릴 의혹 어린 시선들을 피하고, 독자들이 책 내용에만 주목해주길 바란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그 의도는 정당한 보상을 받게 될 것 같다. 책을 읽어보니, 저자의 주장하는 바는 실제로도 ‘주목할 만하다’. 여느 사회적 기업 안내서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저자는 경제학 전공자이자 경영자로서 다양한 사회적 기업들을 설립·경영하고 이론을 천착한 끝에 마침내 사회적 기업의 존재가치를 높이고 정체된 사회적 기업 생태계를 활성화할 대안을 내놓기에 이른 것이다.

저술의 배경은 대략 이렇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이 강조되면서 대기업들은 매년 막대한 사회공헌비용을 지출하고 있다. 하지만 저자는 이런 활동이 사회적으로 어떤 가치를 얼마나 만들어내는 지, 사회문제 해결을 제대로 하는 지, 더 좋은 곳에 자원을 사용할 수는 없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그러던 중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데 특화된 조직인 사회적 기업이 CSR 활동을 보다 효과적으로 수행하는 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저자는 이후 사회적 기업을 창업하거나 창업을 지원하면서 사회적 기업이 사회 전반의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그러나 최근 사회적 기업 대다수가 공익성 추구와 지속가능성이라는 상충된 문제를 두고 딜레마에 빠져 있다.

저자는 이쯤에서 매우 창의적인 해법을 제시한다. 사회에 꼭 필요한 기업들이 경영악화로 문을 닫거나, 생존을 위해 사회적 가치를 포기한 채 이윤추구에만 나서는 일이 없도록 인센티브를 주자는 것이다. 인센티브는 사회적 기업이 얼마만큼 사회적으로 가치있는 일을 하는 지 측정·평가해 그에 비례하여 지급하는 것인데, 저자는 이를 SPC(Social Progress Credit)라고 작명했다(문정인 교수는 SPC가 획기적 아이디어이므로 ‘최태원 크레딧’이라고 불러도 무방하다고 말한다).

SPC가 도입될 경우를 생각해보자. A사가 사회적 가치에 대한 성과측정을 통해 금전적 SPC를 받게 된다면, A사는 자금난에서 벗어나 지속가능성을 한층 높일 수 있다. 투자자들과 기업들은 새삼 A사에 투자할 매력을 느끼게 될 수 있다. 이를 지켜본 다른 사회적 기업들도 공익성을 추구하면서도 혁신을 강화하게 될 것이다. 저자는 이처럼 SPC가 사회적 기업의 생태계에 선순환을 촉발하는 방아쇠가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경영자답게 대안은 현실적이고, 경제학도답게 논리는 치밀하다. 정부나 영리기업, 기성 시민단체로는 어쩌지 못할 정도로 사회문제의 확산속도와 규모가 심각하다는 점에서 시의적 의미도 크다. 이 저술이 향후 ‘최태원 크레딧’을 도입하기 위한 정책당국과 학계, 사회적 기업 간의 열띤 궁리의 시작이길 바란다. <이코노믹리뷰 편집인.숙명여대 글로벌서비스학부 객원교수>

 

<새로운 모색, 사회적 기업> 최태원 지음. ‘이야기가 있는 집’ 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