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말, 국내 패션업계는 글로벌 금융 위기라는 직격탄을 맞고 휘청거렸다. 원부자재 가격 상승에 따른 원가 인상과 극심한 소비 침체로 이어지면서 큰 타격을 입었다. 대표적 전통 브랜드인 쌈지와 톰보이의 부도 요인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후 자라, 망고, H&M, 유니클로 등 ‘패스트 패션’이라 일컫는 글로벌 SPA 브랜드들이 대거 유입돼 국내 가두상권을 빠르게 점령해 나가며 시장 판도를 변화시키고 있다.

최근에는 한·유럽연합(EU) 자유무역협정(FTA)이 체결돼 국내 패션업계가 또 한 번의 시련을 겪게 될 것으로 전망된다. 경기가 조금씩 회복되고 있다고는 하지만 불황의 그늘은 아직 여전하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위기를 기회로 삼아 성장세를 지속하는 토종 패션업체들이 있다. 제일모직, 이랜드, LG패션, 더베이직하우스, 영원무역이 그들이다.

국내 패션업체들이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디자인 강화 등을 통해 지속적인 성장세를 구가하고 있다.


글로벌 SPA 브랜드에 토종 SPA로 맞불

지난해 국내 패션시장 규모는 총 29조500억 원대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 중 상위 5대 기업 매출이 전체 시장의 18% 이상을 차지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최근 한국패션협회가 발표한 ‘한국 패션시장 트렌드 2009’ 보고서에 따르면 2009년 국내 패션회사들의 매출 실적은 제일모직 1조2380억 원, 이랜드 1915억 원, LG패션 9980억 원, 코오롱 9887억 원이었다.

SK네트웍스는 한섬 인수 효과로 8300억 원을 올린 것으로 조사됐다. 이들 회사 대부분의 올 상반기 매출도 호조세를 보이고 있다. 제일모직은 지난해 동기 대비 15% 가량 늘어난 6361억 원을 기록했다. 매출이 가장 많은 캐주얼 브랜드 ‘빈폴’이 13% 증가했고 신사복과 수입 브랜드도 좋은 성적을 거뒀다.

올 한 해 매출만 약 1조4000억 원을 예상하고 있다. 이에 대해 회사 측은 디자인 강화에 따른 결과로 분석하고 있다. 빈폴의 경우 뉴욕디자인스튜디오를 설립해 디자인력을 높인 효과를 톡톡히 봤다. 더불어 여성복 브랜드 ‘구호’를 ‘헥사 바이 구호’라는 이름으로 뉴욕에 진출시키고 콜렉션을 진행, 디자이너 브랜드를 강화하고 나섰다.

심문보 제일모직 홍보팀장은 “쌈지와 톰보이의 실패는 본사의 재무구조나 경영상의 문제에 큰 이유가 있겠지만 브랜드 관리를 소홀히 한 탓도 있다”며 “디자인과 브랜드 파워를 높이는 게 패션 회사의 본질이며 글로벌화 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말했다.

LG패션은 올 상반기 5300억 원의 매출을 올렸다. 이는 지난해 동기 대비 25% 가량 늘어난 수준이며 올해 1조 원을 무난히 달성할 것으로 보고 있다. 대표 브랜드로는 영국의 고가 여성·남성 정장 브랜드인 ‘닥스’, 여성 정장 및 캐주얼인 ‘질스튜어트’, 남성 정장 ‘마에스트로’, 아웃도어 브랜드 ‘라푸마’, 캐주얼 브랜드 ‘헤지스’ 등이 있다. 이 가운데 2005년부터 국내에 독점 판매해 온 라푸마가 두각을 나타내고 2006년부터 브랜드 가치를 지속적으로 높여 왔던 노력이 실적 상승에 작용했다.

