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의 ‘2014년 4월 16일’

2012년을 기점으로 반푸틴 시위대의 물리적인 기세가 한풀 꺾이고, 대통령을 직접적으로 겨냥한 정치적 공세도 기세를 잃어갔다. 하지만 러시아 정부와 VK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걸었다. 이런 상황에서 새로운 변수까지 부상했다. 우크라니아 사태가 터지며 러시아 정부가 또 한번 VK에 정보제공을 요청한 것이다.

파벨 두로프는 결단을 내린다. 그는 러시아 정부의 요청을 정식으로 거부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그는 러시아 정부가 보낸 공문을 VK 페이지에 전격 공개하기에 이른다. 전면전을 선언한 것이다. 당시 그가 올린 러시아 정부의 협조공문과 더불어, 그가 직접 VK 페이지에 올린 글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고 있다.

파벨 두로프가 VK페이지에 올린 글(내용이 방대해 축약)

[2013년 12월 13일, 러시아 연방보안국(FSB)은 우리에게 유로마이단(우크라이나의 유럽통합 지지운동) 시위 운동가들의 개인정보를 요구해왔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를 거부했으며 러시아 사법당국은 VK의 우크라이나 사용자들에게 손을 뻗치지 못한다고 자부합니다. 우크라이나 사용자들의 개인정보를 정부측에 넘기는 일은 불법일뿐만 아니라 VK를 신뢰해줬던 수백만 모든 우크라이나 친구들에 대한 배신행위입니다. 이 과정에서 개인적인 피해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후회하지 않습니다. 개인정보 보호는 그 이상의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 사태 이후에도 저는 더 소중한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양심’과 제가 지키고자 하는 ‘이상’입니다.]

그리고 5일 후, 파벨 두로프는 ‘러시아를 떠날 것이며, 다시 돌아올 생각은 없다’는 글을 남긴다. VK가 아닌, 페이스북에.

▲ 파벨 두로프. 사진제공 - 파벨 두로프 페이스북

파벨 두로프와 VK의 이별, 그리고

파벨 두로프는 사실상 VK에서 축출됐다고 보는 평이 적당하다. 이견의 여지는 있으나, 내부와 외부의 의견이 엇갈리기 때문이다. 대외적으로 파벨 두로프는 주주와의 불화 및 주주총회 의결에 따른 불명예 퇴진으로 자리에서 물러났으나, 일각에서는 러시아 정부가 주주를 사주했다는 설도 제기한다.

신빙성 있는 시나리오다. VK지분의 48%를 가졌으며, 파벨 두로프를 VK에서 밀어내기 위해 앞장선 메일닷루그룹은 푸틴의 최측근이자 철강재벌인 우스마노프가 막후로 군림하는 기업이기 때문이다. 이에 앞서 파벨 두로프는 2014년 1월 24일 러시아 통신 대기업인 메가폰에 자신이 보유한 VK주식 12%를 전량 매각했다.

해외로 나간 파벨 두로프는 잠시 러시아 정부를 비판하는 투사의 길을 걷는가 싶더니, 갑자기 푸에르토리코 동쪽에 위치한 카리브해 국가 ‘세인트 키츠 앤드 네비스’에 25만 달러를 기증하는 조건으로 시민권을 얻었다.

▲ VK 이미지. 사진제공 - VK

텔레그램의 탄생

2013년 8월, 파벨 두로프는 또 한번 세상의 중심에 선다. 가끔 그가 공식 석상에서 거론하던 ‘새로운 서비스’가 실제로 베일을 벗었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텔레그램’이었다. 물론 형인 니콜라이도 함께였다.

텔레그램은 대화내용을 암호화시켜 제3자가 모니터링 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봉쇄한다. 휘발성 모바일 메신저인 스탭챗과 비슷하게, 설정에 따라 서버기록도 완벽하게 사라지게 만든다. 만약 비밀 대화방을 설정하면 서버에는 기록조차 되지 않는다. 텔레그램은 완벽한 보안을 위해 탄생한 새로운 모바일 메신저인 셈이다.

서버는 독일에 있으며, 고도의 해킹기술로도 텔레그램의 방어벽을 뚫기 어렵다고 전해진다. 실제로 지난 3월 파벨 두로프는 20만 달러의 상금을 걸고 텔레그램의 암호와 메시지를 복원하는 해킹 콘테스트를 열었으나, 성공한 이는 없다. 덕분에 텔레그램은 주로 금융권 및 정부기관 사람들이 애용하는 모바일 메신저로 각광을 받고 있다.

▲ 텔레그램 이미지. 사진제공 - 텔레그램

파벨 두로프, 그리고 텔레그램은 무엇을 말하는가

2014년 10월 대한민국은 ICT 빙하기를 맞이하고 있다. 다분히 정치적인 이유로 시작된 사이버 검열과 다음카카오 논란, 그리고 ‘산업의 붕괴’는 모든 것을 ‘부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텔레그램은 260만이 넘는 가입자를 유치하며 국내에서 승승장구 하고 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파벨 두로프의 인생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텔레그램은 정치적 논리에서 자유롭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모바일 메신저다. 이를 위해 파벨 두로프는 자신이 키워낸 최고의 소셜 네트워크인 VK를 버리는 초강수를 뒀다. 러시아 경제 입장에서 이는 불행이다. VK가 지금도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한다고 하지만, 파벨 두로프라는 핵심인력이 없는 상태에서 얼마나 그 영향력을 유지할지는 미지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텔레그램은 ICT 산업의 붕괴와 그에 따른 ‘어쩔수 없는 선택’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텔레그램이 국내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러시아의 경우 VK가 흔들렸지만 텔레그램이라는 대안 서비스의 등장으로 체면치례는 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카카오톡에서 텔레그램으로 이용자가 넘어가는 것은 최소한의 여지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 심각한 문제다. 어쩌면 국내 IT 산업은, 텔레그램의 탄생으로 알 수 있는 러시아의 비극보다 더욱 처참한 것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