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했을때, 누군가 마음 속에서 ‘감사합니다’라고 했다면, 그것만으로도 행복하다"

2010년 6월 25일 소프트뱅크 주주총회.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은 담담한 얼굴로 단상에 올랐다. 호흡은 가빴지만 눈빛은 진중했다. 그는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향해 "이름도 모르는 어느 나라의 한 어린이가 흙 묻은 얼굴로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듣는 삶이 진정 가치 있다"며 "우리의 비전을 위해 모든것을 바치겠다"고 말했다.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나온다. 그 뿌듯한 표정 하나하나를 응시한 손 회장의 마지막 말은 단 하나였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제야 뜨거운 눈물이 승부사의 메마른 볼 위를 타고 흘렀다.

알리바바의 뉴욕증시 입성으로 세계가 요동치고 있다. 19일(미국시간) 뉴욕증시에서 첫 거래된 IT기업 알리바바의 주가는 공모가인 68달러보다 36% 가량 오르며 시가총액은 2169억2000만 달러를 기록했다. 예상된 대박이었다. 알리바바의 시가총액은 미국 증시에 상장된 IT기업 가운데 애플,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다음으로 네 번째로 큰 기업이 됐다. 창업주 마윈 회장은 단숨에 중국 1위의 부호가 됐다.

알리바바의 '매직'에 감탄하고 있는 세계는 한 인물을 주목하고 있다. 물론 영어교사에서 출발해 자신의 아파트에서 기적을 써내려간 마윈 회장도 화제의 중심이지만, 세계는 2004년 당시 마윈 회장과 단 6분의 면담을 마치고 2000만 달러를 알리바바에 투자해 14년만에 2500배가 넘는 수익율을 거둔 강심장에 감탄하고 있다. 일본 소프트뱅크 손 마사요시 회장. 우리에게는 손정의로 익숙한 불세출의 기업인이다.

 멸시받던 '조센진'

손 회장은 1957년 일본에서 태어난 재일동포 3세다. 할아버지 손중경은 1914년 밀항선을 타고 일본에 건너가 광산 노동자로 일하며 자리를 잡았으며, 아버지 손삼헌은 생선행상으로 간신히 생계를 꾸리던 극빈층이었다. 다만 아버지 손삼헌은 이후 파칭코와 부동산 사업으로 재산을 모았다.
 
일본 남부 규수의 사가현 도수시에 우후죽순 들어서 있던 판자촌에서 태어난 손정의는 어린 시절 '조센진'이라는 멸시를 받으며 성장했다. 하지만 손정의는 생선장수에서 파칭코, 부동산 사업으로 재산을 모은 아버지의 사업가적 기질을 물려받았다. 그는 아버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후쿠오카 지역의 명문 고등학교에 진학했을 때도 '최고의 학교를 만들어 보이겠다'며 당시 교장에게 사업 계획서를 제출하는 당돌함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후 손정의는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홀연히 미국으로 떠난다. 그리고 월반을 신청하는 즉시 3주만에 대입자격시험 자격을 신청했다. 당시 영어로 진행되던 시험이 일본인인 자신에게 불공평하다며 사전을 참고해 시험을 칠 수 있도록 항의했고, 결국 이를 관철시킨 일화는 유명하다. 그리고 손정의는 홀리네임즈 대학교를 거쳐 1977년 명문 버클리대 분교 경제학부로 진학한다.

 

사업가로의 비전

사업가로서의 전설은 여기서 시작된다. 대학생이던 그는 1년동안 무려 250개의 발명을 해내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당시 그가 발명한 '일본어 입력, 영어 표기 번역장비'는 100만 달러의 계약금으로 팔리기도 했다. 훗날 이 전자 번역기는 샤프에 매각되어 일본 전사신화의 시초가 된다. 여기에 일본에서 인기가 시들해진 스페이스인베더를 미국에 유통시켜 엄청난 수익을 남기기도 했다. 여세를 몰아 그는 미국 캘리포니아 오클랜드에 유니손 월드라는 어엿한 회사를 설립했으나 귀국하겠다는 부모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일본으로 돌아왔다.

일본에 돌아온 손정의는 1981년 자본금 약 1억엔(현재 약 91만 달러)에 직원 두 명을 영입해 고향 근처 오도로시에 IT 회사를 세운다. 소프트뱅크의 시작이다. 미국에서의 성공을 바탕으로 제2의 인생을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이제 막 태동하기 시작한 IT 사업은 수익성이 낮았으며, 그는 몇번이나 파산위기를 겪었다. 그러나 손정의는 자본금 위기가 닥쳐도 전자전시회에 꼬박꼬박 참여하며 소프트뱅크의 경쟁력 확보와 IT 트랜드를 스스로 체화했으며, 결국 소프트뱅크는 매출 35억엔의 어엿한 중견기업으로 성장했다.

 

거침없는 행보

1997년과 1998년은 손정의는 물론 소프트뱅크 전체에 기념비적인 시간이다. 미국의 거부인 로스 페스와 합작을 바탕으로 엄청난 성장을 이뤘기 때문이다. 덕분에 1998년 1월 소프트뱅크의 주식은 일본 대장성의 허가를 받아 장외시장에서 2부를 거치지 않고 곧장 도쿄증권거래소 제1부에 상장되었다. 유례가 없던 일이었다. 이후 손정의는 세계 미디어의 황제 루퍼트 머독과의 유명한 '기습 협상'을 계기로 디지털 위성방송 사업에도 진출한다.

이후 행보는 거칠것이 없었다. 1999년 나스닥재팬을 설립한 손정의는 2000년 소프트뱅크코리아를 통해 보안 전문 업체 시큐어소프트, 알리바바코리아, 헤이아니타코리아, 소프트뱅크 웹인스티튜트 등 한국의 4개 인터넷 업체에 109억 원을 투자하며 자신의 뿌리인 한국에도 본격 진출하기 시작했다. 또 일본은행 사상 처음으로 IT 업종이 은행업에 진출하는 첫 사례를 남기기도 했다.

하지만 승승장구하던 그에게도 시련이 찾아왔다. 2001년부터 세계 IT 사업의 불경기가 시작되며 소프트뱅크와 손정의는 추락하기 시작했다. 일본 소프트뱅크그룹은 2001년 약 9000억 원의 평가손실을 기록하며 흔들렸으며 야심차게 설립했던 나스닥재팬도 2002년 말 문을 닫았다. 심지어 2003년에는 소프트뱅크 주가가 94% 폭락하며 손정의는 '포브스'가 선정한 '역사상 가장 많은 재산을 잃은 부호'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