더불어 남성 수트 브랜드 ‘TNGT’의 성공도 빼놓을 수 없다. 이상호 LG패션 전략기획실 과장은 “글로벌 SPA 브랜드의 공세가 국내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는 긍정적 영향도 미쳤다”면서 “세계를 공용 타깃으로 해서 제품이 나오다 보니 품질이 더 좋았으면, 디자인이나 스타일이 우리 정서와 취향에 맞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드는 부분이 분명 있다. TNGT는 그 대항마로 나온 우리 한국만의 패스트 패션 브랜드”라고 말했다.

TNGT는 기존 SPA 브랜드 대비 합리적인 가격, 한국형 핏(fit)과 디자인에 정장·수트 등 종류를 다양화시켜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이에 힘입어 지난해 여성용 ‘TNGT-W’까지 내놓았다.

업계에 따르면, 국내에서 해외 브랜드 비중이 50% 이상을 넘고 있지만 국내 기업의 해외 진출은 10%대에도 못 미친다. 국내 브랜드의 글로벌 시장 진출이 절실한 시점이다. 공략 제1 순위는 시장 잠재력이 큰 중국. 이랜드와 더베이직하우스는 중국에서 괄목할 만한 성장세를 보여 눈길을 끈다. 중국 진출에 성공하기까지의 일련의 행보도 서로 닮아 있다.

중국 진출…안정된 현지 기반이 관건

이랜드 중국사업부는 올해 1조3000억 원의 매출을 달성해 중국에 진출한 국내 패션회사로는 처음으로 이미 매출 1조 원을 넘어섰다. 무엇보다 시장을 예측하고 초기에 선점한 것이 주효했다.

1990년대 초반에 생산 지사를 설립하고 1994년, 중국내 영업법인을 세웠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중국인 눈높이에 맞춰 중국 사회에 동화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이와 함께 중국인의 취향에 맞는 디자인과 색상 위주로 제품을 집중 기획했다.

황우일 이랜드 홍보 담당자는 “30년간 디자인에 지속적으로 투자하고 많은 인력, 노하우를 확보했다”며 “중국 디자인팀이 현지에서의 고객 요구와 트렌드를 적극 반영한 것도 성공 요인”이라고 설명했다.

더베이직하우스가 특히 주목되는 이유는 경쟁이 너무 치열해 웬만한 대기업들도 성공하기 힘든 중국 시장에서 중견업체로서 견고한 입지를 다져나가기 때문이다. 올해 매출은 전년 대비 2.9% 성장한 1778억 원이다. 회사 측은 무엇보다 진출 초기에 방향 설정을 잘 했던 점을 비결로 꼽았다.

가두점을 주요 유통망으로 한 중저가 캐주얼 브랜드에서 백화점 및 쇼핑몰 위주의 쇼핑 트렌드, 가두 의류상권 비활성화 등 중국 현지 사정에 맞춰 콘셉트를 변화시켰다. 백화점 입점 방식을 택하고 가격을 중고가로 책정했다.

뿐만 아니라 베이직하우스, 마인드브릿지, 볼, 더클래스 등 국내 브랜드들을 현지에 맞게 복종별로 분리해 론칭했다. 예를 들면, 베이직하우스가 중국에서는 특화된 여성복 프리미엄 브랜드로 자리매김했다. 또 브랜드별 중국 디자인팀을 별도로 꾸리고 대신 한국 본사에 상주시켜 한국 디자인 경향과 한국 브랜드 선호도, 현지 취향 등을 잘 반영했다.

손병호 더베이직하우스 경영관리팀 대리는 “2004년 중국 법인을 설립하고 이듬해 하반기부터 본격적인 사업을 전개했다. 생산관리를 위한 현지 지역별 지사는 그 이전부터 있었다”며 “따라서 오랜 기간 중국 아웃소싱을 하며 네트워크 형성, 아웃소싱처 확보, 현지 사정에 밝은 인력과 전문가 대거 투입 등 이점이 많았다”고 말했다. 한국 기업이 중국에 진출하려면 현지 안정된 기반 구축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손 대리는 “매장만 낸다고 진출이 아니다. 정말 현지에서 성공하느냐가 진정한 진출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전희진 기자 hsmile@asiae.co.kr